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에서 국민들 눈물바다... '비 내리는 호남선' 대히트 속사정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역대 대선에서 '흥행'이란 말을 붙일 만한 첫 번째 사례는 1956년 제3대 대선이다. 1948년 대선은 국회에서 간선제로 치러지고, 1952년 대선은 직선제이기는 하지만 전시 중에 치러졌다. 그래서 선거판이 뜨거웠다고 할 만한 것으로는 민주당 신익희, 진보당 조봉암, 자유당 이승만이 격돌한 1956년 5·15 대선이 한국 현대사에서 최초다.
그해 5월 4일 자 <동아일보> '선거 팔면경'에 따르면, 하늘에서는 비행기가 자유당 삐라를 살포했다. 지상의 장터에서는 지게에 선전판을 얹은 선거 운동원들이 행인들 사이를 비집고 다녔다. 길거리에는 포스터가 붙었다. 그해 1월 물가 기준으로 쌀 5가마니 값인 이승만의 5만환짜리 대형 초상화도 곳곳에 걸렸다. 버스나 백화점에는 이승만 플래카드가 붙었고 이발소·다방·목욕탕도 마찬가지였다. 어린이 방송에서는 이승만 찬가가 울려 퍼지고, 극장에서는 이승만 영화가 상영됐다.
물량 공세가 버거운 야권은 표어 제작에 치중했다. 야권은 "못 살겠다 갈아보자"를 내놓았다. 자유당은 "갈아보면 더 못 산다"로 대응했다. 야권은 "더 못 살아도 갈아보자"를 만들어냈다. 자유당은 '갈아보자' 콘셉트에서 벗어나고자 "구관이 명관이다"를 꺼내들었다. 야당은 "미쩌야 본전! 갈아보자"를 내놓았고, 이 콘셉트에 다시 휘말린 자유당은 "갈면 가루가 되어 못 산다"라고 받아쳤다. 야당은 "논도 갈고 밭도 갈고 사람도 갈아보자"라며 그 콘셉트를 계속 내세웠다. 돈이 적게 되는 아이디어 싸움에서는 야당이 앞섰다.
이 선거는 1954년에 3선 개헌을 강행한 이승만이 종신군주로 나아가는 길목이었다. 조봉암과 더불어 해공 신익희는 이승만이 왕관을 쓰지 못하게 하고자 길목을 막아섰다. 양대 진영은 사활을 걸었고, 선거전은 치열한 양상을 띠었다. 유혈 투쟁이나 궁중 암투가 아닌 '입씨름'이나 전단지 살포가 공식 수단이 되는 이런 식의 '왕권 쟁탈전'은 당시 사람들에게 낯선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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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공 신익희 선생 |
| ⓒ 연합뉴스 |
이강수 국가기록원 학예연구관의 책 <신익희>는 신익희 유세장과 관련해 "부산에서 12~13만 명, 대구에서 14~15만 명, 대전에서 2만여 명, 청주에서 3천~4천여 명, 그리고 5월 2일 인천에서 6~7만 명의 군중이 참여하였다고 한다"라는 설명을 한 뒤, "5월 3일 오후 2시 한강 백사장에서 최고조에 달했다"라며 서울 유권자 4분의 1인 30만 명이 참석했다고 기술한다.
한강 백사장 유세에서 신익희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모양 이 꼬락서니, 우리들이 40년 동안을 주야로 바라고 원하던 독립이, 이것이 결코 우리가 사는 꼬락서니가 이와 같으리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라며 이승만 왕조로 변질되는 당시의 현실을 비판했다.
신익희는 근 40년간 일제와 싸워 얻은 독립의 결과물이 겨우 이 꼬락서니냐고 한탄했다. 단순히 '일제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민주공화제 수립'이 목표였던 지난날의 독립운동과 상충되는 것이 '이승만 독재'라고 규탄했다. 당시 유권자들이 이 주장에 동조했기에, 그의 말을 들어보고자 집 밖으로 대거 몰려나오고 조봉암도 흔쾌히 후보직 양보를 표명했던 것이다.
신익희의 인기로 인해 5·15 대선 열기는 고조됐다. 지도자 선출을 놓고 온 나라가 뜨거운 열기에 휩싸이는 것은 해방 이후는 물론이고 단군 이래 처음이었다. 그러나 이 열기는 대선 열흘 전에 갑자기 급랭한다.
그해 5월 6일 자 <조선일보> 톱기사는 "신익희 씨는 5일 새벽 호남선 열차 내에서 뇌일혈로 졸도되어 이리호남병원에 입원 가료하였으나, 동(同) 6시 40분경 회생치 못하고 향년 63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라고 한 뒤 "4일 밤 동당(同黨) 부통령후보 장면 씨와 함께 호남지방의 선거유세차 향하던 도중이었다"라고 보도했다. 5월 3일 한강 백사장에서 서울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확인한 뒤 다음날 밤에 호남선 열차에 올랐다가 5일 새벽에 열차 내에서 쓰러졌던 것이다.
이로써 이승만의 당선이 기정사실이 되는 듯하다가 조봉암이 돌풍을 일으키고, 진보당이 대통령 선거에 집중하고자 부통령 후보직을 민주당 장면 후보에게 양보하는 일이 일어났다. 자유당 부통령 후보 이기붕은 다 잡은 고기를 이 때문에 놓치고 말았다. 신익희 급서로 이승만과 장면은 당선되고 이기붕은 뜻밖의 유탄을 맞았다.
