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용흘의 초당은 왜 미국 문단의 '금세기의 책'이 되었나
[이희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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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젊은 날의 강용흘 하버드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한 1920년대 말의 강용흘 모습. ‘동양 선비 서양에 가다’ 뒷면 표지에 실은 사진이다. |
| ⓒ 서울대출판부 |
<초당>은 한국 문화를 알리는 역할도 톡톡히 했다. 우리나라의 생활 양식과 전통 세시풍속을 소개하는 한편 고구려 유리왕이 지었다는 '황조가', 윤선도의 시조 '어부사시사', 한용운의 '고적한 밤' 등 우리 고전 시가와 현대시를 수십 편 인용해 놓았다.
동아시아 작가 최초로 영문 작품 발표
<초당>은 동아시아 작가가 미국에서 처음 영문으로 발표한 문학 작품이었다. 식민지 조선인이 최초라는 영예를 안은 것도 의외지만, 출판 후 반응은 더욱 놀라웠다. <뉴욕타임스> <뉴욕헤럴드트리뷴> 등 유력 신문과 잡지들이 앞다퉈 서평을 실었고, '금세기의 책'으로도 뽑혔다.
<뉴욕헤럴드트리뷴>은 "가장 가치 있는 인간 기록"이라면서 "조선의 아름다운 시가를 더 많이 소개해 달라"라고 부탁했다. <뉴욕타임스>는 "젊은 조선 망명가의 이 작품은 중국과 일본 문학에 치욕을 안겼다"라고 꼬집었고, <뉴리퍼블릭>은 "조선에 관해 잘못 알려진 역사를 바로잡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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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일보의 초당 발간 기사 뉴욕대 대학원에 다니던 한보용이 <조선일보> 1931년 4월 22일 자에 ‘강용흘 군의 영문 소설 뉴욕에서 발행 격찬’이란 제목으로 <초당>의 출간 소식과 반응을 소개한 기사. |
| ⓒ 조선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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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광수의 <초당> 독후감 이광수가 <동아일보> 1931년 12월 17일과 18일 자에 두 편으로 나눠 실은 <초당> 독후감. |
| ⓒ 동아일보 |
강용흘의 불운은 펄 벅의 <대지>가 바로 다음 달에 선보인 것이다. 뉴욕 맨해튼의 서점 주간 집계에서 나란히 논픽션과 픽션 부문 1위에 올랐던 두 작품은 1932년 퓰리처상을 놓고 경쟁했으나, 최종 승자는 <대지>였다. 만약 <초당>이 퓰리처상을 받았다면, 강용흘은 2024년 역사소설 <주인 노예 남편 아내>의 우일연보다 무려 92년 앞서 한국계 작가로서 퓰리처 예술 부문 수상자가 되었을 것이다.
<대지>를 스크린에 옮겨 흥행에 성공한 할리우드 메이저사 MGM은 <초당>도 영화화를 검토했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체코 등 10여 개국에서 번역 출판됐다. 한국어로는 1948년 김성칠이 제1부만 번역했다가 1975년 장문평이 완역했다.
3·1운동으로 고초 겪고 유학길에 올라
강용흘은 1903년(1898년이란 설도 있음) 6월 5일 함경남도 홍원군 운학면 산양리에서 태어나 서울 오성중과 함흥 영생중학교를 졸업했다. 1919년 초 서울로 올라와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수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체포될 때 쇠갈고리에 목이 찍히는가 하면, 심문 과정에서 기절했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할 정도로 호되게 매를 맞았다고 훗날 털어놓았다.
그는 1919년 말, 네 아들을 데리고 귀국하는 영생중학교 교장 루서 영 선교사를 따라 태평양을 건너고 대륙을 횡단해 캐나다 노바스코샤주 핼리팩스의 달하우지대에 입학했다. 2년간 영문학을 공부하다가 1922년 5월 미국 보스턴대로 옮겨 의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해 1927년 하버드대 교육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를 땄다.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취직한 뒤 1928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편집에 참여했다. 이후로도 코먼웰스 백과사전, 내셔널 백과사전, 아메리카나 백과사전, 콜리어 연감, 아메리카나 연감 등의 단골 필자로 활약했다. 그해 뉴욕아트센터에서 '동양 예술과 동양 사회'란 제목으로 강연한 것이 뉴욕타임스에 소개돼, 이듬해 뉴욕대에서 비교문학을 강의하고 동양 시를 영어로 번역해 타자본으로 펴냈다.
강용흘이 미국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버팀목 구실을 해준 프랜시스 킬리와의 결혼도 1928년에 이뤄졌다. 아버지는 탄광업으로 부자가 된 뒤 웨스트버지니아 공대를 설립한 미국 상류층이었다. 킬리 역시 웨슬리대 영문과를 졸업한 재원이었다. 장인이 곧 불어닥친 대공황으로 파산해 경제적 도움은 받지 못했어도, 처가 인맥은 든든한 뒷배가 됐다.
