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그마치 200년, 어린 왕의 명예회복에 걸린 시간

최경식 2026. 3. 10.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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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식의 역사 이야기] 비정한 권력 앞에 쓰러진 단종

역사에 남다른 애착을 가진 '히스토리텔러'입니다. 국내와 해외의 주요 역사 이야기를 재미있게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기자말>

[최경식 기자]

(이전 기사 : '끔찍한 고문 앞에서도, 굽히지 않은 단종의 충신들'에서 이어집니다.)

사육신 등의 거사는 역설적으로 단종의 비극을 재촉했다. 사육신 등이 처형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단종 책임론'이 수면 위로 부상했다. 세조의 신하들은 상왕인 단종이 복위 운동에 반드시 연루돼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이에 따라 단종에게 책임을 물어 강봉시키고 궁궐에서 내쫓아야 한다고 주청 했다.

세조도 같은 생각이었다. 실제로 단종이 복위 운동에 연루됐다는 증거는 없었다. 그럼에도 세조와 그 신하들은 모든 화의 근원이 될 수 있는 단종을 가만히 놔둘 수 없었다. 1457년 6월,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 된 후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떠나게 됐다. 단종이 거처했던 영월 청령포는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육로는 험준한 절벽으로 막혀 있었다. 이곳에서 단종은 죽을 때까지 한 많은 삶을 살게 된다.

세조의 마음은 무언가에 계속 쫓기고 있었다. 단종을 외지로 유배 보냈음에도, 집권 정통성이 워낙 부족하다 보니 또 다른 반란 가능성을 우려했다. 그럴수록 세조는 악순환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유화적 노선이 아닌 더욱 강경한 노선을 택했다. 단종의 외가를 풍비박산 내는 패륜을 자행한 것이다. 나아가 세조는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도 폐서인했고, 그녀의 능을 개장해 서인의 무덤으로 바꿔버렸다. 세조는 잇따른 가혹한 조치들만이 자신과 정권이 살 길이라고 생각했다.

단종의 죽음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 컷
ⓒ 쇼박스
세조에 대한 저항은 끝나지 않았다. 과거 경상도 순흥에 유배 됐던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 복위를 모의했다. 모의는 허무하게 좌절됐다. 이보흠에게는 이동이라는 남종이 있었는데, 이 남종이 금성대군의 여종인 금연과 사랑에 빠졌다. 이동은 금연과 자주 만나면서 우연히 금성대군과 이보흠이 심상치 않은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야망이 컸던 이동은 이를 출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금성대군이 써놓은 격문을 훔쳐 달아났고, 안동부사에게 일러바쳤다.
이동의 행위를 인지한 이보흠도 후환이 두려워 자발적으로 금성대군의 계획을 고했다. 결국 금성대군은 신속하게 체포됐고, 모진 고문을 받은 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단종의 장인인 송현수도 연루 혐의를 받고 교형에 처해졌으며, 순흥은 반역의 고을로 낙인 찍혔다. 사실상 2차 단종 복위 운동도 실패로 돌아간 직후 세조의 신하들은 '문제의 근원'을 확실히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 컷
ⓒ 쇼박스
그것은 바로 단종을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단종이 살아있는 한, 정통성 시비는 끊임없이 불거질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특히 정인지가 적극 나서서 "이제 금성대군도 노산군을 끼고 난역을 일으키려 했으니, 마땅히 노산군 역시 편히 살게 할 수 없다"라고 주청 했다. 세조는 고심 끝에 단종을 죽이라고 명했다.

단종의 최후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자결, 사사, 교형 등이다. '세조실록'에는 단종이 자결했고, 세조가 이를 슬프게 여겨 극진히 장례를 치뤄줬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세조 시대에 집필됐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진다.

오히려 야사인 '연려실기술' 내용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이에 따르면 단종이 사약을 거부하자, 어느 통인(시중드는 사람)이 단종을 죽이는 것을 자처했다. 그는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단종이 앉은 좌석 뒤로 나아가 목에 걸고 창문으로 끈을 잡아당겼다고 한다. 죽은 단종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하고 강물에 방치된 것으로 전해진다.

세조가 시신을 수습할 경우 삼족을 멸할 것이라고 엄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월 호장인 엄흥도가 시신을 몰래 수습해 현재의 장릉 자리에 안치 했다. 단종이 명예를 회복하기까지 무려 200년 넘는 세월이 걸렸다. 1681년 7월, 숙종은 단종을 노산대군으로 추봉 한 뒤 1698년 11월에 정식으로 복위시켰다. 시호는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이고, 단종이라는 묘호는 이때 추증된 것이다.

역사의 패자로 남은 세조

한편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살해하기까지 한 세조도 삶이 온전치 못했다. 어찌 된 연유인지 그의 두 아들이 요절했다. 맏아들인 의경세자는 19세에, 둘째 아들인 예종도 20세의 어린 나이에 숨을 거뒀다. 이들이 석연치 않은 이유로 요절한 것을 두고, 당시 세간에서는 세조가 단종과 충신들을 숙청한 것에 대한 '업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와 관련한 유명한 야사도 있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단종이 죽기 직전에 세조가 꿈을 꿨는데 죽은 현덕왕후가 나타나 세조에게 분노하며 "네가 내 아들을 죽이려 하니, 나도 네 아들들을 죽이겠다"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깜짝 놀란 세조는 꿈에서 깼다. 이윽고 환관이 달려와 맏아들인 의경세자가 사망했다고 말했다. 세조는 이것이 현덕왕후의 저주 때문이라며 분노했다. 그는 안산에 있는 현덕왕후의 능을 파헤친 후 관에서 시신을 꺼내 망치로 부수고 소각했다. 종묘에서 현덕왕후의 신위도 내쳤다고 한다.

내용의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순 없지만, 그만큼 세조의 행위가 정당성이 떨어지고 백성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것을 방증한다. 아울러 세조 집권의 정통성 논란은 쉽사리 꺼지지 않고 집권 기간 내내 이어져 그를 괴롭혔다. 나아가 역사 속에서 세조는 (적지 않은 업적에도) 지극히 부정적인 유형의 인물로 낙인 찍히게 된다. 사육신 등과 달리 역사의 패자로 남게 된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최경식 기자의 스레드와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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