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윤의 딴생각] 인간의 잠재력

관리자 2026. 11. 7.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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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어느 고등학교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다. 오후에 잡힌 일정인지라 강연 당일에 올라와도 무리가 없었지만 부러 하루 전에 상경했다.

그 사이사이에는 강연, 마감, 미팅 일정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약속된 강연을 꾸역꾸역 마친 뒤 아빠가 누워 있는 고향으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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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어느 고등학교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다. 오래간만에 서울행 고속버스를 탔다. 오후에 잡힌 일정인지라 강연 당일에 올라와도 무리가 없었지만 부러 하루 전에 상경했다. 시간이 남아돌던 백수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아트박스에 들어가 사지도 않을 편지지를 구경하고 올리브영으로 자리를 옮겨 이런저런 향수 냄새를 맡았다.

그렇게 시간을 마음껏 낭비하다가 마지막으로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렀다. 점찍어두었던 책을 훌훌 넘겨보다가 이내 흥미를 잃었다. 출구 쪽으로 향하던 나의 발걸음이 문구 코너에 진열된 2027년 다이어리 앞에서 멈췄다. 내년이 벌써 코앞으로 다가왔구나. 교보문고에 언제 또 올지 몰라 일찌감치 다이어리를 샀다.

카페에 앉아 새 다이어리를 펼쳤다. 몇 안 되는 친구에게 인심을 잃으면 큰일이니 생일을 미리 표시해두어야 했다. ‘진주 생일이 1월 며칠이더라⋯.’ 커닝을 하려 가방에 든 헌 다이어리를 꺼냈다.

친구들의 생일보다 눈에 먼저 들어온 건 아빠의 투병 기록이었다. 3월 28일 아빠 넘어지면서 머리 부딪힘, 외상성 뇌출혈, 응급실 거쳐 중환자실 입원. 4월 20일 일반병실로 이동. 6월 14일 응급 수술 후 다시 중환자실 들어감. 6월 24일 2차 수술 후 또 중환자실. 6월 30일 일반병실로 이동. 그 사이사이에는 강연, 마감, 미팅 일정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아빠에게 필요한 연고나 기저귀를 사려면 쉴 틈 없이 일해야 했다.

빈칸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다이어리에 숨통이 트이기 시작한 건 시월 무렵이었다. 부축하면 조금씩 걷기도 하고, 기저귀 신세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때를 잘 맞추면 변기에 앉아 볼일을 보기도 하니 이전에 비해 손이 덜 갔다. 반년이 넘도록 아빠의 상태를 살피던 주치의도 재활병원으로 전원하기를 권유했다.

하루라도 빨리 혼자 걸으려면 당장에라도 재활을 받아야 했지만 병실이 날 때까지 대기해야 했다. 그건 나쁘기도 하고 좋기도 한 일이었다. 그 덕에 아빠가 집으로 돌아왔으니 말이다. “아빠, 집에 오니까 기분이 어때?” 나의 질문에 아빠가 집 안을 휘 둘러보며 빙그레 웃었다. “이 호텔, 우리 집이랑 또옥같네!”

어찌됐든간에 아빠에게도 나에게도 잠깐의 여유가 생겼다. 모처럼 주어진 휴식은 꿀보다도 달았다. 문제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일어났다. 꿀단지에 빠져 유유자적 지내다 보니 쓰디쓴 사회생활 근처에 얼씬도 하고 싶지 않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동안 그 많은 일을 어떻게 했지?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몸을 갈아 넣으면서 했지. 나는 지금 몽당연필이야. 여기에서 몸을 조금만 더 움직이면 완전히 사라져버릴지도 몰라. 해야 할 일을 저만치 미뤄둔 채 그동안 부리지 못했던 게으름을 실컷 부렸다. 이런 나와 다르게 마감은 착실히 다가왔다. 해야 되는데, 해야 되는데, 진짜로 해야 되는데. 입이 자꾸만 나불대는 바람에 애꿎은 마음만 불안해졌다.

약속된 강연을 꾸역꾸역 마친 뒤 아빠가 누워 있는 고향으로 내려왔다. 해야 되는데, 해야 되는데, 이제는 진짜로 일해야 되는데, 되뇌면서 아빠에게 먹일 케이크를 주문하고 방문 재활을 예약했다. 아빠는 달콤한 케이크는 마다하지 않고 받아먹으면서도 재활치료사의 지시는 거부했다. “아빠, 하기 싫어도 해야지.” 아무리 어르고 달래보아도 선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아빠가 별안간 “소변, 소변!” 하고 다급하게 외치더니만 화장실 쪽으로 3m가량을, 그것도 혼자서 뛰어갔다. 사람이 절박한 상황에 놓이면 못 해낼 일이 없구나! 떡 벌어진 입이 한동안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 사건을 계기로 아빠는 재활치료에 응하기 시작했다. “으으, 안 했으면 좋겠어!” 하면서도 당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나는 멀찌감치 떨어진 식탁 의자에 앉아 그런 아빠를 바라보았다. 아빠에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틈을 이용해 조금이라도 일을 해야 했지만 좀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 자신을 닦달하지는 않았다. 그래봤자 마음만 괴로울 뿐 별다른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그동안의 경험으로 습득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게으름을 부린다는 오해는 금물이다. 이래봬도 발등에 불이 떨어지기를 끈기 있게 기다리는 중이다. “마감, 마감!” 하는 소리가 튀어나올 때가 되면 잠재력이 알아서 발휘되지 않겠는가.

이주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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