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바보' 들어봤어도 '아버지 바보'는 못 들어보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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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혁진 기자]
▲ 지팡이를 든 아버지가 경로당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
ⓒ 이혁진 |
최근 만난 한 친구는 내가 아버지에게 너무 얽매이는 것 같다고 말한다. 뉘앙스는 위로하는 말이지만, 사실 듣기 매우 거북했다. 내가 아버지를 자주 챙기고 모시는 건, 아버지가 나를 길러준 부모이기 때문이다. 그게 본질이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부모가 노쇠해졌다는 이유로 부모를 멀리하면 나도 언젠가 똑같이 대접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멘토역할을 하는 아버지가 곁에 있어 누구보다 행복하고 지혜로워지고 있다. 아버지의 인식 수준은 인지 능력에 문제가 없으며 여전히 지혜롭고, 나처럼 실수하는 법도 거의 없다.
주변 사람들은 내 걱정하지만... 실은 여전히 배우는 게 더 많습니다
실은 아버지와 아들인 나는 애착이 원래부터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가 1992년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측은지심이 발동했다고 해야 할까, 혼자되신 아버지를 챙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모시고 살았고, 더 자주 대화하고 감정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 1930년생, 만 94세인 아버지는 여전히 옷과 잠자리를 스스로 챙기신다. 아버지의 손을 내가 잡은 모습. |
ⓒ 이혁진 |
가까운 지인들도 가끔 내게 아버지 염려는 그만하라 한다. 누군가는 아버지가 이제 돌아가셔도 여한이 없는 연세라고 말하기도 한다. 무슨 말인지 취지는 알겠지만, 하지만 나는 그들의 의식세계를 다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세계이면서 그걸 마치 다 아는 것처럼 말하기 때문이다.
연로한 아버지가 오래도록 사실 수 있도록 보살피는 게 자식으로서 당연하다. 고루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고령의 부모라면 자식들이 함께 모시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몸과 맘이 온전한 분에게 괜한 편견으로 외롭게 만든다면 나는 그걸 학대라 여긴다.
나는 집을 멀리 떠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집을 비우면 아버지가 홀로 생활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집에선 아버지와 나, 아내 이렇게 셋이 살고 있다. 이런 사정을 알면서도, 집을 떠나 생활 중인 아이들이 최근에 아무 대책 없이 일을 저질렀다.
애들이 올봄 나의 칠순 기념으로 일본 홋카이도 3박 4일 여행을 예약한 것이다. 그렇게 만류했건만, 속절없이 시간은 흘렀고 지난 9월 말 아내와 함께 여행을 다녀왔다.
아이들은 내게 여행 준비에만 집중하라고 했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일주일 전부터 아내와 함께 아버지 모르게 작전을 세웠다.
▲ 일본 홋카이도행 비행기, 아버지를 두고 여행하는 마음이 편치 않고 무겁다. |
ⓒ 이혁진 |
염려로 가득한 내 장광설에 아버지는 나를 따로 불러 조용히 말했다.
"아비가 집에 있으면 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안심이 되는데, 없으면 솔직히 조금은 두렵다. 하지만 나도 조심할 테니, 부디 아무 걱정 말고 여행 즐겁게 다녀와."
하지만 좀체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일본여행 일정도 이틀 전에 기습적으로 말씀드렸다. 미리 알리면 이런 저런 우려로 미리 매우 걱정하실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약간 서운해하는 표정이면서도 아들인 내 입장을 금방 이해하셨다. 게다가 약간의 여행비도 따로 주셨다.
▲ 일본 온천 휴게실 |
ⓒ 이혁진 |
▲ 일본 와규 정식 |
ⓒ 이혁진 |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도착하니 아버지가 환하게 반겨주신다. 하루하루가 길고 외롭고 지루하셨을 텐데, 기다렸다는 말은 아꼈다. 그러나 아버지 표정에는 벌써 혼자 있을 때 쌓인 이야기, 나누고 싶은 이야기로 가득해 보였다.
아버지는 우리가 없는 사이 별일 없이 잘 지내신 것 같았다. 여행하면서 초조했던 내 마음도 아버지를 보자 사르르 녹았다. 내심 아버지가 자랑스럽고 또 감사했다. 비로소 아버지와 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내가 없는 사이에도 아버지가 하루하루 살아 내시는 게 신기하고 고맙다. 내가 온전히 암투병에 전념할 수 있는 것도 아버지 덕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아버지가 편찮다면, 마음 둘 곳 없는 나는 더 힘들게 살고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고령이지만 아직 모든 게 온전하다. 90대 중반임에도 여전히 자식인 나를 배려하시고, 어떨 때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도 일러주신다.
또한, 자기 고집을 앞세우는 경우도 거의 드물다. 설령 어쩔 땐 그렇더라도, 나중에 자기가 오해했거나 지나쳤다고, 미안하다 고백하시는 분이다. 실향민이신 아버지가 수십 년을 신주처럼 보관해 왔던 '벽돌 족보' 20권을 집 수리하며 버리기로 했을 때도, 얘길 들은 첫날엔 굳은 표정이었지만 하루가 지나자 그렇게 하자고 말하시기도 했다(관련 기사: 수리만큼 중요한 '짐 정리', 이렇게 했습니다 https://omn.kr/2a87k ).
나는 아버지의 말과 행동이 어떤지 하루에도 여러 번 확인하곤 한다. 보청기를 끼시긴 하지만, 그 외 아직은 아버지 건강이 좋지 않은 징후는 발견하지 못했다. 이 또한 아버지가 내게 준 축복이고 선물이리라.
만약 서로 의사소통이 잘 안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답답한 노릇인가. 오늘 이른 아침부터 아버지와 나는 서로의 건강을 염려하며 또 한번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눴다.
이번 해외여행도 아버지 덕이 크다. 아무 걱정 없이 일탈을 허락해 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리고 싶다. 아버지가 우리 곁에 계시는 동안 부디 건강하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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