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자살에 대한 산재보상 제도,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가

박경환 2026. 6. 1. 10:33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노동자 정신건강 돋보기] 논문 '근로자 자살에 대한 산재보상' 소개 (정슬기, 2024)

[박경환]

대리인으로서 노동자 자살 산재 사건들을 다루면서 늘 고민되는 지점이 있다. 근로복지공단에서는 유족에게 '객관적' 자료를 요구하는데, 유족이 그 자료를 어떻게 준비할 수 있을까. 이미 세상을 떠난 고인은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고 물어볼 수도 없다. 그 침묵을 어떻게 글로 옮겨야 위원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개인적 취약성이 있다는 이유로 왜 자살의 업무관련성이 쉽게 부정되는가. 이러한 물음에 답을 찾지 못하던 차에 정슬기의 2024년 논문 '근로자 자살에 대한 산재보상(노동법논총 60, 27-60)'을 접하게 되었다. 이 논문은 현재 노동자 자살을 바라보는 사회, 법, 판례의 시각을 살피는 한편, 산재보상 제도가 구조적·제도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제시하고 있다.

노동자 자살을 바라보는 학술적, 제도적 접근

자살은 개인적 요인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환경적 요인도 원인이 된다. EU의 고용 변화와 사망률 사이의 연관성, 한국에서 경제위기 이후 자살자의 증가에서 알 수 있듯이 자살은 사회구조적 요인과 개인적 요인의 복합적인 작용을 통해 발생한다. 이에 ILO나 EU에서는 노동안전보건 차원에서 신체적 재해 발생과 함께 정신적 스트레스가 질병 발생의 위험성이 동반되는 것을 지침 등을 통해 명시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정신질병에 대한 사회적 사건의 발생, 행정기관 또는 법원이 인정한 이후 관련 입법을 통해 보완하고 있다.

그러나 현행 산재보상제도는 정신질병 조사지침의 구조적 문제(행정적 측면), 관련 제도 개선이 거의 요원한 문제(입법적 측면), 재해자 측의 증명책임을 확고히 하는 문제(사법적 측면)가 있으며 특히 연구자는 노동자가 사망한 건에 대해 유족의 증명책임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며 행정적, 사법적 측면에서 노동자 자살에 대한 업무관련성 판단기준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한다.

조사·판단에 있어 상향식 판단방식으로의 전환

이 논문은 업무 스트레스-자살의 인과관계 조사·판단에 있어 현재의 조사자·판단자의 주관적, 하향식 판단방식에서 벗어나 업무상 사건별 스트레스 강도를 객관적·계량적으로 평가하는 상향식 판단방식으로 조사 절차를 재구성하기를 제시한다. 상향식 판단방식은 일본의 선례가 있다. 일본에서는 재해자의 심리적 부하를 일으킨 사건의 배경, 해당 사건의 빈도, 재해자의 신체적·정신적 증상, 사용자의 대응 등을 객관적·계량적으로 세분화하여 그 부하 정도를 평가하는 기준을 마련하였다.

반면, 한국은 스트레스 사건별 객관적·계량적 지표를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조사자와 결정자의 가설이나 대상이 갖는 주관적 관점 등이 심리 과정을 지배한다. 이에 결정자의 경험칙에 의거한 법리 또는 예외 사항 적용으로 인해 심리 기간이 단축되기도 하지만, 사건의 내용을 예외로 취급하고 설명을 배제하거나 증거 및 증언을 선택적으로 해석·평가하게 된다. 무엇보다 재해자 측에서 판단의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이에 비해, 일본식 상향식 판단방식의 경우 업무상 스트레스 요인이 객관화·계량화되어 있어 조사·판단에 있어 시간이 걸리더라도 판단의 근거가 명확히 드러난다. 연구자는 이에 주목하여 현재 정신질병 사건 조사·판단에 있어 하향식 판단방식에서 상향식 판단방식으로의 구조적 변화를 제안한다.

아울러 연구자는 노동자 자살에 있어 법상 업무상 재해 인정 특례 도입, 우선적용대상에 대한 조사 간소화, 객관적·합리적 판단 법리 정립 등 증명책임 완화 대안을 제시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논문을 살펴보기를 바란다.

이 논문을 통해 노동자 자살 사건을 경험하며 가졌던 의문들이 현행 제도의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노동자 자살 판단에 있어 주관적 판단의 개입을 최소화하기 위해 상향식 판단방식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연구자도 언급하였듯, 상향식 판단방식은 예외적 요인을 배제하고 기존의 지침대로 귀납적 판단을 반복함으로써 잘못된 인과관계를 도출할 위험도 있다. 객관적·합리적 결정과 재해자 측의 충분한 이해를 위해 상향식 판단방식으로 구조적 전환을 추진하되, 예외적 요인을 배제하지 않도록 보완 장치를 함께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월간 일터 5월호에도 실립니다.이 글을 쓴 박경환 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운영위원, 공인노무사입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