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바위 틈 과자·소주·순대... 70여년 뒤늦게 도착한 보급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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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역사탐방을 진행하고 있는 백기완노나메기재단이 지난해(2025년) '동학혁명 김개남 장군의 발자취를 찾아서' 탐방에 이어 올해는 '지리산 빨치산의 흔적을 찾아서'(9.11~12) 역사 탐방을 다녀왔습니다.
백기완재단의 지리산 역사 답사인 '빨치산의 흔적을 찾아서' 일정이었다.
"내 삶이 위기에 처하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위하여 누구라도 나서는 것이 혁명일 것입니다. 민중들이 그렇게 목숨을 걸고 나서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것, 그것이 아마도 백기완 선생님이나 제 아버님이나 이 산에서 목숨을 바친 분들의 뜻이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일은 그분들의 삶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저의 일은 그런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리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입니다. 빨치산들이 지리산으로 들어왔던 것도 그래서 일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지리산의 기운을 넉넉하게 받아 가시길 바랍니다."
"우리나라 빨치산의 뿌리는 구한말 동학혁명군입니다. 동학군이 관군과 일제 연합군에 패한 뒤 그 잔존세력 일부가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빨치산 원조인 '구구구(舊舊舊) 빨치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 징병·징용 거부자들이 입산해 무장 투쟁을 벌였습니다. 이들은 '구구(舊舊) 빨치산'입니다. 해방정국에서 새로운 빨치산들이 대거 탄생했습니다. 1946년 대구 10월 항쟁과 1948년 여수·순천 사건 후 좌익세력 일부가 지리산과 백운산, 태백산, 팔공산 등으로 들어가 기존 야산대와 결합했습니다. 이를 '구(舊) 빨치산'이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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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역사탐방을 진행하고 있는 백기완노나메기재단이 지난해(2025년) ‘동학혁명 김개남 장군의 발자취를 찾아서’ 탐방에 이어 올해는 '지리산 빨치산의 흔적을 찾아서'(9.11~12) 역사 탐방을 다녀왔습니다. 지리산 기행문을 세 차례에 걸쳐 독자들께 전합니다. <기자말>
[박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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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석실(빨치산인쇄소) |
| ⓒ 백기완노나메기재단 |
"이 주변에 빨치산들이 홍보물을 인쇄하던 석실이 있습니다. 어딘지 찾아 보세요."
손 교수의 뒤를 따라 계곡으로 내려섰다. 크고 작은 바위를 짚으면서 걸었다. 서로 머리를 맞댄 듯 서 있는 집채만한 두 개의 바위 앞에 섰다. 손 교수가 말한 빨치산 석실이었다. 얼핏 보면 그저 우뚝 속은 바위 더미일 뿐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두 바위 사이에 틈이 보였다. 몸을 숙여 그 사이로 들어갔다. 안은 제법 넓다. 대여섯 사람이 넉넉히 들어설 만한 공간이었다. 두 바위 위로 또 하나의 바위가 지붕처럼 얹혀 있었다. 빨치산들이 삐라와 사상교육 자료를 만들던 석실이었다.
바닥 곳곳에 음식물들이 차려져 있었다. 과자와 사탕, 소주, 막걸리 등이 개봉되지 않은 채로 놓여져 있었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순대 한 접시와 부패로 빵빵하게 부풀어오른 우유 팩도 눈에 들어왔다.
지금도 누군가는 여전히 그 때 그 빨치산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누군가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던 빨치산 영령들을 위로하는 젯밥을 차려 놓은 것이었다. 무려 70여년이나 뒤늦게 도착한 보급품이 아닐까 하는 상념도 뇌리를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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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석실(빨치산인쇄소) |
| ⓒ 백기완노나메기재단 |
재단 이사장인 신학철 화가와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 영화 '남부군' '하얀전쟁' '부러진 화살' 등을 만든 정지영 감독, 신학림 전 전국언론노조 위원장, 조영선 전 민변 회장, 박점규 직장갑질 119 등이 함께 했다. 백기완재단 기획이사이자 영화 '블랙머니' 제작자인 양기환 대표와 채원희 백기완재단 사무처장이 행사를 총괄하며 궂은 일들을 도맡아 했다.
오랫동안 한국 근현대사의 현장을 직접 답사해 온 손 교수가 길라잡이를 맡았다. 지리산 빨치산 흔적들까지 속속들이 꿰고 있을 뿐 아니라 키마저 190cm나 되니 확 눈에 띈다. 이만한 길라잡이가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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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공비토벌루트안내도에서 설명하는 길라잡이 손호철 교수 |
| ⓒ 백기완노나메기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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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시관에 소개된 이현상과 차일혁 |
| ⓒ 백기완노나메기재단 |
'1951년 북한 당국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남한 빨치산의 남부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53년 9월 18일 오전 11시경 서남지구 전투경찰사령부 제2연대 수색대 3명과 교전을 벌였다. 이 전시관의 뒤편 지리산의 깊은 골짜기 빗점골 합수내 너덜겅 바위라고 불리는 곳에서 사살되었다.'
