두 딸 잃은 어머니, 알고 보니 가정폭력 가해자
김성호 평론가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 강력범죄, 특히 여성관련 흉악범죄 보도에 마치 경구처럼 뒤따르는 온라인상 유행어다.
왜 아닐까. 서사는 변명일 뿐 선택의 최종책임은 죄를 범한 당사자에게 있다는 게 주장의 근거가 된다. 인간이란 호기심에 취약하고, 흉악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의 모든 정보는 관심의 대상이 된다. 범죄자의 뒤를 캐내어 시시콜콜한 정보까지 굳이 알려주는 언론들의 요상한 저널리즘 또한 문제인 것이 사실이니만큼, 제도개선이며 피해보상처럼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주목하자는 이들도 이와 자리를 같이 할 수 있겠다.
그래서일 테다. 상세한 이유를 따져본 적 없이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격언이 합의된 바른 길인 양 뒤따르는 이들이 이 세상에는 무척이나 흔하다. 최근 만난 가까이 지내는 언론인 십여 명에게 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물어 다시금 확인한 답이니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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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파의 딸들 포스터 |
| ⓒ 필름다빈 |
물론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해 폐해를 자아내는 사례도 틀림없이 있다. 피해자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더하고, 사회적으로 어떠한 이로움도 낳지 못하는 악인의 서사도 수두룩하다. 더욱 큰 문제는 일선에서 이야기를 다루는 이들이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언제나 합당하게 갈라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격언도 나름의 필요와 효과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 그것만이 정답일까. 가해자에게도 서사가 있고, 그 서사 안에는 우리 사회가 놓친 책임이 자리할 여지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철학도, 윤리학도, 저널리즘을 지탱하는 최소한의 규율들도 가해자며 피해자의 서사를 보도하라거나 하지 말라고 합의된 준칙을 내놓지는 못하지 않았는가. 악인의 서사 안에 반드시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다면 우리는 그를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 적어도 저널리즘의 가치가 사회에 기여한다 믿는 이라면 끝끝내 그와 같은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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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파의 딸들 스틸컷 |
| ⓒ 필름다빈 |
올파에겐 네 명의 딸이 있다. 아니, 있었다. 그녀는 두 딸을 잃었다. 처음 영화는 그녀가 어떻게 두 딸을 잃었는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마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거나 범죄자들에게 해를 입었다거나 전염병에 희생당한 뒤의 이야기처럼, 두 딸이 사라진 가정으로 카메라를 들고 돌입하는 것이다. 카우타르 벤 하니야는 올파의 사라진 두 딸 대신 두 명의 배우를 투입한다. 이들이 두 딸의 역할로 투입되어 함께 올파의 집안 이야기를 재구성할 것이라고 말한다.
빠진 건 첫째와 둘째딸이다. 올파와 남은 셋째, 넷째가 수시로 카메라 앞에 서서 이들과 얽힌 사연, 저들의 지나간 시간을 말한다. 관객은 카메라를 눈과 귀로 삼아 감독과 제작진이 그러하듯 올파네 집안 이야기를 소상히 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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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파의 딸들 스틸컷 |
| ⓒ 필름다빈 |
튀니지는 지중해를 북면하고 있는 아프리카 연안 국가다. 이 일대 국가들이 그러하듯 이슬람 문화권에 속해 종교는 물론이고 생활양식 전반이 이슬람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상식 있는 이들은 튀니지를 2011년 아랍의 봄을 불러온 튀니지 혁명으로 기억할 테다. 23년 간 독재를 이어온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의 정권은 국민들의 전국적 봉기 앞에 흔들리다 마침내 백기를 들었다. 발포명령을 받은 군부까지 등 돌린 상황에서 독재자는 사우디로 망명해 숨을 거둘 때까지 끝내 조국의 땅을 다시 밟지 못했다.
그러나 튀니지는 일대 혼란과 마주했다. 마치 이승만 독재 뒤 한국이 그러했듯. 다른 점이라면 한국은 반공이란 이데올로기적 폭력이 극심했던 반면, 튀니지는 극단주의와 세속주의의 대립, 즉 종교와 결부된 생활양식의 충돌이 정치와 사회 일반에서 일어났단 점이랄까. 누구에겐들 안 그렇겠느냐만, 이는 여성에겐 더더욱 괴로운 일이었다. 극단주의를 지지하는 이들은 여성의 사회활동을 완전히 금지하고 복식에서부터 몸가짐에 이르기까지 자유를 박탈하는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교리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 여성의 사고까지 옭아매어 사실상 세뇌와 다를 바가 없다. 연애와 결혼, 취업 등도 자유롭지 못하고 상상치 못한 방식으로 온갖 압력을 받는데, 그 영향이 가정 안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올파의 집은 그 대표적 사례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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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파의 딸들 스틸컷 |
| ⓒ 필름다빈 |
영화는 가만히 올파의 사연 또한 알도록 한다. 올파 또한 튀니지의 억압된 사회 속에 자라났고, 제가 원하는 남자와 혼인하지도 못했다. 올파가 결혼식날 일을 치르길 거부한 탓으로 실랑이를 하는 가운데, 남편의 누나가 벌컥 문을 열고는 구석에다 몰아놓고 빨리 끝내지 무얼 하느냐고 하였다던가. 그러나 올파는 시누이가 나간 뒤 남편의 죽통을 돌려버리고 그 피가 묻은 시트로 제 처녀성을 입증하며 연회장으로 나갔다고 떠올린다. 수십 년 전 지구 반대편의 일이니 오늘의 한국인으로선 그 압박감을 감히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다.
올파의 삶은 그대로 만만찮다. 그리고 그 모두가 오늘의 올파를 이루는 데 나름의 힘을 미친다. 올파는 또한 제 딸들에게 고통을 선사한다. 그 딸들 또한 그 고통만으로는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선택을 저지르는데, 영화는 이를 그 후반부까지 꽁꽁 감추어 영화적 충격을 선사한다. 그저 그런 다큐멘터리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극적 시도가 제법 타율 좋게 맞아 들어가는 가운데, 영화는 올파와 그 딸들의 삶은 그를 직접 겪어보지 않은 이들이 함부로 재단할 수 없을 만큼 만만찮은 것이었음을 깨닫게 한다.
<올파의 딸들>의 미덕은 이런 것이다. 어떤 선택도 온전히 개인적일 수 없음을 알도록 한다는 것. 오늘의 우리는 과거 모든 선택과 경험의 결과이고, 지난 선택과 경험은 또 그 전의 무엇을 딛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는 과거와 떨어져 있지 않고, 미래도 현재와 분리돼 있지 않다. 세상 모든 인물과 사건으로부터 서사를 읽어내야 하는 이유다. 그 안에 진실의 파편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 스스로 깨어져 흩뿌려진 진실을 추적해 모으는 다큐멘터리 감독이 아닌가. 카우타르 벤 하니야는 여전히 이슬람 문화권 국가들 가운데 찾아볼 수 있는 사회적 문제를 소재로 삼아 현재적 질문을 던진다. 이슬람 문화권과 저 멀리 튀니지의 문제라고만 밀어놓기엔 그를 다루는 시각과 솜씨가 전하는 메시지가 은근하다.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말을 아무런 의심 없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가 넘쳐나는 세상 가운데 <올파의 딸들>이 견지하는 자세는 이토록 묵직하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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