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정리 중 저금통 발견, 액수에 놀랐습니다
연재 <베이비부머의 집수리>는 오래된 집을 수리하며 느낀 점을 정리한 기록이다. 노후를 위해 집을 수선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여러 생각과 시행착오들이, 베이비부머 등 고령자와 그 가족들에게 공감이 되고 도움을 줄 수 있길 바란다. <기자말>
[이혁진 기자]
▲ 두 아들이 내게 보낸 편지 중 일부 |
ⓒ 이혁진 |
많이 버렸지만, 아주 버리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의외의 '소중한 추억거리'도 건졌기 때문이다. 사실 버리려고 모아두었다가 도로 집어든 것이 한둘 아니다. 처음 생각과 달리 마음이 변했는데 그게 비싸거나 그런 건 결코 아니었다.
인간은 추억으로 산다고 했는가. 추억과 의미가 담긴 물건은 그게 아무리 사소해도 간직하고 싶어진다. 그런 것 중 하나가 다양한 사연이 담긴 편지들이다.
나는 편지를 자주 쓰는 편이었다. 답장을 바라는 건 아니다. 대화하는 대신 편지를 보내는 것이 나만의 소통법이었다. 특별한 메시지가 없더라도 한마디 안부와 인사에는 진심이 있다고 믿고 있다.
▲ 아이들이 유치원부터 군복무 시절까지 보낸 편지를 소중한 추억거리로 보관했다. |
ⓒ 이혁진 |
이 많은 편지는, 누구라 할 것 없이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모은 결과이다. 애들은 애들대로 집을 떠나 살면서도 편지를 추억으로 고이 간직했고 우리 부부는 우리대로 주고 받은 편지를 보관했다.
학교에서 어버이날이나 부모 생일을 맞아 아이들에게 편지를 쓰도록 유도해 보낸 편지들이 유독 많지만, 지금 보더라도 뭉클한 내용이 적지 않다.
▲ 두 아들이 각각 초등학교 3, 4학년 시절. 왼쪽이 작은 아들 |
ⓒ 이혁진 |
툭탁대며 싸웠다가도, 형은 형대로 동생은 동생대로 편지를 통해 화해를 모색하며 형제애를 쌓아갔다. 두 형제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편지를 통해 나눈 성장통이 한몫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IMF 담긴 편지... "할아버지 생신 축하해요, 용돈 주시면 선물 사드릴게요"
애들은 편지를 통해서 할아버지도 챙겼다. 할아버지를 부모와 나눌 수 없는 곤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우상이자 친구처럼 표현했다.
▲ 큰 아들이 편지에 동봉한 엄마 그림 |
ⓒ 이혁진 |
사실 이러한 표현들은 철없는 그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구체적으로 용건을 이야기하고 자신의 입장을 담은 솔직함이 부럽다.
편지 중에 가끔 나도 등장하는데, 아이들은 나를 '고생하는 아빠'로 묘사했다. 큰 아들은 중학교 1학년 어버이날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특히 아빠는 요즘에 더욱 힘든 것 같아요. 그 IMF가 뭔지 월급도 깎이고 피곤해 들어오시는 아빠를 보면 미안함과 죄송함으로 아빠에게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엄마는 아빠의 깎인 월급 때문에 반찬도 제대로 못해준다고 하는데 그러지 마세요. 나는 반찬이 없어도 밥 잘 먹을 수 있어요. 내일이라도 김치 하나만으로도 밥을 먹어도 좋아요."
꾹꾹 눌러 쓴 손글씨에는 아이들 특유의 순수한 동심과 기특함이 스며 있다. 나는 아이들 편지를 다시 읽으며 눈물이 찔끔 났다. 그 시기 썼던 아이들 소망이 지금은 어느 만큼 이뤄졌는지 나름 가늠해 보기도 했다.
애들이 군에 갔을 때 주고받은 편지도 꽤 많았다. 군사 우편은 어린 시절 편지와 달리 미래와 친구 등 인생의 과제와 고뇌가 엿보인다.
