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이 된 학교, 킬링필드의 산 역사를 마주하다

이영일 2024. 10. 13.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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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청소년수련시설협회 캄보디아 국제교류 연수단, 뚜얼슬랭 추모 박물관 방문

[이영일 기자]

 킬링필드로 대표되는 유골의 이미지
ⓒ 예수회 한국관구
킬링필드.

캄보디아를 몰라도 킬링필드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학살의 대명사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다.

1975년 4월, 폴포트(Pol Pot)가 이끄는 극좌 마르크스주의 운동인 크메르 루주(캄푸치아 공산당)는 게릴라전 끝에 캄보디아 정부를 전복한다. 국가명도 '민주 캄푸치아'로 바꾼 폴포트는 도시 문명을 거부하는 그의 농촌 유토피아적 사상을 현실에서 실행하며 모든 캄보디아인을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킨다.

캄보디아를 공산주의 사회로 철저히 전환하는 폴포트의 프로젝트는 교육, 의료, 종교와 같은 모든 '부르주아'를 국민의 적으로 삼고 지식인, 예술가, 교사, 의료인, 종교 지도자, 심지어 안경을 쓰는 사람들까지 처형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을 구덩이에 몰아 죽였고 목을 자르거나 맷돌이나 망치로 찔러 죽였다. 어린이들은 부모 앞에서 죽임을 당했다. 죽음과 공포의 땅으로 전락한 캄보디아 인구의 25~30%, 약 200만 명이 학살당했다.
 뚜얼슬랭 추모 박물관의 전경
ⓒ 이영일
여고에서 고문장으로 변한 킬링필드의 생생한 역사, 뚜얼슬랭 추모 박물관

한국청소년수련시설협회(아래 한수협)이 지난 2일부터 6일까지 3박 5일 일정으로 실시한 캄보디아 국제교류 1기 연수단은 10월 3일, 이 킬링필드의 아픈 역사가 기록된 뚜얼슬랭(일명 S-21) 추모 박물관(Tuol Sleng Genocide Museum)을 찾았다.

[관련 기사] 캄보디아에서 '울림' 받은 한국 청소년지도자들 https://omn.kr/2ags6

대학살 박물관으로도 불리는 이곳은 원래 여자고등학교(Tuol Svay Prey High School)였는데 폴포트 집권후 제21 보안대 본부인 S-21(Security Prison 21)로 사용된 곳이다. 캄보디아 전역에서 가장 큰 수용소였다고 한다.

청소년들의 웃음이 넘쳐났던 이 고등학교는 전 정권 관계자들과 지식인들을 고문하는 끔찍한 감옥으로 탈바꿈한다. 오디오가이드 설명에 의하면 이곳에 2만여 명의 사람들이 수감됐는데, 이중 살아남은 사람은 단 12명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그저 견학지 정도로만 여겼던 연수단원들은 학교였던 곳이 끔찍한 고문과 학살의 장소로 변했다는데서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들 청소년을 매일 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리라.
 오디오 가이드를 통해 뚜얼슬랭 추모 박물관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한수협 국제교류 1기 연수단의 모습
ⓒ 한국청소년수련시설협회
연수단 일행은 입구에서 나눠주는 오디어가이드를 귀에 꼽고 고문과 학살의 생생한 상황을 직접 마주했다. 오디오가이드는 15개국 언어로 서비스되는데 한국어 서비스도 있었다.

명색이 박물관인데 담장에는 철조망이 설치돼 있었다. 학살 당시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리려는 의도 같았다. 건물은 A동부터 D동까지 총 4개 동인데 오디오가이드는 32개 항목을 설명 서비스했다. 건물 내부에는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사진과 고문 기구를 전시하고 있었다.

잔인한 고문이 못 이겨 거짓 자백을 한 사람들은 근처의 총엑 킬링필드(Cheung Ek Killing Field)로 옮겨져 집단 학살된 뒤 매장 당했다. 총액 킬링필드에는 희생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유리로 된 위령탑이 세워졌는데 그 안에는 희생자들의 유골이 쌓여 있다고 한다.

'킬링필드'라는 말은 크메르 루주의 지옥같은 학살 정국에서 살아남은 캄보디아의 사진기자 디트 프란이 태국으로 탈출할 당시 거리에 쌓인 시체 더미와 유골 모습이 알려지며 만들어진 표현이라니 얼마나 많은 유골들이 거리에 굴러 다녔는지를 짐작케 한다.
 뚜얼슬랭 추모 박물관에 전시된 킬링필드 희생자들의 사진. 이들은 이곳에서 고문을 당한후 총엑 킬링필드(Cheung Ek Killing Field)로 옮겨져 집단 학살된 후 매장 당했다.
ⓒ 이영일
"차마 더 볼 수가 없어..." 처참한 학살의 기록 처음 접한 청소년지도자들

박물관을 둘러보는 연수단 단원들의 얼굴은 무거움으로 가득찼다. 건물 앞뜰에 위치한 마지막 희생자 14명을 기리는 무덤앞에서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사람도 있었다.

관람을 마칠 무렵,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치 처절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통곡 어린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듯했다.

김기남 한수협 사무총장은 "이 박물관은 '박물관'이란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장소다.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 쏟아지는 빗줄기가 수많은 희생자들의 피와 눈물인 듯 하다. 수많은 희생자들의 사진속 눈빛을 마주하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오래전 마주했던 영화속 아픔이 현실로 되살아나는 이 공간은 그저 견학지로만 바라보기에 너무나 아픈 장소다"라며 숙연함을 감추지 못했다.
 한 연수단원이 박물관에 전시된 희생자들의 사진을 살펴보고 있다.
ⓒ 한국청소년수련시설협회
김간순 대전갈마청소년문화의집 원장은 "고문으로 처참하게 죽은 사람들의 사진속에 아이들의 사진도 자주 보여 '이런 아이들까지..'라는 분노가 치밀었다. 광란의 시기에 이곳에 갇혀있었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지며 가슴이 아려왔다"고 무거운 심정을 설명했다.

1979년 베트남 군대와 베트남을 지지하는 캄보디아 공산동맹군의 공격을 받아 크메르 루즈는 전복됐다. 우리나라는 5월을 청소년의 달로 기억하지만 캄보디아는 5월 20일을 공휴일로 지정해 크메르 루주와 폴포트에 의한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캄보디아 킬링필드는 르완다 학살과 함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전체 현대사는 물론, 인류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참혹하고 끔찍한 비극 중 하나다. 남북의 갈등속에 불안감이 커지는 정세속에서 연수단 한명한명의 마음속에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뉴스포털1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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