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극우에 날린 일격, 신숙옥의 '영원한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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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경화하는 현재 일본 사회의 병폐와 과거의 제국주의 원죄를 고발하기 위한 '사법 투쟁'은 적지 않게 영화화되는 중이다.
어머니가 일본 이름으로 개명하며 인생 처음 해방을 맛본 것의 역으로 '신숙옥' 세 글자 지킬 때 '나'로서 온전히 설 수 있다는 결단인 것.
일본 사회에서 정체성을 잃지 않고 그 일원으로 존재하기 위해 '영원한 투쟁'을 벌여야 하는 존재로서 주인공은 '재일 코리안'이란 개념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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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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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루몽> 스틸 |
| ⓒ 엣나인필름 |
2017년 Tokyo MX 지상파 방송 프로그램 <뉴스 여자>는 시사 토론을 빌미로 특정 사회 운동가에 대한 가짜 뉴스를 유포한다. 지목된 당사자는 참을 수 없어 법정 투쟁을 시작한다. 그녀는 재일 코리안 3세 신숙옥. 오키나와 미군 기지 확대에 저항하는 싸움에 적극 연대하는 활동을 비꼬고 조롱하는 혐한 미디어와 기나긴 투쟁의 출발이다. 방송이 의도한 건 소수자 활동가를 향한 현대판 '마녀사냥'이다. 움츠러들면 혐오는 더 기세등등해진다. 피할 수 없는 전투다.
극우화하는 일본 사회에 통쾌한 일격을 날리는 장렬한 연대기
법정 투쟁은 6년간 계속된다. 지방법원에서 고등법원, 대법원 확정판결까지 기나긴 대결이다. 우경화가 심화된 21세기 일본 사회 분위기에서 재판 과정은 단순한 법리 논쟁에 그치지 않는다. 애초 극우 세력은 사냥감으로 신숙옥을 조준하고 반발까지 예측하며 덫을 쳐둔 상태다. 정식 재판을 청구하며 사회적 화제가 되자 자연스럽게 당사자 신상이 노출되고 온라인, 오프라인 가리지 않고 전방위 압박이 개시된다. 살해 협박, 신상 털기는 본인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미 소수자로 사회적 차별과 배제를 겪던 사회 운동 활동가에게 이는 그저 참고 견디라는 위로로 해소될 수 없는 차원의 위협이다. 압력은 시시각각 주변을 조인다. 자택 주변에 낯선 자들이 얼씬거린다. 벨을 눌러 나가보니 아무도 없다. 전자메일로 지저분한 메시지 홍수는 일상이다. 세상이 워낙 험악하니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도 없다. 해외로 잠시 피신해보지만, 이건 해결책이 아님을 깨닫고 귀국한다. 차별주의자들에 굴복할 순 없다. 맞서 싸워야만 한다.
그렇게 저들이 바라듯 움츠러들기보단 반격과 공세로 오히려 허를 찔러야 한다는 결단을 내린 신숙옥은 두려움에 굴복하길 거부한 채 더 맹렬히 활동에 나선다. 지진 등 천재지변이 터지면 늘 취약할 수밖에 없는 소수자와 연대하는 활동에 매진한다. 주류 사회가 떠넘긴 미군 기지 확장에 신음 하는 일본 내 또 다른 소수자 집단 지원에 힘쓴다. 공개석상에서 마이크를 잡는다. 어디든 요청하면 달려가 강연과 교육 활동에도 애쓴다. '피해자다움'을 떨치려는 분투다.
고단한 재판 과정이 진행된다. 촬영이 불가하기에 현장 녹취로만 검은 화면에 전해지는 법정 진술이 오히려 더 강렬한 체험으로 관객에게 전해진다. 2021년 1심에서 원고 주장을 상당 부분 인용한 승소 판결을 내린다. 신숙옥에게 적지 않은 명예훼손 위자료를 지급하고 정정 광고를 방송에 내보내라는 결정. 방송국은 사죄 의사를 표하지만, 프로그램 제작사인 DHC TV는 항소를 거듭한다. 2022년 2심, 2023년 대법원판결까지 투쟁은 계속된다. 반격의 전환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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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루몽> 스틸 |
| ⓒ 엣나인필름 |
신숙옥은 왜 고난의 길을 굳이 걷는 걸까? 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저렇게 단호하고 질기게 싸울 수 있는지 관객은 궁금해진다. 감독은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한다. 재일 코리안 100년의 역사가 개방될 시간이다. 마치 현대판 '영웅전설' 기원이라 해야 옳을까? 21세기 한국인은 잊어버린 한민족 고난의 세월이 먼지를 털고 부활을 준비한다.
주인공을 해설하기 위한 통과의례로만 상상한 과거사는 어느새 장구한 역사 어드벤처로 향한다. 그 출발은 재일 코리안 1세대 '이백란'에서 비롯한다. 신숙옥의 외할머니로 가난 때문에 일본에 이주한 이다. 아직 '에도'란 지명이 더 익숙하던 도쿄 신주쿠에 정착한 그녀는 일자무식 문맹에 생계를 위해 평생 고된 노동에 내몰리면서도 주변 조선인 지원은 물론, 일제 치하 정치범을 돕는 활동에 힘썼다고 한다. 저항과 연대의 기풍을 손녀가 제대로 물려받은 셈.