차일혁 토벌대장을 소개하는 게시물에는 '고독한 토벌대장'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독립군 출신의 경찰 토벌대장이 겪어야 했던 고뇌를 짐작케 하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었다.
'차일혁 총경은 날카로운 이념대립과 목숨이 오가는 치열한 전투상황에서 당시로선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행보를 보였다. "화엄사를 소각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고 유서깊은 화엄사를 소각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전쟁중에 상부의 명령을 어길 수도 없는 상황에서 화엄사 각황전 문짝만을 모두 떼어내 불태웠다. 이 일로 차일혁 총경은 작전명령 불이행으로 감봉처분을 받았다.'
차일혁 총경에게 빨치산 토벌작전은 일제 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생사를 함께 했던 동지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야 하는 고통이었다. 차 총경은 적장 이현상의 시신을 수습해 스님들의 독경 속에 예를 갖추어 제를 지내고 화장하였다. 그의 깊은 고뇌와 너른 인품을 보여주는 일화다.
정지아 작가의 짧지만 깊은 울림의 인사말
역사관을 둘러보고 나오자 앞마당에 반가운 분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빨치산의 딸'과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쓴 정지아 작가였다. 그의 아버지 정운창은 전남도당 간부였고, 어머니 이옥남은 이현상 남부군의 정치 지도원이었다. 올해 101살인 어머니 이옥남은 여전히 정정하시다. 정 작가는 구례 백운산 자락에서 전빨치산 노모를 모시면서 살고 있었다. 우리 일행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한 걸음에 달려온 것이었다. 정 작가가 짧지만 깊은 울림의 인사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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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역사관에서 만난 ‘빨치산의 딸’ 정지아 작가 |
| ⓒ 백기완노나메기재단 |
"우리나라 빨치산의 뿌리는 구한말 동학혁명군입니다. 동학군이 관군과 일제 연합군에 패한 뒤 그 잔존세력 일부가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빨치산 원조인 '구구구(舊舊舊) 빨치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 징병·징용 거부자들이 입산해 무장 투쟁을 벌였습니다. 이들은 '구구(舊舊) 빨치산'입니다. 해방정국에서 새로운 빨치산들이 대거 탄생했습니다. 1946년 대구 10월 항쟁과 1948년 여수·순천 사건 후 좌익세력 일부가 지리산과 백운산, 태백산, 팔공산 등으로 들어가 기존 야산대와 결합했습니다. 이를 '구(舊) 빨치산'이라 부릅니다."
구 빨치산은 급격히 세를 잃었다. 이승만 정부는 1949년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군과 경찰을 동원해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였다. 1949년 4월 반선리 전투에서 여순사건 제14연대 핵심인 홍순석이 사살되고 김지회도 부상을 입은 뒤 숨졌다. 구 빨치산은 급격히 그 구심을 잃었다. 그해 말부터 1950년 초까지 거센 동계토벌 작전이 이어졌다. 각지의 유격대는 조직적 활동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줄었다.
겨우 명맥을 이어가던 빨치산을 살린 것은 한국전쟁이었다. 북한군의 남하로 빨치산들은 다시 힘을 얻었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북한군이 38선 이북으로 물러간 이후엔 미처 철수하지 못한 인민군 병력과 남한 각 지역의 좌익세력들이 지리산과 덕유산, 백운산 등으로 입산했다. 손 교수의 설명이 이어졌다.
"한국전쟁 이후 새롭게 재편된 좌익 무장 세력을 '신(新) 빨치산'이라고 부릅니다. 신 빨치들은 지리산과 백아산, 덕유산 등을 무대로 다시 치열한 활동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정부군은 이른바 '견벽청야(堅壁淸野)' 방식의 토벌전을 벌였습니다. '견벽청야'는 삼국지에서 조조군이 벌였던 전략입니다. 자신의 거점은 굳게 지키고, 나머지는 적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초토화하는 방식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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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년 9월 백기완 선생이 시를 쓰고 시비를 직접 들고 세운 정순덕 시비(노고단에서 피아골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세웠다) |
| ⓒ 백기완노나메기재단 |
손 교수는 차일혁이 젊은 시절 아나키스트였다고 했다. 그런 인물이 어떻게 이승만 정권에서 빨치산 토벌대장이 되었을까? 손 교수는 차일혁의 죽음 역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차일혁은 1958년 공주 금강 곰나루에서 익사했습니다. 그의 시신은 한국전쟁 때 금강을 건너다 가라앉은 북한군 탱크를 끌어안은 듯한 자세로 발견됐다고 합니다. 차일혁은 수영을 잘했다고 합니다. 강물에서 익사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왜 죽었을까요?"
다시 버스에 올랐다. 빨치산들의 거점 중 하나였던 뱀사골로 향하는 길이다. 손 교수는 참 성실한 길라잡이다. 이동하는 틈마다 마이크를 잡고 빨치산 강의를 이어간다. 이번엔 묻는다.
"마지막 빨치산이 누군지 아십니까?"
