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유의 투표용지 부족사태…美 법원 개입, 獨 재선거 등 후폭풍 컸다

6·3 지방선거에서 서울 송파·광진·강남구 일부 투표소의 투표용지가 소진돼 투표가 잠시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면서 해외 유사 사례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미국을 비롯한 세계 주요 국가에서도 드물지만 없지는 않았던 일이다. 다만 그때마다 법원이 긴급 개입해 투표 시간을 연장하는 등 유권자 권리 보호에 나섰고, 투표용지 추가 확보 및 선거장비 점검 강화 등 제도 보완으로 이어졌다. 선거관리 당국에 대한 책임론은 물론 선거 무효 소송에서부터 부정선거 의혹까지 상당한 정치적 후폭풍을 겪기도 했다.
국토가 워낙 방대한 데다 유권자 명부 관리 등에서 크고 작은 행정적 실수가 종종 발생하는 미국의 경우 조 바이든 행정부 때인 2022년 중간선거와 예비선거(프라이머리) 과정에서 투표용지 관련 사고가 연이어 발생해 홍역을 치른 바 있다.
2022년 미 루체른 카운티서 투표용지 소진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그해 11월 중간선거 당시 펜실베이니아주 루체른 카운티다. 선거 당일 일부 투표소에서 투표용지 인쇄용 종이가 떨어지는 바람에 투표가 일시 중단됐다. 당시 루체른 카운티 내 40여 개 투표소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집계됐다.
법원은 당일 오후 긴급 명령을 통해 원래 오후 8시까지였던 투표 마감 시간을 오후 10시까지 2시간 연장하도록 했다. 사법부가 즉시 개입해 유권자의 ‘투표할 권리’를 구제한 것이다.
법원, 유권자수보다 많은 용지 준비 의무화
행정 당국의 과실로 제때 투표하지 못해 피해를 봤다고 주장하는 유권자 2명이 루체른 카운티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고, 카운티는 결국 3만 달러(약 4500만원)의 합의금을 지급해야 했다. 당시 법원은 “유권자들이 자신들 잘못도 아닌데 투표권을 박탈당했다”며 선거관리 당국을 질타했고, 루체른 카운티는 “어떠한 경우에도 등록 유권자 수보다 많은 양의 투표용지를 의무적으로 사전 준비하라”는 지침이 내려졌다. 다만 선거 결과 자체가 무효화하거나 뒤집히진 않았다.
같은 해 11월 텍사스주 최대 인구 밀집 지역 해리스 카운티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20~30개 투표소에서 투표용지 공급이 중단되면서 투표가 1시간 이상 마비되자 텍사스 법원이 즉각 나서 모든 투표소의 운영 시간을 1시간 연장하도록 조치했다.
사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개표 이후 박빙의 차이로 낙선한 공화당 후보들이 “투표용지 부족으로 지지자들이 투표를 하지 못했다”며 선거무효 소송을 냈고 선거 정당성이 흔들리면서 지역 정가가 혼란에 빠졌다.
수개월간 이어진 재판 끝에 법원은 “투표용지 소진으로 투표를 못한 유권자 수가 실제 당락을 바꿀 만큼 결정적인 규모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선거 자체는 유효한 것으로 결론 났지만, 이 사태는 선거관리 행정의 중요성을 환기시키면서 제도 개선 논의로 이어졌다. 텍사스주 의회는 선거 감독관의 관리 부실로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발생할 경우 이를 단순 행정 과실을 넘어 형사처벌 대상으로 규정하는 강력한 법안을 발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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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사스·애리조나 등서 유사 사례…제도 개편
2022년 8월 애리조나주 피날 카운티 예비선거에서는 선거관리 당국이 투표율 예측에 실패하면서 20여개 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일찍 바닥났다. 당시 수백 명이 긴 줄을 섰다가 상당수는 투표를 못한 채 귀가했다. 피날 카운티는 “선거 관리의 재앙적 실패”라고 규정한 뒤 선거 감독관을 교체하고 투표용지 발주 기준을 전면 수정했다.
같은 해 애리조나주 마리코파 카운티에서는 투표용지를 인쇄하는 프린터와 스캐너 등 투표 장비에서 오류가 발생해 투표가 장시간 지연됐다. 일부 투표소에서는 인쇄된 투표용지가 집계기에서 제대로 읽히지 않아 긴 대기줄이 만들어졌고, 유권자들이 기표한 투표지는 임시 보관함에 넣어야 하는 등 현장 혼선이 이어졌다.
당시 공화당 주지사 후보 측은 “선거가 조작됐다”며 선거 무효를 주장했지만 법원은 조직적 부정행위를 입증할 증거가 없다며 이를 기각했다. 그 대신 선거관리 당국에 대한 대대적인 감사와 물류·장비 시스템의 전면적인 개편을 요구했다.
독일 베를린서도 투표용지 부족…재선거 치러
유럽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독일 베를린에서는 2021년 9월 총선거와 지방선거, 주민투표가 동시에 실시되는 과정에서 베를린주 선관위의 관리 부실로 투표용지가 부족하거나 일부 지역에 잘못된 선거구 투표용지가 배부되는 등 사고가 잇따랐다.
야당이 선거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이의를 제기하자 베를린주 헌법재판소는 “베를린주 헌법에 명시된 선거의 자유, 보편성, 평등의 원칙을 침해했다”면서 지방선거 전체가 무효라고 판단했다. 연방 헌법재판소도 베를린 2256개 선거구 가운데 455개 선거구의 총선 결과를 무효라고 판단하고 재선거를 치르도록 했다.
이에 따라 2년 뒤인 2023년 2월 지방선거 재선거가 진행됐고, 베를린 유권자들이 2021년 선거에서는 패했던 야당 기독민주당에 몰표를 줘 시의회 다수당, 시장이 바뀌게 됐다. 2024년 2월에는 베를린 일부 선거구에서 총선 재선거가 치러져 4개 당의 연방 하원 의석수가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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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지난해 투표용지 부족…개선 권고
호주에서는 지난해 3월 서호주 주 선거 때 40여 개 투표소에서 투표용지 부족과 긴 대기줄 문제가 발생했다. 5개월 뒤 주 의회에 제출된 특별조사보고서는 서호주주 선관위가 현장에서 투표용지 잔여 수량이나 대기 줄을 실시간 모니터링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다는 점 등을 문제로 지적하고 투표소 관리 계획 및 자원 배분, 투표용지 관리 등과 관련해 24개 권고안을 제시했다.
미국이나 독일, 호주 등 해외 사례의 공통점은 투표용지 부족이나 투표장비의 오류를 단순한 행정 착오나 해프닝 수준이 아니라 존중 받아야 할 유권자의 권리와 선거 정당성을 침해할 수 있는 중대 사고로 봤다는 점이다. 따라서 법원이 즉각 개입해 권리 구제에 나서는 한편 이후 선거관리 행정 전반의 제도 개선으로 이어졌다.
워싱턴=김형구 특파원 kim.hyoungg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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