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생존자 전원 별세…韓日 역사와 국경에 남겨진 마지막 기록

전진영 2026. 11. 8.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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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유통기한도 다 지났어요. 차마 치우지 못해서 그냥 다 가만히 뒀거든."

'일본인 처'에 대한 문제를 말할 수 있는 생존자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원래 나자레원은 1972년 일본인 처들의 귀국을 돕는 임시 거처로 설립된 곳이다.

시설에 입소하지 않은 일본인 처들에게도 일본에서 보내온 식료품과 생활용품을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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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에도 韓에도 속하지 못했던 삶
경주 나자레원

"이제 유통기한도 다 지났어요. 차마 치우지 못해서 그냥 다 가만히 뒀거든."

지난 21일 찾은 경상북도 경주시의 일본인 처(妻) 요양시설 나자레원.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 남성과 결혼해, 해방 이후 한국에 정착한 일본인 여성들이 노년을 보내던 곳이다. 한때 100명이 넘는 일본인 처들이 이곳에서 생활했다. 이제는 아침밥을 먹던 식당도, 심심하면 서로의 방을 넘어 다니던 침실도 고요했다.

21일 경북 경주 나자레원에서 할머니들이 생전에 사용하던 물건이 놓여 있다. 2026.10.21. 강진형 기자

식당의 식탁 위에는 할머니들이 아침마다 밥에 얹어 먹었다는 일본에서 공수한 조미료 후리카케, 간장 등이 있었다. 모두 날짜가 지나 이제 상표 색깔도 희미했다. 미처 치우지 못한 물건을 소개할 때마다 송미호 원장의 목소리는 잠깐씩 먹먹해졌다. 지난해 마지막 입소자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이제 나자레원에서 생활하는 할머니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올해 5월에는 재한일본인처모임 부용회의 마지막 생존자 야마구치 마스에 할머니가 별세했다. '일본인 처'에 대한 문제를 말할 수 있는 생존자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할머니들이 생전 생활하던 방에는 각자의 취향이 남아있었다. 자원봉사자들이 선물한 일본 인형을 포장도 뜯지 않은 채 가져다 놓기도 했고, 색종이를 접어가며 만든 작품을 하나하나 진열한 방도 있었다. 엽서나 잡지에 나온 후지산 사진을 오려 붙인 방도 있다. 사람은 떠났지만 남겨진 물건에서는 머물렀던 이들의 성격과 취미를 짐작할 수 있었다.

21일 경북 경주 나자레원 내부에 할머니들이 생전에 사용하던 물건이 놓여 있다. 2026.10.21. 강진형 기자

원래 나자레원은 1972년 일본인 처들의 귀국을 돕는 임시 거처로 설립된 곳이다. 147명을 일본으로 돌려보냈지만, 고국에 의지할 가족이 없거나 한국에 자녀를 둔 여성들은 남았다. 귀국했다가 현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돌아온 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귀국을 위한 시설이 이들의 마지막 안식처가 됐다.

조선인 남편을 따라 한국에 정착한 이들은 차별과 빈곤뿐 아니라 국적 문제도 겪었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 이후 일본 호적에서 제적된 여성들은 일본 국적을 상실했다. 그러나 남편에게 본처가 있거나 가족의 반대로 혼인신고를 하지 못해 한국 국적도 취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일본인 처들이 상당수 생존해 있던 1991년 부용회 명부에 따르면 회원 484명 중 한국 국적자는 35.1%, 일본 국적자는 33.9%, 이중국적자는 31.0%였다.

국적에 따라 적용받는 복지제도도 달랐다. 한국 국적자는 일정 요건을 충족하면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일본 국적자와 무국적자 등은 수급에 제약이 있었다. 일본 정부도 별도의 재외국민 보호사업으로 생계·의료비를 지원했으나, 2014년 일본사회복지학회에서 발표된 연구는 지원금이 당시 한국의 최저생활비에도 못 미친다고 지적했다. 송 원장은 "일본인 처들이 고령화되면서 제일 부담이 됐던 건 의료비였다"며 "특히 무국적자는 의료보험 적용이 안 돼 수술이라도 받게 되면 정말 큰일이었다"고 회상했다.

이런 제도적 공백 속에서 나자레원은 할머니들의 일상과 의료 문제를 돌보는 거점으로 자리잡았다. 시설에 입소하지 않은 일본인 처들에게도 일본에서 보내온 식료품과 생활용품을 전달했다. 동시에 이곳은 할머니들이 마음 놓고 고향의 언어와 문화를 나누는 공간이었다. 식당 TV장 아래에는 일본어 노래 가사집이 잔뜩 들어있다. 할머니들이 일본이 그리울 때 자주 부르던 노래들을 모은 것이다. 밖에서는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이곳에서는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었다.

송미호 나자레원 원장이 21일 경북 경주 나자레원에서 할머니들이 생전에 보던 일본 노래 가사집을 공개 하고 있다. 2026.10.21. 강진형 기자

그러나 고국에 대한 그리움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타마시 다케데모 니혼니 카에리타이(魂だけでも日本に帰りたい。영혼만이라도 일본에 돌아갔으면 좋겠어)." 송 원장에 따르면 생전 할머니들 가운데는 이런 말을 남기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고국을 방문한 뒤에는 다시 돌아가겠다는 말을 꺼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정작 가족들의 외면을 받았기 때문이다. 미야기현을 방문한 한 할머니는 한국인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형제와 친척들이 만나주지 않아 그리워하던 본가에 가지 못하고 호텔에서 머물러야 했다. 송 원장은 "생활도 어려웠지만 무엇보다 마음의 상처가 컸다"며 "그토록 가고 싶어 하던 고향에 다녀와서는 상처를 받고 오시는 분들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1983년 두세 달간 자원봉사를 하려고 경주에 내려온 송 원장은 이곳에서 43년을 보냈다. 처음 임종을 지켰던 한 할머니가 "남은 이들을 꼭 잘 부탁한다"고 했고,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돌보겠다"고 약속했던 것이 계기였다. 할머니들이 나이를 먹으며 치매와 중풍을 앓고 돌봄 부담도 커졌지만, 송 원장은 마지막 입소자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이제 식민지배와 해방, 전쟁으로 얽힌 한일 양국의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어낸 이들의 공동생활도 막을 내렸다. 그들의 삶을 어떻게 기억하고 기록할 것인가는 여전히 남은 과제다. 삶의 흔적을 보존하는 일마저 민간의 몫으로 남아 있다.

송미호 나자레원 원장이 21일 경북 경주 나자레원에서 할머니들이 생전에 사용하던 물건이 남아 있는 공간을 소개 하고 있다. 2026.10.21. 강진형 기자

식당 한편에는 한 할머니가 모두의 건강을 기원하며 접은 종이학이 남아 있었다. 사이사이에 빨대를 끼워 손수 엮은 천 마리의 종이학은 여러 해의 여름을 지나며 바싹 마른 채였다.

"이제는 손도 못 대겠어요. 건드리면 다 바스러지거든요."

전진영 기자 jintonic@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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