특히 나는 애들의 군복무 시절 열심히 답장을 보냈다. 나는 편지에서 고된 훈련보다도 조직 생활과 친화력의 중요성을 누차 강조했다. 사실 애들은 이 부분에 소홀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 경주 여행 가족사진, 애들 초등학교 시절 유일한 가족사진 |
ⓒ 이혁진 |
나는 아이들이 언젠가 이러한 추억들을 반드시 소환할 것이라 예상한다. 내 경우 편지나 글로 위로 받았을 때의 기억은 유독 인상 깊게 남아 평생을 함께하는 것 같다. 애들도 언젠가 어려울 때, 자기 어린 시절 편지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장차 이 편지들의 소중한 의미를 새길 때를 대비해, 나는 작은 방에 수납장을 별도로 만들어 애들의 편지함을 보관했다. 여기엔 애들의 졸업장, 상장, 기념 사진 등 어릴 적 추억거리도 있다.
이와 함께 결혼 후 내가 사용하던 '손지갑'도 버리지 않았다. 아내가 사 준 가죽지갑 3개는 색깔이 바래고 헐어도 추억으로 남겼다. 지난해 관람한 '피천득기념관'에 전시된 유품들도 대부분 이처럼 평범한 물건들이었던 기억이 났다.
▲ 고 피천득 선생 전시 유품 |
ⓒ 이혁진 |
▲ 돼지저금통 |
ⓒ 이혁진 |
저금통 크기는 실제로 큰 돼지 얼굴만 하다. 조그만 저금통이 번거로워 큰 것을 찾다 고른 기억이 생생하다. 한푼 두푼 동전이 언젠가 목돈 되리라는 야무진 꿈으로 시작했는데, 바쁠 때 장롱 뒤에 놔두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저금통을 찾고 보니 횡재를 한 기분이었다. 아내도 기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아내는 벌써 돼지 속에 들어있는 금액을 계산하고 있었다.
저금통 무게도 상당했다. 10Kg이 넘었다. 아내와 내가 힘을 합쳐 들기에도 낑낑 맬 정도다. 아내는 거들면서 젖 먹던 힘까지 내는 거 같았다.
아내와 '돼지 잡는 날'을 잡았다. 신문으로 자리를 깔고 배를 열어 보니 동전 특유의 냄새가 풍겼다. 천 원, 오천 원, 만 원짜리 수십 여 장의 지폐가 섞여 있었다.
우리는 돼지에서 나온 동전과 지폐들 앞에서 부자가 된 듯했다. 즉석에서 아내와 내기를 했다. 저금통에 얼마가 들어있는지 근사치를 맞추는 사람에게 3만 원 주기로 했다. 나는 저금통 금액을 55만원, 아내는 50만원을 예상했다.
▲ 돼지 저금통에서 꺼낸 동전들 |
ⓒ 이혁진 |
이제 동전 쓰는 일만 남았다. 알아보니 은행에서 동전은 찬밥 신세다. 지정된 날과 시간에 동전을 구분해 가져가야만 환전해 준다는 것이다.
아내도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동전으로 지불하면 귀찮아한다고 귀띔했다. 이쯤 되면 '돼지 저금통 추억'도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이런 저런 과정을 거쳐, 환전을 하고 나니 왠지 허탈했다. 계좌에 입금하고 손에 쥐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돼지저금통 돈을 아내에게 선물했다. 무척 고맙다고 할 줄 기대했는데, 아내가 사뭇 냉정한 투로 말했다. "이 돈은 나 혼자를 위해서보다는 우리 가족을 위해 사용하겠다"라고.
결국, 내가 제시한 55만 원이 실제 액수인 60만 원 근사치에 보다 가까워 3만 원을 벌었다. 집 수리하면서 그간 계속 돈을 쓰기만 했는데, 내가 수입으로 챙긴 것은 이 3만 원이 전부였다. 하지만 대신해 건진 추억들은 어떤 돈으로도 계산할 수 없는 것들, 돈을 줘도 살 수 없는 것들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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