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에도 '서울 공화국'이 있다

황보현 2026. 11. 7.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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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새벽 6시, 부산역 플랫폼에 커다란 캐리어를 끈 청년들이 모인다. 서울역에 내려 다시 열차를 갈아타고 행사장에 도착하면 오전 11시 남짓.

시장이 커질수록 행사는 서울을 중심으로 수도권으로만 빨려 들어가고 있다.

시장 규모가 전년 대비 약 80% 팽창하는 동안 서울의 비중만 홀로 4.39%p 늘었고, 부산(-1.32%p)과 대구(-0.78%p) 등 비수도권의 비중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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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 앞에 놓인 또 하나의 벽 '거리' ... 지방 오타쿠가 마주한 지역 격차

[황보현 기자]

토요일 새벽 6시, 부산역 플랫폼에 커다란 캐리어를 끈 청년들이 모인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간에 첫차를 타는 이들의 목적지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 킨텍스다. 서울역에 내려 다시 열차를 갈아타고 행사장에 도착하면 오전 11시 남짓. 서울에 사는 팬들에게는 GTX-A 노선을 타고 16분이면 닿는 반나절 나들이가, 누군가에게는 새벽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1박 2일의 대장정이 된다.

지난 글에서는 생일카페의 계단이 누군가에게는 넘을 수 없는 벽이 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번에는 그 계단에 닿기도 전에 놓인 벽, '거리'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시장은 커졌지만, 무대는 서울로만 모인다

서브컬처 시장은 해마다 기록을 경신하며 몸집을 불리고 있다. 국내 최대 규모의 애니메이션·게임 축제인 'AGF(Anime X Game Festival)'는 지난해 관람객 10만 명을 돌파한 데 이어, 오는 12월 열리는 'AGF 2026'에는 전년보다 50% 가까이 늘어난 106개 기업이 참가해 역대 최대 규모를 예고했다. 홍대와 잠실, 성수 일대는 매주 새로운 팝업스토어와 생일카페로 북적인다.

하지만 이 화려한 축제의 지도를 조금만 넓혀보면 기묘한 불균형이 드러난다. 시장이 커질수록 행사는 서울을 중심으로 수도권으로만 빨려 들어가고 있다.

팝업스토어 전문 기업 스위트스팟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에서 열린 팝업스토어 3077개 중 87.8%인 약 2700개가 서울 한 곳에 몰렸다. 시장 규모가 전년 대비 약 80% 팽창하는 동안 서울의 비중만 홀로 4.39%p 늘었고, 부산(-1.32%p)과 대구(-0.78%p) 등 비수도권의 비중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큰 행사는 서울에, 지방에는 '지스타 정도'

서브컬처 행사도 크게 다르지 않다. 광주에서 대학을 다니는 20대 게임 유저 박연우씨는 이 쏠림을 일상에서 체감한다.

"큰 행사는 서울에만 열리잖아요. 해봤자 부산에서 열리는 지스타 정도? 전에는 코믹월드도 청주나 다른 지방에서도 열렸었는데, 요즘은 거의 서울에서만 열리니까 행사에 참여하려면 어쩔 수 없이 서울까지 가야 해요."
▲ '원정 덕질'에 나선 지방 팬들의 이동 풍경 고속버스와 열차로 이동하며 좋아하는 캐릭터의 인형과 굿즈를 촬영한 모습
ⓒ 황보현
실제로 대표적인 2차 창작 동인 행사인 '일러스타 페스'는 2023년 첫 개최 이후 올해 10월까지 열린 정규 행사 14회 중 12회를 일산 킨텍스와 서울 세텍 등 수도권에서 열었다. 비수도권 정규 개최는 부산 벡스코 두 번뿐이었다. 그나마 지방 순회를 이어가는 '코믹월드'도 최근 2년간 비수도권 행사는 부산, 울산, 대구 등 영남권과 충북 청주에 그쳤다. 박씨가 사는 호남권과 강원권에서는 두 대형 행사의 정규 회차가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지방에서 행사를 열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러스타 페스는 지난해 10월 전남 순천에서 지자체 축제와 연계한 특별 행사를 열기도 했다. 하지만 박씨가 기억하는 풍경은 수도권 행사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것조차 규모가 너무 작고, 수도권 행사에 비하면 사람이 많이 없었으니까요. 앞으로 지방에서 더 열릴지 모르겠어요."

주최 측 입장에서 보면 참가자가 적을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에서 대관비와 물류비를 감당하며 행사를 열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행사가 열리지 않으면 지역의 팬들이 모일 계기도 사라진다. 사람이 적으니 행사가 열리지 않고, 행사가 열리지 않으니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 지방 서브컬처 행사가 마주한 악순환이다.

