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묵은 대홍포, 그 맛이 뜻밖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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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일상 속, 차 한 잔으로 일상에 쉼표를 찍습니다. 차 한 잔을 마시며 24절기와 동양화를 오가며 흐르는 시간의 아름다움을 기록합니다.
깊고 붉은빛을 띠도록 묵힌 차는 값이 세 배나 되고, 집집마다 해를 넘겨 묵힌 차를 자랑한다네요.
대홍포 특유의 풍미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호두파이를 만나면서 그 맛의 윤곽이 한결 둥글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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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일상 속, 차 한 잔으로 일상에 쉼표를 찍습니다. 차 한 잔을 마시며 24절기와 동양화를 오가며 흐르는 시간의 아름다움을 기록합니다. <기자말>
[노시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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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년이나 지난 암차가 나에게도 있었다니! 까마득히 잊고 있던 비상금을 오래도록 읽지 않았던 책에서 발견한 것마냥 반갑다. |
| ⓒ 노시은 |
7일은 입동(立冬)입니다. 24절기 가운데 열아홉 번째인 입동은 말 그대로 겨울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매년 양력 11월 7~8일 무렵으로, 상강과 소설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옛사람들은 겨울을 폐장(閉藏)의 계절이라고 불렀습니다. 문을 닫고 갈무리한다는 뜻입니다. 봄에 싹을 틔우고 여름에 무성하게 자라 가을에 결실을 맺은 생명들이, 이제는 밖으로 뻗어나가는 일을 멈추고 제 안으로 기운을 거두어들이는 것이죠.
<월령칠십이후집해(月令七十二候集解)>에도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冬,終也,萬物收藏也."
겨울은 끝남을 뜻하니, 만물이 거두어져 저장되는 때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조상들에게도 입동은 겨울 채비를 시작하는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김장입니다. 냉장고도, 사시사철 싱싱한 채소를 구할 수 있는 대형마트도 없던 시절, 겨우내 먹을 김치를 장만하는 일은 한 해 농사만큼이나 중요했겠지요.
입동 무렵에는 햇곡식으로 시루떡을 쪄서 고사를 지내는 풍습도 있었습니다. 곳간과 외양간 등에 떡을 올리고, 농사일에 애쓴 소에게도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사람뿐 아니라 소의 노고까지 챙겼다니, 흐뭇해지네요.
중국에서는 이 무렵 '입동보동(立冬補冬)'이라 하여 한 해 농사로 지친 몸을 보양하는 풍습이 이어져 왔습니다.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으며 다가올 추위에 대비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차를 좋아하는 사람은 무엇을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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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년이나 지났으니 둥글어졌을 것이 분명하다는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
| ⓒ 노시은 |
무이산의 가파른 절벽과 깊은 골짜기, 바위틈을 따라 조성된 차밭은 다른 산지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풍경입니다. 그중에서도 오래 묵힌 암차를 진년암차(陳年巖茶)라고 부릅니다. 무이산 일대에는 이런 말이 전해진다고 합니다.
'삼 년 묵힌 차는 약이 되고, 오 년 묵힌 차는 영약이 되며, 십 년 이상 묵힌 차는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이 된다.'
물론 오래 묵혔다고 차가 실제 약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모든 차가 시간이 지날수록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요. 애초에 좋은 찻잎을 제대로 만들고 적절한 환경에서 보관했을 때 비로소 기대해 볼 수 있는 변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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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암차는 자사호에 우려서 흑유잔에 우려 마실 때 진짜 맛있다!!!! 신비한 흑유잔의 문양 |
| ⓒ 노시은 |
배화가 강한 암차는 갓 만들어졌을 때 불에 구운 듯한 향이 두드러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른바 화기(火氣)가 누그러지고, 그 뒤에 숨어 있던 다양한 풍미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청나라의 문인 주량공(周亮工)은 <민차곡(閩茶曲)>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雨前雖好但嫌新,火氣難除莫近唇."
곡우 전에 딴 차가 좋다지만 너무 새것이라 아쉽고, 화기가 쉽게 가시지 않으니 입술 가까이 대기도 어렵다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은 더욱 재미있습니다.
"藏得深紅三倍價,家家賣弄隔年陳."
깊고 붉은빛을 띠도록 묵힌 차는 값이 세 배나 되고, 집집마다 해를 넘겨 묵힌 차를 자랑한다네요. 당시에도 갓 만든 차보다 화기가 가라앉은 묵은 차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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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를 마실 때 가장 설레는 순간은 어쩌면 차도 티푸드도 맛보기 직전인지도 모른다 |
| ⓒ 노시은 |
20년이나 묵혔으니 대홍포 특유의 맛도 많이 누그러졌으리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 존재감이 또렷합니다. 오래되었다고 흐릿해진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대홍포라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특유의 풍미가 살아 있습니다.
문득 궁금해집니다. 20년 동안 무엇을 잃고, 또 무엇을 얻었을까요. 차의 숙성이란 단순히 시간이 오래 흐른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잘 만든 차를 적절한 환경에서 보관했을 때 비로소 좋은 변화를 기대할 수 있죠. 반대로 보관 상태가 나쁘면 세월이 오히려 차의 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행히 오늘의 대홍포는 그 긴 세월을 제법 훌륭하게 건너온 모양입니다.
곁들임은 가운데 피칸이 하나 박혀 있는 작은 호두파이입니다. 중국의 전통 양생에서는 겨울에 신장(腎)의 기운을 돌보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때 말하는 신장은 현대 의학의 신장과는 다른 개념으로, 몸의 근본적인 생명력을 관장한다고 여긴 기능 체계입니다.
호두는 전통적으로 몸을 따뜻하게 하고 신장을 보하는 식재료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입동의 다식으로도 제법 잘 어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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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두파이와 20년 묵은 대홍포는 제법 잘 어울렸기에 호두파이는 차와 함께 나의 위장에 빼곡히 저장되었다 |
| ⓒ 노시은 |
신기합니다. 차만 마셨을 때와는 전혀 다른 인상입니다. 대홍포 특유의 풍미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호두파이를 만나면서 그 맛의 윤곽이 한결 둥글어진 것입니다. 배화한 차와 구운 견과류가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이야. 특히 진년 대홍포의 깊은 맛과 파이의 고소하고 달콤한 풍미가 서로를 살려주는 느낌입니다.
다시 차를 우립니다. 올해로 20년을 맞은 대홍포는 여전히 제법 힘 있게 자신의 맛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호두파이 한 조각을 곁들이면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줍니다. 겨울이란 모든 것이 멈추는 계절 같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여전히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모양입니다. 찻장에 잠들어 있던 대홍포가 스무 해의 20년을 건너 오늘 제게 새로운 맛을 보여준 것처럼요.
입동의 '동(冬)'에는 끝남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끝이라는 말이 꼭 사라진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잘 거두어 간직한 것은 언젠가 다시 꺼내어 즐길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 올겨울에는 찻장 속에 잠들어 있는 차들을 조금 더 자주 꺼내봐야겠습니다. 물론, 남은 호두파이는 다 먹을 생각입니다. 제 위장은 디저트라면 없던 자리도 만들어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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