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쓴맛 닮은 오가피 순, 봄은 그렇게 우리를 깨운다

전갑남 2026. 4. 23.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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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참 손도 크지?"... 딱 요맘때만 허락되는 귀한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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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갑남 기자]

다시 살아난 생명의 쌉싸름한 선물

새봄이다. 온 땅이 기지개를 켜듯 움을 틔우고 꽃을 피워내는 계절이다. '눈이 보배'라는 옛말이 이맘때처럼 절실하게 다가올 때가 또 있을까. 무심코 지나치면 그저 이름 모를 잡초 같지만, 조금만 허리를 숙여 관심을 두면 산과 들의 어린 새싹들은 저마다 귀한 약이 되고 음식이 된다. 쑥, 냉이, 달래, 망초... 발밑에 펼쳐진 풍경에 마음을 열면 지천이 먹거리요, 산천이 그대로 보약이다.

어디 풀들뿐이랴. 나무가 내어주는 새순도 이맘때면 더없이 풍성한 찬거리가 된다. 엄나무, 다래나무, 화살나무, 가죽나무의 어린 새순들은 저마다 독특한 향과 질감으로 봄의 시작을 알린다. 그중에서도 우리 집 뒤꼍을 묵묵히 지키고 있는 오가피나무는 해마다 이맘때면 나에게 특별한 깨달음을 건넨다.
 올봄 다시 강인하게 새순을 터뜨린 우리 집 뒤꼍의 오가피나무. 봄은 생명을 불어넣어 소중한 선물을 주었다.
ⓒ 전갑남
우리 집 뒤꼍 오가피나무는 사연이 깊다. 몇 해 전, 키가 너무 커 감당하기 어려워진 탓에 고민 끝에 밑동을 베어냈다. 훤하게 비어버린 자리를 보며 미안한 마음이 앞섰는데, 놀랍게도 그 잘린 자리에서 다시 푸른 줄기가 힘차게 솟아올랐다.

제 몸을 다 내어주고 베어진 자리에서도 기어이 다시 생명의 길을 내는 나무의 강인함이라니. 비워내야 다시 채워진다는 자연의 섭리가 베어진 밑동 위에서 경이롭게 피어나고 있었다.

손끝에 스며든 일 년의 기다림

지금이 딱 제철이다. 윗순을 꺾을 때마다 '똑똑' 소리를 내며 손끝에 전해지는 감촉이 유난히 연하다. 아직은 단단한 나무라기보다 보드라운 풀의 마음을 닮은 계절이다. 일 년을 꼬박 기다려야 비로소 딱 요맘때, 오직 며칠 동안만 허락되는 귀한 만남이다. 오가피(五加皮)라는 이름처럼 다섯 손가락을 쫙 펼친 모양의 잎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연둣빛으로 반짝인다.

오가피는 예부터 버릴 것 하나 없는 나무라 했다. 뿌리와 줄기는 한약재로, 가을에 달린 까만 열매는 차나 술로 쓰이기도 한다. 이맘때 여린 순은 단연 봄나물의 으뜸으로 꼽힌다. 특히 어린순은 산삼에 든 사포닌 성분이 풍부해 면역력을 높이고 피로를 씻어주는 효능이 있다고 알려졌다. 자연이 거저 차려준 보약이나 다름없다.
 "똑똑" 소리를 내며 손끝으로 맞이한 봄의 선물. 바구니 가득 싱그러운 오가피 새순이 수북하게 쌓였다.
ⓒ 전갑남
아내가 지금 아니면 못 먹는다며 반색하며 나물을 받아 든다. 둘이 마주 앉아 다듬으니 금세 바구니가 가득하다. 나물을 다듬던 아내가 바구니에 수북이 쌓이는 연둣빛 순을 보며 환하게 웃는다.

"봄은 참 손도 크지? 잠든 생명을 다 깨워놓는 것도 모자라, 우리 식탁에 올릴 귀한 나물까지 이렇게 듬뿍 안겨주니 말이야."
"그러게 말이야. 그저 자랄 수 있는 공간을 내어 준 것밖에 없는데... 우리가 자연 앞에 늘 고개 숙이고 겸손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네."

우리는 그저 뒤꼍을 지켰을 뿐인데, 나무는 해마다 잊지 않고 보답을 한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겨우내 땅속에서 쓴맛을 응축하며 기회를 기다려온 나무의 수고가 떠오른다. 그 인고의 시간을 우리가 오롯이 약으로 건네받는 기분이다.

쓰지만 고귀한, 우리네 인생의 맛

연한 새순 하나를 따서 입에 넣고 씹어보았다. 보드라운 겉모양과는 달리, 혀끝에 닿자 생각보다 쓴맛이 상당히 강하다. 쓴맛 속 뒤끝에는 오가피 특유의 깊은 향이 배어났다. 미간이 저절로 좁아질 만큼 강렬한 맛이지만, 곱씹을수록 뒤에 숨은 맑은 향이 비로소 얼굴을 내민다.

"이렇게 쓴 게 데치면 어떻게 될까?"
"아마 쓴맛은 옅어지고 향기는 그대로 남을걸!"
 끓는 물에 소금을 조금 넣고 데쳐내는 순간. 강렬했던 쓴맛은 옅어지고 오가피 고유의 깊은 향이 피어오른다.
ⓒ 전갑남
 고추장과 식초, 설탕과 마늘 등 갖은양념으로 조물조물 버무리는 손길. 초록빛 나물에 붉은 봄의 색이 스며든다.
ⓒ 전갑남
아내의 대답엔 살림의 오랜 경험이 담겨 있는 듯싶다. 소금을 조금 넣고 끓는 물에 나물을 데쳐낸다. 물에서 건져 올리니 초록은 더 짙어지고, 날카롭던 향은 한 겹 뒤로 물러나 순해진다. 이어 고추장과 식초, 설탕과 마늘 등 갖은 양념을 넣어 조물조물 버무린다. 초록빛에 붉은 기운이 스며들며 봄의 색이 한 그릇 안에 모인다.

한 젓가락 입에 넣으니 새콤함 뒤로 쓴맛이 약간 천천히 따라온다. 그런데 그 맛이 이상하게도 매력적인 맛으로 다가온다. 입안을 깨우는 신선한 맛이다.

봄은 원래 이런 맛인가 보다. 달기만 하지 않고, 쓰고 깊은 향이 남는 맛. 인생에서 쓴맛은 피하고 싶지만, 봄나물의 고귀한 맛은 오히려 몸을 깨우는 에너지가 된다. 우리네 인생도 고비마다 만나는 쓴맛을 잘 견뎌내야 비로소 깊은 향을 내는 법이다.
 오가피나무순 무침. 쌉싸름하면서도 매력적인 맛이 인생의 깊이를 닮았다.
ⓒ 전갑남
오가피 한 그루가 내어주는 것은 나물 한 접시가 아니라, 우리네 삶을 일깨우는 계절 전체의 맛이었다. 오늘 저녁 식탁 위에는 쌉싸름한 봄이, 그리고 다시 일어설 용기가 가득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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