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찻잎에 끓는 물을 확...이래야 맛이 제대로 납니다

노시은 2026. 3. 20.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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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분의 태양이 생명력을 끌어올리듯 찻잔 속에 한 철의 봄을 통째로, 서호용정

바쁜 일상 속, 차 한 잔으로 일상에 쉼표를 찍습니다. 차 한 잔을 마시며 24절기와 동양화를 오가며 흐르는 시간의 아름다움을 기록합니다. <기자말>

[노시은 기자]

해가 부쩍 길어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20일 오늘이 춘분(春分)이네요. 이제부터는 낮이 조금씩 밤의 영역을 잠식하며 길어지겠지요. 사실 춘분은 단순히 시계 바늘이 낮과 밤을 정확히 이등분하는 날이 아닙니다. 차갑고 어두운 기운의 지배가 끝나고, 땅 밑에서 끓어오르던 뜨겁고 밝은 기운이 마침내 지표면을 뚫고 승리를 선언하는 역동적인 '역전'의 날입니다.
 겨우내 비축했던 에너지가 연둣빛으로 움터 오르고 있었다.
ⓒ 노시은
밖에 나가 살펴보니 새순들이 움트고 있었어요. 나무들은 겨울 동안 비축하고 있던 힘을 온통 새순 을 내는 데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본 그들의 모습은 저마다의 개성으로 가득했습니다. 어떤 것은 아기의 주먹처럼 동글동글하게 말려 있고, 또 어떤 것은 세상의 공기를 먼저 탐색하려는 듯 삐죽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었죠.

겉으로 보기엔 정적인 나무들이지만, 그 속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수액이 쉴 새 없이 흐르며 생명의 폭발을 준비하는 치열한 역동성이 느껴졌습니다. 얼음이 다 녹은 저수지의 비단잉어들도 활기차게 움직이며 큰 입을 뻐끔거립니다.

이맘때면 차를 마시는 사람들의 마음은 이미 중국 항저우의 서호 언덕 위로 달려가기 마련입니다. 바로 춘분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채엽하기 시작하는 서호용정(西湖龍井) 때문입니다.

서호용정은 중국의 '10대 명차' 중에서도 늘 첫손에 꼽히는 차입니다. 청나라 건륭제가 항저우 사봉산 아래 열여덟 그루의 차나무를 '어차(御茶)'로 봉했다는 기록은 유명하지요. 용정차의 가장 큰 특징은 '사절(四絶)', 즉 빛깔이 비취처럼 푸르고, 향기가 우아하며, 맛이 시원하고 달며, 모양이 아름답다는 네 가지 절대적인 미덕에 있습니다.

200°C '불의 기운'을 견뎌낸 차

춘분 무렵 따는 용정은 청명(淸明) 전의 차라 하여 '명전차(明前茶)'라 부릅니다. 겨우내 응축된 에너지를 품고 돋아난 첫 싹은 그 희소성 때문에 예부터 '금값'에 비견되곤 했지요. 이어 곡우(穀雨) 전의 '우전차(雨前茶)'가 그 뒤를 잇습니다. 명전이 이슬처럼 섬세하고 단아한 맛이라면, 우전은 조금 더 잎이 자라 맛이 진하고 기운이 뚜렷해집니다.

보통 차 전문가들은 이 여린 명전차를 다룰 때 극진한 예우를 갖춥니다. 찻잎이 익어버릴까 노심초사하며 70~80°C 정도로 식힌 물을 조심스레 붓는 것이 정석처럼 여겨지죠. 하지만 제가 아는 서호용정의 진면목은 그 정형화된 틀 너머에 있습니다.
 서호용정은 뜨거운 표면에 눌러서 만들어서 결과물이 납작하다.
ⓒ 노시은
서호용정은 태생부터 '불의 기운'을 견뎌낸 차입니다. 증기로 찌는 일본식 차나 자연 건조하는 백차와 달리, 용정은 뜨거운 무쇠 솥에서 찻잎을 손바닥으로 직접 눌러가며 덖어 냅니다. 현란한 손놀림으로 뜨거운 열기 속에서 수분을 날리고 향을 가둡니다.

