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잃은 부모보다, 20억 물려주는 부모 걱정하는 세상
김남주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딱 30년이 되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라고 노래한 시인의 바람대로, 우리는 손을 잡고 함께 걸어 온 것일까.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김남주 정신이 필요하다면 어떤 이유에서일까. 지금 여기에서 김남주가 다시 살아 서 있는 모습을 그려 본다. 24인의 문학인들과 활동가들이 2024년의 한국 사회를 짚어 보며,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고자 한다. <기자말>
[박정훈 기자]
여름, 서울 광화문광장은 소란스럽다. 바닥에서 솟아오른 물 위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얹혀 사방팔방 퍼져나간다. 부모들은 물에 젖은 아이를 수건으로 닦고 웃고 있는 아이를 사진에 담느라 정신이 없다. 아기들은 유모차 차양 사이를 비집고 나온 소금빵같이 통통한 다리를 아래위로 흔들며 광장을 가로지른다. 아빠의 목 위에는 어김없이 아이들이 껌딱지처럼 붙어 있다. 누군가 평화가 무엇이냐 묻는다며 지금 여기 이곳의 풍경이라고 답할 것 같다.
평화를 깨듯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 가로 2m 세로 3m짜리 작은 무대가 세워졌다. 무대 앞에는 굳은 표정의 사람들이 영정 사진을 들고 앉았다. 그 뒤 계단에는 결연한 표정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계단을 채웠다. 무대 뒤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흐르고 무대 앞에는 아이를 잃은 부모의 절규가 흘렀다. 23명이 목숨을 잃은 아리셀 유가족들이었다. 8월 8일 광화문에 세워진 작은 무대는 그렇게 평화와 절망의 세계를 갈랐다.
▲ 지난 8월 19일 오전 광주지방고용노동청 앞에서 광주·전남 노동 안전보건 지킴이 관계자·에어컨을 설치하다가 폭염에 쓰러져 숨진 20대 노동자의 유가족들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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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전주에서도 페이퍼 공장에서 일하다 숨진 노동자의 어머니가 피켓을 들고 곡기를 끊었다. 19살 노동자가 남긴 수첩에는 경제공부하기, 언어공부하기, 악기 공부하기 같은 인생의 목표들이 적혀있었다. 아침 6시부터 시작하는 빽빽한 생활 시간표와 꼼꼼한 자산 모으기 계획은 한 편의 잘 짜인 시나리오 같았다. 월급 및 생활비 통장, 적금통장, 교통비 통장으로 나누어진 자산운영계획에는 어울리지 않게 비상금 및 경조사 통장이 끼어들었다. 돈을 모으겠다는 치밀한 계획서와 친구들에게 돈 아끼지 않겠다는 넉넉한 마음은 고인의 메모 속에서만큼은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었다.
▲ 지난 7월 2일 국회 소통관에서 더불어민주당 을지키는민생실천위원회와 진보당, 기본소득당이 함께 연 '전주페이퍼 청년노동자 사망사고 진상규명 및 재발방지 대책마련 촉구 기자회견'에서 사망자 유가족이 고인이 적어둔 메모장을 보여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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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슬기씨의 아버지 정금석 장로는 <뉴스앤조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성경의 가르침 중에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라는 게 있잖아요. 그런데 내 자식 키우고 내 가정 꾸리느라 그 일을 잘 못하고 살았어요. 이번 일을 당하고 보니까 제가 잘못 살았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늘 자신을 탓하는 산재 유가족들을 보면서 김남주의 시 <아기를 보면서>가 떠올랐다.
김남주의 시는 산재유가족에 의해 계속 낭독되고 있다
아기를 보면서 / 김남주
제비꽃을 만지작거리는 아기의 손가락
봄바람에 한들한들 춤추는 고사리 같고
장다리밭에서 나비를 쫓는 아기의 눈동자
초롱초롱 빛나는 것이 초저녁의 샛별 같고
하늘 향해 두 팔 벌리고 기지개를 켜는 품은
비 온 뒤 쑤욱쑤욱 자라나는 죽순 같네
오 여보게 친구 우리 아기 좀 보게
어서어서 키워서 그 손에 호미를 쥐어줘야겠네
어서어서 키워서 그 손에 괭이를 쥐어줘야겠네
봄이면 들에 나가 나물이나 캐먹고 살라고 그러는 게 아니네
가을이면 산에 올라 칡뿌리나 캐먹고 살라고 그러는 게 아니네
콩나물 한 그릇 안심하고 먹을 수 없는 서울이 무서워서 그러네
별 하나 아름답게 키우지 못한 서울 하늘이 저주스러워서 그러네
고기 한 마리 병들지 않고 살지 못하는 서울의 강이 싫어서 그러네
우리 아기 고운 아기
나물이나 뜯어먹고 칡뿌리나 캐먹고 평생을 가난하게 살지언정
맑은 물 맑은 공기 푸른 하늘과 가까이 벗하며
흙과 더불어 시골에서 살았으면 싶어서 그러네
(사상의 거처, 창작과비평사 1991)
산재사망 노동자의 가족들은 늘 '그렇게 위험한 일인 줄 알았다면 당장 그만두라고 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서울이 무섭고, 서울이 저주스럽고, 서울의 강이 싫다는 김남주의 시는 죽음의 일터가 무섭고, 죽음의 일터가 저주스럽고, 죽음의 강이 싫다는 유족의 말로 반복해서 낭독되고 있다.
다른 시를 낭송하는 부모들도 있다. 아기 손에 호미와 괭이 대신 부동산과 금융자산을 쥐여주는 부모들이다. 지난해 상속세를 낸 국민은 1만9944명에 불과하다. 총 12조 2901억 원을 세금으로 냈는데, 이들이 물려받은 자산은 무려 51조 8564억 원 이다. 세금을 제하고 39조 5663억 원으로 평균 약 20억 원씩 물려받았다.
누군가는 평생을 모아도 모을 수 없는 돈을 누군가는 부모를 잘 만나 가지게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식을 잃은 부모가 아니라 20억 원을 물려주는 부모의 마음에 공감하고 함께 걱정한다. 정치인들은 상속세를 깎아주는 것을 중산층 대책 서민 대책이라고 뻔뻔하게 이야기한다. 산재부모의 시는 읽히지 않고, 부자부모들의 시는 널리 널리 퍼져나간다.
▲ 화성 아리셀 화재 참사 유족들이 지난 7월 4일 오후 경기 화성시 화성시청 1층 합동분향소에 고인들의 위패와 영정을 안치했다. 유족들이 위패와 영정을 들고 이동하고 있다. |
ⓒ 김화빈 |
밤을 새우면서 고르고 고른 단어들은 가슴속에서 올라오는 감정에 어지럽게 흩어져버리기도 한다. 지난 9월 17일 추석연휴 아리셀 유가족들은 화성시청 분향소에 모여 추모기도회를 열었다. 3개 종단의 추모 기도가 끝나고 어김없이 유가족은 마이크를 잡았다.
"우리 아이가 너무너무 보고 싶습니다."
무너져 버린 건 그곳에 모인 우리의 마음이었다. 김남주가 떠난 지 30년, 우리는 아직 김남주의 시를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있을까? 김남주의 시는 다른 사람의 얼굴과 다른 문장으로 우리 사회 곳곳에서 쓰이고 낭독되고 있다. 단지 우리가 듣지 않고 읽지 않을 뿐이다. 김남주를 사랑하는 이들이 추모하고 기억해야 할 이름은 김남주가 아닐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박정훈은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부위원장입니다. 공동주최 : 김남주기념사업회·한국작가회의·익천문화재단 길동무 후원 : 더숲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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