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이 된 지 9년, 나를 멈춰 세운 '모자무싸' 대사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희진 기자]
봄이었다. 얄밉게도 제 시간을 알고 등장한 봄은 온 동네를 쑤시며 나무마다 새하얀 소란함을 매다느라 분주했다. 끝내 여기저기 하얀 꽃망울을 터트리고 야단법석이었다.
|
|
| ▲ 찬란하지만 누군가에겐 찬란하지 않은 벚꽃 |
| ⓒ 이희진 |
"확 다 떨어져 버려라."
남편은 주방에서 핸드드립 커피를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원두를 갈던 소리가 멈췄다. 주방에 있던 남편은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내 쪽을 응시하는 것 같았다.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나만 억울하잖아. 벚꽃이고 뭐고 다 떨어져 버리면 좋겠어."
만약 사람의 마음에도 질감과 형태가 있다면 나는 가장 푹신하고 둥근 모양이 아닐까 생각하며 살았다. 여유 있는 미소와 좋은 사람이라는 타인들의 평가는 다 그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여겼다. 다만 2017년 사고로 빛을 잃은 후에는 좋은 성격, 둥글둥글한 언어, 너그러운 마음이라는 걸 가져본 적이 있었는지 애초에 내게 존재했는지 의문이 들곤 했다.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현실
절망은 그런 것이었다. 불가항력적인 재앙은 사람의 마음을 깎고 또 깎아 가장 가늘고 좁게 만든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뾰족해진 끝은 마음이 가까운 심장을 겨누고, 때로는 가장 가까운 사람을 향하기도 했다.
대책 없는 억울함은 마치 계절이 멈춰 선 나라에 나를 밀어 넣는 것 같았다. 계절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 사는 나라가 있을 것이다. 창밖의 기후와는 다른 온도로 존재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산다. 멈춰 선 기온과 얼어붙은 공기 속에서 무채색 시간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새로운 계절이 되었으니 새 옷을 반드시 장만해야 한다거나, 제철에만 나는 음식을 꼭 챙겨 먹어야 한다는 부지런함이 없어도 되는 나라. 날씨를 미리 확인할 필요도, 갑작스러운 기후의 변덕을 걱정할 필요도 없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가 있을 것이다.
사고 소식 이후 이 사람, 저 사람이 뱉어내는 위로의 언어는 머리에서 가슴으로 도무지 내려오지 못했다. 위로라는 말은 바람결에 새털 같이 흩어졌다. 나를 향해 집중된 안쓰러운 시선만 겹겹이 쌓여 소화되지 못한 채 명치에 걸려 있었다.
중증 장애를 갖게 된 후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있었다. 평생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영혼의 날개가 꺾이는 듯했고, 자유를 빼앗긴 채 새장에 갇힌 새가 되는 기분이었다.
병원비에 보태라며 친구들이 보내온 정성도, 이웃들이 건네는 관심의 마음도 그런 이유로 처음에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마치 내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인증 받는 것 같았다. 그 호의는 감사함과 무력감을 한꺼번에 몰고 와 마음을 흔들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 보는 건 어때? 여보라고 늘 주는 자리에만 서 있으라는 법은 없잖아."
협소하고 편협한 마음을 펴는 일은 늘 그렇듯 남편의 몫이었다. 그때 부터였을까? 나만 불행하다는 생각은 누구나 저 마다의 아픔을 안고 살아간다는 생각으로 확장되어 갔다. 특히 '너만 그런 게 아니라 나도 그래'라는 말은 그 어떤 위로보다 크게 다가왔다. 나는 보이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선고 이후 지금까지도 여전히 나의 무가치함을 마주하는 상황과 싸워 가고 있다. 때로는 언제까지 증명하는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런 마음 끝에 지난주 방영된 JTBC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모자무싸)>는 남의 이야기로 닿지 않았다. 드라마 속 한 장면이 인상 깊었다. "갇혔을 때 돌파하세요"라고 적힌 차단막이 내려진 건널목에서 황동만(구교환)은 변은아(고윤정)에게 묻는다.
|
|
| ▲ JTBC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
| ⓒ JTBC |
이어진 여주인공 변은아의 대답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존재를 가치의 경중이나, 처한 상황, 갖춘 자격 때문이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끝 모를 감정적 허기도 채울 수 있다는 말로 닿았다. 그런 사람을 위해서라면 갇힌 것 같은 상황도 돌파해 볼 힘이 생긴다는 말로 들렸다. 그 장면에서 나는 멈춰 섰다.
'내가 다시 일어서게 된 이유가 저거였구나.'
돌이켜 보면, 내 삶을 다시 흐르게 만든 것은 거창한 의지도, 대단한 계기도 아니었다. 그저 끝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 있는 모습 그대로의 나를 받아 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기력해서 뾰족함만 남아 있던 시간 위에 가족이 있었다. 한숨이 머무는 자리마다, 조용히 곁을 지켜 준 사람들이 있었다.
시절마다, 구간마다 만났던 아름다운 사람들은 내게 왜 그런 상처가 새겨져 있는지, 어떤 의미를 얻었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곁에 있어 함께 걸었다. 세상에는 거기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충분한 시절이 있다. 마치 초록이 우리 곁에 숨 쉬고 있을 때 그 쓸모와 용도를 굳이 계산하지 않는 것처럼.
사고 후 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는 이제 벚꽃을 배경으로 여유롭게 사진을 찍어볼 수 있게 되었다. 부산하게 움직이는 계절의 손에 이끌려 산다. 날씨가 생겼고 계절이 흐른다. 사랑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sns와 브런치에도 올라갑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지방의원들, '뭐 하던 사람'인지 알 수 없었던 진짜 이유
- 사건 40년 후, 야생 식용버섯에서 나온 것... 이래도 괜찮나?
- 장동혁 "지금부터 해당 행위 강력 조치, 후보자라면 즉시 교체"
- 국민의힘 지지도 15%... 최저치 갈아 치우고, TK에서도 하락
- 책 목차에서 그걸 빼라고? AI와 설전 끝에 내가 지킨 것
- 공수처, 이대로 놔둘 수는 없다
- 부품을 만드는 나라, 돈의 길을 설계하는 나라
- 정청래, 정원오·추미애 등 지선 후보자들 만나 "낮은 자세" 당부
- 미국-이란, 항행 차단 경쟁... 호르무즈 긴장 최고조
- '결정사' 듀오 회원 43만명 정보 통째 유출... 과징금 12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