신익희는 이승만이 선거 무대에서 만난 가장 강력한 적수다. 신익희 급서 직후부터 조봉암이 선풍을 일으켰지만, 조봉암은 216만 대 505만의 표 차로 패배했다. 신익희는 당선이냐 패배냐가 판가름되지 않은 상황에서 급서했다. 그렇게 되지 않았다면 신익희가 당선됐을 가능성이 크므로, 이승만 입장에서는 조봉암보다 신익희가 훨씬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신익희는 이승만의 대항마로 삶을 마쳤지만, 이는 해방 이후 그의 궤적과 잘 들어맞지 않는다. 1894년에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뒤 1919년에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내무총장과 외무부장 등을 역임한 그는 친미외교에 기반한 이승만의 독립운동노선을 지지했다. 그는 해방 직후에도 이승만과 함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했다.
정부수립 3개월 뒤에 이승만 친위정당인 대한국민당을 만든 주역도 신익희다. 1948년 11월 14일 자 <조선일보> 기사 '대한국민당 신(新)출발'은 "신익희·장은희 씨 등이 주도하여" 11월 13일에 이 당이 발족됐다고 보도했다.
대한국민당은 창당선언문에서 일민주의(一民主義)를 표방했다. 이는 한민족 전체가 동일한 경제적 복리와 정치적 권리를 누리고 지역차별과 성차별을 받지 않도록 하겠다는 이승만 정부의 공식 슬로건이다. 이승만을 위해 정당을 만들고 그 이념까지 표방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신익희는 이승만을 지지하는 쪽에 있었다. 언제나 무조건 추종한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랬다.
그랬던 신익희가 반이승만 진영을 이끌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52년부터 발생한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이다. 그해 5월 25일에는 이승만에게 불리한 대통령 선거 조항을 바꾸기 위한 불법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7월 4일에는 이승만 반대파들이 포진한 국회의 대통령 선거권을 박탈하기 위한 직선제 개헌안이 불법적 방법으로 국회를 통과했다(부산정치파동).
임시수도 부산을 무대로 벌어진 이 파동은 신익희가 반이승만·반독재 노선을 표면화시키는 계기가 됐고, 이런 상태에서 신익희가 이승만을 증오하게 만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신익희가 인도 뉴델리 공항에 가서 역모 사건을 꾸몄다는 의혹이 1954년 10월 27일부터 불거진 일이 그것이다.
결국 조작으로 판명된 이 의혹은 휴전 직전인 1953년 6월에 엘리자베스 영국왕 대관식에 참석한 뒤 귀국하던 국회의장 신익희가 뉴델리 공항에서 조소앙(전쟁 중 납북)을 은밀히 만나 김일성·이승만을 모두 배제하는 중립화정권의 수립을 모의했다는 내용을 담았다. 위의 <신익희>에 따르면, 그는 "이런 자들의 비열하고도 악랄한 정도가 이러하니 극도로 증오스럽다"라고 일기에 썼다.
'뉴델리 밀회 사건'으로 신익희가 일시적으로 위축된 직후인 1954년 11월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초대 대통령에 한해 3선 제한을 풀어주는 개헌안을 통과시켜 장기 집권의 길을 열어놓았다(사사오입 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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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민장으로 치러진 신익희 선생의 장례. |
| ⓒ 연합뉴스 |
부정선거가 난무했으므로 개표 결과가 어떻게 됐을지 장담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승만에 대한 국민적 혐오와 신익희에 대한 뜨거운 지지를 감안하면, 급서하는 일이 없었다면 신익희가 당선됐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5월 15일 투표일에 조봉암 표가 216만 장 나오고 무효표가 185만 장 나왔다. 민주당이 '조봉암을 찍지 말고 무효표를 찍을 것'을 유도한 결과다. 그래서 185만 표는 사실상 신익희 표다. 민주당의 잘못된 선거 전략이 낳은 결과이기는 하지만, '죽은 신익희'가 185만 표나 얻은 사실은 '산 신익희'가 얼마나 득표했을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신익희가 무사했다면 조봉암 표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조봉암의 낙선도 안타깝지만, 신익희의 급서도 안타까운 일이다.
신익희의 급서는 <비 내리는 호남선>의 대히트를 낳았다. 출반된지 얼마 안 되는 이 신곡은 5월 5일 서울역발 논산행 열차에서 갑자기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1992년 5월 9일 자 <동아일보> 기사 '가요 100년 그 노래 그 사연 (40) 비 내리는 호남선'은 "서울역에 그의 유해가 도착하던 날, 많은 국민들이 하늘까지 원망하며 울었다"라고 한 뒤 "서울역발 논산행 열차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노래가 흘러 퍼졌다"라고 보도한다.
그날부터 많은 한국인들은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 옳으냐/ 사랑이란 이런가요 비 내리는 호남선에/ 헤어지던 그 인사가 야속도 하더란다"라는 가사를 노래하며 신익희의 죽음을 애도했다.
신익희는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저지할 유력한 대항마였다. 이승만 집권 8년을 겪어본 한국인들은 이래서는 도저히 못 살겠다며 신익희에게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그 희망은 그해 5월 5일 새벽에 열차 안에서 쓰러졌다. 그 뒤 한국은 악몽 같은 세월을 4년 더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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