이야기는 2세대 '케이코'로 향한다. 주인공의 어머니다. 한 인간으로 미래의 꿈을 꿨으나 가난한 형편 탓에 접고 결혼해 신숙옥을 낳았지만, 같은 처지의 남편이 사회적 차별에 끝내 무력하게 주저앉으며 평생 가족 부양에 시달려야 했다. 무능한 남편 뒷바라지에 거듭된 빈곤은 통 웃지 않는 인상으로 딸에게 기억된다. 이렇게 살 수 없다며 한국 귀환을 시도했지만, 또 다른 차별을 확인하며 좌절당한다. 물려받은 이름을 버리고 귀화하며 비로소 해방될 수 있었다.
그렇게 재일 코리안 3세 신숙옥이 탄생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굴곡진 삶은 주인공이 물려받은 업보다. 일본 제국은 그녀의 선조를 '일본인'으로 강제했고, 패망 전후 일본은 이젠 '일본인'이 아니라며 떠밀었다. 3대에 걸친 여성 수난사는 제국주의와 뗄 수 없다. 하지만 반성과 사죄를 어물쩍 묻어간 현대 일본은 역사의 교훈을 외면한 채 다시금 자신들이 저지른 원죄 청산은커녕 부활하려 획책한다. 단순 개인 문제가 아니라 곧 '역사 바로 세우기' 투쟁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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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루몽> 스틸 |
| ⓒ 엣나인필름 |
굳은 의지는 흔히 생각하듯 민족의 혼 같은 게 아니다. 결정권은 없었지만, 자기 정체성으로 굳어진 이름을 갖고 뭐라는 건 주체적 존엄성에 대한 무례다. 어머니가 일본 이름으로 개명하며 인생 처음 해방을 맛본 것의 역으로 '신숙옥' 세 글자 지킬 때 '나'로서 온전히 설 수 있다는 결단인 것. 쉬운 선택이 아니다. 도망갈 길이 있음에도 존엄을 걸고 배수진의 각오로 거대한 체제에 맞서는 전사의 탄생인 것.
이게 얼마나 엄청난 용기인지 이제 살필 시간이다. 화면엔 신숙옥이 어릴 적부터 지금껏 겪어온 생생한 '차별' 체험담이 파도처럼 몰아친다. 어릴 적 겪은 그녀만의 '세례' 순간부터 학교를 졸업해도 취업할 수 없던 진입 장벽, 성공한 사업가로 자리를 잡나 싶더니 사회 운동가로 기득권에 맞서는 순간 봉착한 난관까지 그야말로 일상에서 숨쉬기조차 힘겨운 온갖 차별 사례가 쏟아진다. 거창한 민족 수난사보다 개인의 기억에 각인된 일화가 더 진한 흔적을 남긴다.
세 번째는 '태생'과 '국적'. 다수 재일 조선인이 현실적 문제로 '조선적'을 포기하고 일본으로 귀화하는 선택을 내렸다. 3세, 4세로 갈수록 어쩔 수 없는 흐름이다. 애초 '조선적'이 탄생한 배경 이해가 중요하다. 해방 직후 분단이 가시화하며 귀환이 난망한 가운데 힘겹게 마련한 생활 기반을 포기할 수도 없어 임시방편으로 택한 실체 없는 국적은 애물단지다. 하지만 귀화는 피해자에게 망각을 강요하는 압력이다. 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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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루몽> 스틸 |
| ⓒ 엣나인필름 |
주인공의 가족 역시 고단한 생활에 지쳐 북송을 택했다. 심지어 신숙옥조차 고심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은 북송선에 올랐다. 하지만 해방된 조국은 낙원과는 거리가 멀었고 돌아간 친척들은 또 다른 이산가족으로 몸과 마음의 짐이 되고 말았다. 그 참담한 가족력을 술회하는 대목은 단지 일본뿐 아니라 불완전한 상태의 남과 북 '조국' 현실 역시 재일 조선인에게 상처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는 감추고픈 진실에 닿는다. 쉽게 꺼낼 수 없는 화두다.
일본을 떠나 머물던 독일에서 신숙옥은 개인 혹은 민족에 한정할 수 없는 제국주의와 파시즘의 상흔을 목격한다. 홀로코스트와 제노사이드 문제는 세계관을 확장하고 시야를 넓히며 왜 극우에 맞서야 하는지 확신을 견인한다. 일찍이 일제의 인종전시박람회에서 열등 집단으로 조선인-아이누-오키나와 주민이 동물원 원숭이 취급 받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고 더 질 나쁜 형태로 부활하려 한다. '삼국인' 논란부터 관동대학살 부정까지 다 21세기에 벌어진 사건이다.
재일 조선인이 겪은 수난과 눈물은 역사적 실체로 오늘의 신숙옥을 탄생하게 이끌었다. 하지만 과거에서 계승된 것에만 갇히기엔 21세기를 사는 '신숙옥(들)'의 꿈은 너무나 다양하고 원대하다. 일본 사회에서 정체성을 잃지 않고 그 일원으로 존재하기 위해 '영원한 투쟁'을 벌여야 하는 존재로서 주인공은 '재일 코리안'이란 개념화한다. 과거를 잊지 않되 얽매이지도 않겠다는 선언. 소수자와 연대하며 극우 책동에 전면적으로 맞서는 싸움은 피할 수 없다는 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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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루몽> 스틸 |
| ⓒ 엣나인필름 |
호루몽
HOROOMON
2025 한국 스타일리시 논픽션 무비
2026.11.11. 개봉 100분 15세 관람가
감독 이일하
주연 신숙옥, 케이코, 이백란
제작 익스포스필름
배급 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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