굿즈 값보다 먼저 내는 '이동세'

지역에 행사가 열리지 않으니, 결국 발걸음을 옮기는 쪽은 팬들이다. 앞서 부산역 플랫폼에서 첫차를 타던 20대 코스플레이어 이서현(가명)씨는 1년에 네다섯 번씩 이렇게 서울에 올라온다. AGF나 코믹월드 같은 행사가 열릴 때마다 아침 5~6시 기차를 타고 올라와, 1박 2일 일정을 소화하고 다음 날 밤 10~11시가 돼서야 부산 집에 닿는다.
▲  수도권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예매한 이른 아침 고속열차 승차권
ⓒ 쏘가리스튜디오
가장 큰 부담은 역시 비용이다. 코믹월드나 일러스타 페스의 일반 입장권 가격은 7000원에서 1만 원 선이다. 부산이나 광주에서 출발하는 청년들은 이 1만 원짜리 티켓을 쓰기 위해 KTX 왕복 기준운임으로만 8만 4000원(광주송정~용산)에서 10만 8800원(부산~서울)을 먼저 내야 한다. 기차표 값만 입장권의 열 배에 달하는 셈이다. 서울이나 수도권에 사는 팬이라면 지하철 요금 몇천 원으로 끝났을 돈이다.

여기에 숙박비가 더해지면 지출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숙소를 행사장에서 먼 곳에 잡으면 아낄 수 있지 않을까 싶지만, 코스플레이어에게는 그것도 쉽지 않다. 의상과 가발, 소품이 든 짐이 많기 때문이다.

"숙소를 잡으면 짐을 미리 택배로 보내두기도 하는데, 행사 전날까지 준비를 하는 경우가 많아서 큰 캐리어를 끌고 왔다 갔다 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아요. 행사장하고 가까울수록 비싸지만 짐이 많으니 어쩔 수 없이 1박에 20만 원도 감수하고 예약하게 돼요. 남부권에 거주하는 코스플레이어의 숙명이라고 해야 할까요."
▲ 캐리어 위에 또 가방, 상경 길에 오른 코스플레이어의 짐 의상과 가발, 소품 등 부피가 큰 짐이 많아 대형 캐리어와 보조 가방을 함께 끌고 열차와 지하철을 오가야 한다
ⓒ 독자 제공
이씨는 행사를 한 번 다녀오면 코스프레 준비 비용을 빼고도 50만 원 가까이 든다고 했다. 1년에 네다섯 번이면 이동과 숙박에만 줄잡아 120만 원에서 200만 원 안팎이 나간다는 계산이 나온다. 행사장에서 굿즈를 하나 사기도 전에 쓰는 돈이다.
"행사 두 번만 갔다 와도 이동하고 숙박비만 합쳐서 거의 코스프레 하나 준비하는 비용이 나오는 느낌이라 부담이 적지 않아요."

좋아하는 마음은 같지만, 지방에 산다는 이유로 덕질에는 보이지 않는 일종의 '이동세'가 붙는다.

굿즈도, 매장도 서울 바깥에선 귀하다

현장에 가지 못하는 팬들이 기댈 곳은 온라인이다. 동인 행사에 참여한 작가들이 행사 이후 남은 굿즈를 온라인으로 판매하는 '통판(통신판매)'이 대표적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부스를 열어주시는 작가님들이 통판을 해주시니까 행사에 미처 가지 못해도 굿즈를 구할 수는 있는데, 모든 작가님들이 다 통판을 해주시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다 보니 지인한테 부탁해서 대리 구매를 맡길 때도 있고, 아예 못 샀을 때는 번개장터를 뚫어져라 찾아볼 때도 있고요."

그렇다고 통판이 모든 문제를 풀어주지는 못한다. 동인 행사의 통판은 결국 작가 개인의 선의와 여력에 기댄다. 본업이 따로 있는 1인 창작자가 주말 행사를 마친 뒤 재고를 정리하고 포장과 배송까지 혼자 감당하기는 쉽지 않다. 통판이 열리지 않으면 지방 팬들은 지인에게 아쉬운 부탁을 하거나, 웃돈이 붙은 중고 매물을 찾아 헤매야 한다.

상시로 운영되는 오프라인 인프라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박씨는 "애니메이트같이 애니메이션, 게임 굿즈를 파는 오프라인 매장 자체도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며 "생일카페도 그렇고, 그런 걸 보면 많이 부럽다"고 했다. 실제로 국내 애니메이트 매장 4곳 중 3곳이 수도권에 있고, 비수도권 매장은 부산 서면 단 한 곳뿐이다.