솥 안의 온도는 200°C를 넘나들고, 그 속에서 찻잎은 납작하게 눌리며 고소한 '두향(豆香)'을 몸 안에 새깁니다. 이토록 치열한 불의 세례를 받고 태어난 찻잎인데, 겨우 80°C의 미지근한 물로 그 속내를 다 보여줄 리가요.

머릿속이 서호용정 생각으로 가득해져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항저우 갔을 때 사람들이 마시던 것처럼 유리잔에 찻잎 가득 넣어 쓴맛을 극대화 하는 방식으로 마시기로 했어요.
 납작하게 눌려 만들어진 용정차는 물을 세차게 부어서 맛을 내는 것이 좋다.
ⓒ 노시은
팔팔 끓는 물을 찻잔에 확 부어버렸습니다. 이것은 무례함이 아니라, 찻잎이 품고 있는 '불의 기억'을 소환하는 방식입니다. 뜨거운 물이 닿는 순간, 납작하게 웅크리고 있던 찻잎들이 비로소 기지개를 켜며 위아래로 춤을 춥니다.

낮은 온도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갓 볶아낸 햇콩의 고소함과 난꽃의 우아한 향기가 수증기를 타고 폭발하듯 피어오릅니다. 춘분의 태양이 대지를 달궈 생명력을 끌어올리듯, 저의 끓는 물은 용정의 야성을 깨워 찻잔 속에 한 철의 봄을 통째로 옮겨다 놓습니다.

한 모금 마시며 "아우 써!"를 외칩니다. 하지만 쓴맛의 쓰나미가 지나가면 바로 개운한 닷맛이 부드럽게 밀려옵니다. 이게 서호용정의 매력이죠.

대지의 기운을 내 몸 안으로 정성껏
 서호용정에 쑥가래떡을 굽고 조청을 곁들였다.
ⓒ 노시은
이번 차 시간에는 현미가래떡과 쑥가래떡을 구워서 곁들였습니다. 최고의 단짝 조청과 함께요. 제가 굳이 쑥가래떡을 고집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 계절, 쑥만큼 강인하게 땅의 기운을 담고 솟아오르는 존재가 또 있을까요? 차가운 겨울 흙을 뚫고 꼬물꼬물 고개를 내미는 쑥의 생명력은, 제가 산책길에서 만난 새순들의 그 '삐죽삐죽한' 의지와 닮아 있습니다.
 땅을 뚫고 나온 어린 쑥.
ⓒ 노시은
서호용정의 찻잎이 하늘을 향해 기지개를 켜는 기운이라면, 쑥가래떡은 대지의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묵직한 힘입니다. 현미의 구수한 곡물 향은 갓 덖어낸 용정차의 콩 볶는 향과 공명하고, 쑥의 짙은 풀 향은 차의 쌉싸름한 끝맛을 더욱 선명하게 깨워줍니다.
조청의 진득한 달콤함은 서호용정의 쓴맛을 중화하고 뒤에 오는 단맛을 증폭시킵니다. 떡 한 입을 크게 베어 물고 뜨거운 차 한 모금을 넘기는 과정은,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행위를 넘어 대지의 기운을 내 몸 안으로 정성껏 모시는 일종의 '의식'이 됩니다.
 한참 우러난 용정차는 씁쓸하지만 쓴 만큼 회감도 크다.
ⓒ 노시은
낮과 밤이 같은 춘분처럼, 우리 삶에도 균형이 필요합니다. 제 찻잔 속 찻잎들은 여전히 선명한 초록을 띠며 꼿꼿이 서 있습니다. 해가 부쩍 길어진 이 오후, 용정차 한 잔으로 제 마음의 낮과 밤도 평화로운 평형을 이뤄봅니다. 봄의 쑥맛을 입에 오물거리며 아까 산책길에 만났던 모든 꽃눈들이 무탈히 화사한 꽃망울을 터뜨리기를 바라봅니다.
 꽃눈이 꽃망울을 터뜨릴 날을 기다린다.
ⓒ 노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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