아내의 사랑과 보살핌도 큰 힘이 됐다. 그를 조사한 FBI 파일에는 대필 의혹도 기록돼 있다. 선교사에게 배운 영어를 밑천으로 미국 명문대를 다녔을 만큼 어학 재능이 뛰어나긴 했지만, 아내가 문장을 손질해 줬을 가능성도 있다. 강용흘은 후속작 <동양 사람 서양에 가다> 서문에 "유배의 운명에서 내 삶을 건져주고 이 책을 쓰는 데 협조해 준 프랜시스 킬리에게 바친다"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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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당' 표지 1931년 뉴욕 찰스 스크리브너스 선스 출판사에서 출간한 <초당> 표지(맨 왼쪽). 1948년 김성칠 번역판(왼쪽에서 두 번째), 범우사가 1993년과 펴낸 장문평 번역판(왼쪽에서 세 번째)과 2015년 개정판(맨 오른쪽) 표지, |
| ⓒ 범우사 |
강용흘은 이민 이후의 이야기를 담은 <동양 선비 서양에 가다>를 1937년 9월 발표하며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같은 달, 뉴욕대 계열의 호프스트라대 영문학과 조교수로 발령받은 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큐레이터로도 일했다.
미국 여성과 결혼해 아이를 낳고 미국 대학의 전임 교수까지 되었으나, 시민권을 받지 못하자 그를 돕는 모임이 결성되었다. 켄트 켈러 의원이 각계 유명 인사 92명의 서명을 받아 연방 하원에 법안을 제출하고, 언론도 사설과 기고문 등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일본인과 한국인의 이민을 제한한 1924년 이민법의 장벽을 넘지 못하다가 1952년 개정법이 통과되고 나서야 미국 시민이 되었다.
강용흘은 고국을 떠난 지 27년 만인 1946년 8월, 한국 땅을 밟았다. 38선 이남에 주둔한 미군의 존 하지 사령관이 이승만을 견제하려고 서재필과 강용흘을 초청한 것이다. 직함은 군정청 출판부장이었으나, 24군단 정보부대의 정치분석관 겸 자문관으로 민간 정보를 수집하는 게 주임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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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0대의 강용흘과 사인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는 50대의 강용흘. 아래는 1935년 강용흘이 칼로타 디아스에게 <초당>을 증정하면서 책에 써준 사인이다. |
| ⓒ 서울대출판부 |
이런 활동은 강용흘이 1948년 5월 미국으로 돌아간 뒤, 1950년대 초 매카시 선풍이 거세게 불 때 공산주의자로 의심받는 빌미가 되었다. 재미 한국 유학생들을 상대로 '자유당 독재'를 비판하는 강연회를 열자, 이승만 대통령은 외교관을 시켜 방해하기도 했다.
1967년 발표한 유일한 희곡 <궁정에서의 살인>은 고려 말 공민왕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권신 김재상과 요승 편조 등이 벌이는 암투를 담고 있다. 2인자 이기붕의 아들을 양자로 들인 이승만 대통령을 풍자한 작품으로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공연됐다. 이근삼이 번역한 이 작품은 1974년 문학사상에 발표되었고, 민예극장이 허규 연출, 김흥기·정영숙 주연, 최불암·박규채 해설로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강용흘은 1970년 6월 한국에서 열린 제37차 국제펜클럽대회 초청으로 생애 마지막 한국을 방문했다. 부인과 함께 영어로 옮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 1971년 3월 연세대에서 출간됐다는 소식을 미국에서 들은 뒤, 이듬해 12월 11일 뉴욕주 롱아일랜드 헌팅턴에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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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용흘 족보 진주 강(姜)씨 교리공파 족보. 강용흘의 아내 프랜시스 길리를 김해(金海) 김길리(金吉利), 두 아들 크리스토퍼와 리버트를 각각 경구(慶求)와 나구(羅求)로 표기했다. |
| ⓒ 서울대출판부 |
강용흘은 망명가이자 유배자의 삶을 살면서도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고 일제를 비판하는 기고와 강연, 한국 문화를 알리는 번역과 강의 등을 꾸준히 해왔다. 해방 후에는 냉전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승만·박정희 정권 탓에 모국 독자들과 활발히 소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가 이룩한 성과는 우뚝하고 남긴 발자취도 뚜렷하다. '한국계 미국 문학의 아버지'라는 별칭을 넘어 서구의 모든 한인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영어로 작품을 쓴 덕분에 세계 문학계에도 널리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낙동강의 작가 조명희를 '디아스포라 문학의 선구자'로 꼽긴 하지만, 그 영향권이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 만주 등지의 동포들에게 그친 것과는 비교된다.
<순교자>와 <빼앗긴 이름>의 김은국, <꽃신>과 <해녀>의 김용익, <영원한 이방인>과 <타국에서의 1년>의 이창래 등이 각종 문학상을 석권하며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될 수 있었던 것도 강용흘이 만든 발판 덕분이었다. 2000년대 이후로도 우일연을 비롯해 <작은 땅의 야수들>의 김주혜, <파친코>의 이민진, <붉은 궁>의 허주은 등이 활발하게 이민문학을 쏟아내고 있다.
한류 덕분에 K문학이 주목받고 있다. 반대로 K문학도 한국을 주목하게 만들고 있다. 한국 역사와 문화, 한국인의 감성을 전해온 현지 작가들의 노력도 한몫했다. 그 행렬의 맨 앞에 강용흘이 있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초당> <강용흘 그의 삶과 문학> <서양문화를 쓴다> <재미문학가 ‘초당’ 강용흘의 롱아일랜드 변주곡> <버치 보고서> <조선일보 뉴스 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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