여기저기서 "정순덕"이라는 답이 쏟아진다. 수준 높은 청중들이다. 손 교수의 설명이 뒤따른다. '마지막 빨치산'으로 불리는 정순덕은 1933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중 남편이 지리산으로 들어가자 그를 찾아 1951년 입산했다. 남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전사했지만 정순덕은 산에 남았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결국 1963년 11월 12일 지리산 내원골에서 경찰에 체포됐다. 당시 정순덕은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그 다리는 결국 절단해야 했다.
체포된 정순덕은 "나는 글도 모르는 산골여자다", "남편을 찾아 산에 들어갔을 뿐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20년 넘게 복역한 뒤 1985년 8·15 특사로 가석방됐다. 정순덕은 출소 뒤 한동안 충북 음성 꽃동네에서 생활했다. 오른쪽 다리 때문에 의족이 필요했지만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백기완 선생이 정순덕의 사정을 들었다. 오랫동안 장기수들을 챙겨온 백 선생이 정순덕을 외면할 리 없었다. 백 선생은 정순덕의 손을 잡고 울었다.
"백기완 선생님이 의족 비용과 병원비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선물 받은 발렌타인 30년 양주 등을 팔아 200만원을 건네 주었습니다."
지리산 뱀사골 탐방 안내소에 도착했다. 손 교수는 버스에서 내리는 우리 일행에게 "안내소 역사관에 전시된 차일혁의 글들이 매우 감동적"이라며 주의 깊게 읽어보라고 사전 정보를 주었다. 안내소 2층은 빨치산 토벌 역사관으로 꾸며져 있었다. 당시 빨치산과 토벌대들이 사용하던 무기들이 전시돼 있었다. 벽면에는 '이현상이 사살되었을 때 품속에서 나온 한시'와 '당시 토벌대 전투경찰 제18대 대장 차일혁'과 '백야전 전투사령부 사령관 백선엽'의 글이 나란히 게시돼 있었다. 손 교수의 말처럼 차일혁의 글은 자못 감동적이었다.
새벽부터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들에게 물어보라.
공산주의가 무엇이며
민주주의가 무엇이냐고.
과연 몇 사람이 이를 알겠는가?
지리산에서 사라져간 수많은
군경과 빨치산에게 물어보라.
너희들은 왜 죽었느냐고.
민주주의를 위해서, 혹은
공산주의를 위해서 죽었다고
자신있게 대답할 자 몇이나 있겠는가?
전시관을 둘러보던 손 교수가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이게 뭐야! 백선엽 이라니! 여기에 언제부터 백선엽이를 올렸지? 몇 해 전 왔을 때는 이현상과 차일혁 뿐이었는데, 두 사람 공간을 줄이고 백선엽이를 끼워 넣다니!" 손 교수의 지적에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백선엽은 일제강점기 우리 독립투사들을 토벌한 일본 간도특설대 장교로 복무했던 인물이었다. 해방 뒤 백선엽은 빨치산 토벌대장으로 변신했다.
백선엽이 지휘한 '백야전 전투사령부'는 악명높은 '쥐잡기 작전'을 전개했다. 백선엽 부대는 압도적 병력으로 쥐잡듯 포위망을 좁혀가며 빨치산을 몰아붙였다. 그 과정에서 민간인과 식량과 가옥 등을 초토화시켰다. 그런 인물이 버젓이 구국의 충정을 지닌 인물로 소개된 것을 보고는 우리 일행이 분노를 터트린 것이었다.
뱀사골 탐방안내소 건물 뒤편으로 빠져 나왔다. 몇 걸음 옮기자 높다란 지리산지구전적비가 나타났다. 전적비 정면에는 '忠魂(충혼)'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필적이라고 했다. 손 교수가 말했다.
"정순덕씨가 '실록 정순덕'을 쓴 작가 정충제와 함께 이곳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정순덕씨가 '忠魂'을 보자마자 그대로 읽었답니다. 체포 당시 한글도 모르는 문맹이라고 했던 정순덕씨가 한문까지 쉽게 읽은 것입니다. 빨치산 생활을 하면서 한글과 한문을 모두 배웠던 것이지요."
정순덕은 2004년 4월 1일 세상을 떠났다. 백기완은 정순덕을 기리는 '영원한 사랑노래'라는 시를 지었다. 그해 9월 8일, 백기완은 '영원한 사랑노래'를 새긴 나무 시비를 들고 지리산에 올랐다. 돼지령 인근 산길에 그 시비를 세웠다.
그대 낸 길이 있다기에 와보니
치마폭처럼 보듬은 천고의 사랑이었고야
그대가 빚어놓은 참이슬 있다더니
아 누가 띄웠던가 별빛만 아련하고
순덕이 어딜 갔는가
묻는 이 있거든 저 달이며 말하라
그리움을 쫓는 이의 가슴팍에
영원히 살아 있다고
그렇게 그렇게 말해다오
그 시비는 지금 남아 있지 않다. 세월과 비바람에 스러진 것인지, 누군가가 치워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시비는 사라졌지만, 그리움을 쫓는 이의 가슴팍엔 그 시어들은 영원히 살아 전해지고 있을 것이다. 지리산 능선을 스치는 바람과 계곡을 더듬는 물이 지리산을 찾는 이들의 귓가에 그 시어들을 속삭이고 있을 테니까.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박상주씨는 백기완재단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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