극장판 한 편 보기도 어려운 동네

격차는 거창한 행사장이나 전문 매장에만 있지 않다. 가장 일상적인 문화 공간인 영화관에서도 지역에 따른 차이가 드러난다. 애니메이션 극장판은 특정 영화관에서만 단독 개봉하거나 일부 지점에만 특전을 배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전남에 사는 20대 정하영씨는 지난 4일 롯데시네마에서 단독 개봉한 <극장판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 발푸르기스의 회천> 소식을 듣고 한숨부터 쉬었다. 개봉 직후 예매율 1위에 오를 만큼 화제를 모은 작품이었지만, 정씨가 사는 전남에는 롯데시네마 지점이 단 한 곳도 없기 때문이다.

"전남에는 롯데시네마가 없어요. 광주에 가야 그나마 있지. 서울에는 롯데시네마가 많을 거 아니에요."

전국 롯데시네마 지점 132곳 가운데 63곳이 수도권에 있는 반면, 전남에는 지점이 단 한 곳도 없다. 개봉 첫 주 주말 특전을 받을 수 있는 지정 상영관 37곳으로 좁히면 쏠림은 더 심해진다. 수도권이 25곳(67.6%)을 차지했고, 호남권에서는 광주 수완점과 전북 두 곳을 더해 3곳(8.1%)뿐이었다. 전남과 충북, 충남, 경북, 제주에는 특전 상영관이 한 곳도 배정되지 않았다.
▲  서울 광화문을 배경으로 한 〈마도카 마기카〉 극장판의 한국 특별 관람 특전
ⓒ 쏘가리스튜디오
정씨는 이것이 특정 영화나 극장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메가박스에서 어떤 애니메이션 극장판이 열려도 모든 상영관에서 하는 게 아니잖아요. 소비자층이 아무리 이 지역에 적다고 해도 아예 안 열리거나, 겨우 며칠 열리고 금방 내려가는 경우도 흔해요. 서울에서는 아직도 상영 중인데. 이번 영화뿐만 아니라 사실 다 그래요."

"취업은 서울 가까운 곳에서 하고 싶어요"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저 취미 생활일 뿐인데 안 가고 안 사면 그만 아니냐'고, 혹은 '수요가 많은 수도권에 행사가 몰리는 건 당연한 시장 논리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청년들에게 문화, 여가 인프라는 삶의 질과 거주지를 결정짓는 핵심 기준이다. 박씨는 졸업 후 진로를 생각할 때 '덕질 인프라'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고 털어놨다.

"광주에서 학교를 다니다 보니 행사가 있으면 기차를 타고 멀리까지 왔다 갔다 하는데, 나중에 취업을 하면 서울 가까운 곳에서 하고 싶어요. 동인 행사나 이런 서브컬처 행사에 참여하고 싶은 것도 좀 크고요. 사실 인프라 차이가 많이 나잖아요?"

청년이 지역을 떠나는 이유로는 흔히 일자리와 교육이 꼽힌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을 일상에서 누릴 수 있는지도 어디서 살지를 정하는 중요한 조건이 된다. 한국대학신문이 최근 발표한 전국 대학생 1,000명 설문조사에서 비수도권에서 첫 취업을 하더라도 5년 뒤에는 '수도권으로 옮겨 살고 싶다'는 응답이 52.2%에 달했다. 비수도권 취업을 고민할 때 가장 걱정되는 점으로는 '문화·여가생활의 선택 폭이 줄어드는 것'(15.6%)이 초기 정착 비용(17.4%)이나 급여 수준(16.6%)과 불과 1~2%p 차이로 나란히 꼽혔다.

산업연구원이 올해 3월 낸 보고서에서도 비수도권으로 이주했던 수도권 청년 3명 중 1명(34.9%)이 일자리·주거와 함께 문화·여가 접근성의 격차를 이유로 평균 1.6년 만에 수도권으로 돌아온 것으로 나타났다.

주말에 친구와 함께 갈 수 있는 팝업스토어가 없고, 보고 싶은 애니메이션 영화 한 편이 걸리지 않으며, 좋아하는 문화를 한 번 즐기려면 수십만 원의 비용을 '이동세'처럼 내야 하는 일상은 '여기서는 내가 좋아하는 걸 할 수 없다'는 감각을 만든다. 그 감각이 쌓이면 '여기서는 살 수 없다'는 판단이 되기도 한다.

새벽 첫차를 타기 위해 캐리어를 끌고 지방 기차역으로 향하는 오타쿠들의 뒷모습은, 우리 사회에서 문화가 어디에 모이고 청년들이 왜 그곳으로 떠나는지를 보여주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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