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 스코프] AI가 설계하고 한국은 제조만?…서울대 교수의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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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세계적인 제조업 강국이다.
한정우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는 한국 제조업의 강점을 인정하면서도 기술을 구상하고 설계하는 역량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교수는 지난달 30일 부산 벡스코에서 '한국공업화학회 2026년도 추계학술대회' 폐막 후 기자와 만나 "기술을 설계하는 역할을 미국이 맡는다면, 우리는 결국 제조만 담당하게 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한 교수는 기업들이 AI 활용의 필요성을 인식하면서도 데이터 보안 문제로 적극적인 도입을 주저하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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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촉매 탐색 가속에도 산업화는 과제…불황에 혁신 여력 부족

한국은 세계적인 제조업 강국이다. 반도체와 배터리, 석유화학 등에서 축적한 생산 기술은 국가 경쟁력의 핵심이다. 그러나 인공지능(AI)이 새로운 소재를 설계하는 시대에도 제조 능력만으로 세계 시장을 주도할 수 있을까.
한정우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는 한국 제조업의 강점을 인정하면서도 기술을 구상하고 설계하는 역량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교수는 지난달 30일 부산 벡스코에서 '한국공업화학회 2026년도 추계학술대회' 폐막 후 기자와 만나 "기술을 설계하는 역할을 미국이 맡는다면, 우리는 결국 제조만 담당하게 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새로운 기술과 제품의 개념을 정립하는 역할을 다른 나라가 주도한다면 한국의 제조 경쟁력도 제한될 수 있다는 것이다. AI 기반 소재 설계 능력과 기존 제조 역량을 결합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AI가 바꾸는 소재 개발…13일 만에 촉매 탐색 체계 구축
한 교수는 촉매와 소재의 구조 및 성능을 컴퓨터로 예측하는 계산과학 분야를 연구해 왔다. 최근에는 거대언어모델(LLM)과 AI를 활용해 새로운 촉매 후보를 탐색하고 있다. 연구자의 경험과 직관에 의존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AI가 유망한 물질을 제안하고 필요한 계산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한 교수 연구팀은 약 13일 만에 AI와 거대언어모델(LLM)을 연계한 촉매 탐색 체계를 구축했다. 이 체계를 활용하면 몇 시간 안에 촉매 후보물질을 탐색하고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다만 이는 컴퓨터를 이용한 예측 단계로, 실제 촉매를 합성하고 성능을 검증하는 과정은 별도로 필요하다.

개별 계산에 걸리는 시간도 크게 단축됐다. 한 교수는 "과거에는 계산 하나를 수행해 결과를 얻는 데 5일 이상 걸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몇 초 만에 가능한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이는 계산 기술의 발전을 보여주는 사례로, 촉매 개발 전체 과정이 그만큼 빨라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새로운 촉매를 개발하려면 후보 물질을 합성하고 성능을 측정해야 한다. AI의 장점은 실험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유망한 후보를 찾는 과정을 효율화하는 데 있다.
연구실에서 우수한 성능을 확인했다고 곧바로 산업 현장에 투입할 수도 없다. 연료전지에 활용하려면 셀과 스택을 제작해야 하고, 석유화학 공정에 적용하려면 대형 반응기 설계도 필요하다.
한 교수는 "연구실 규모에서 성능을 확인한 뒤에는 실제 산업에 적용하기 위한 규모 확대 과정이 필요하다"며 연구팀의 현재 연구는 소재 개발 단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AI의 탐색 속도와 실제 산업화 속도 사이에는 여전히 간격이 있다.

"설계는 미국, 제조는 한국"…제조 강국의 다음 과제
한 교수는 미국 빅테크 기업들의 소재 연구 진출에 주목했다. 메타는 AI 기반 원자·소재 시뮬레이션 프로젝트 '페어켐(FAIR-Chem)'을 통해 촉매와 소재의 특성을 예측하는 모델을 개발하고 있다. 구글 딥마인드와 마이크로소프트도 AI를 활용한 신소재 탐색과 설계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엔비디아 역시 관련 기술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
한 교수는 이들 기업이 소재와 화학 분야를 미래의 사업 기회로 바라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AI 기술과 대규모 데이터, 컴퓨팅 인프라를 갖춘 기업들이 새로운 물질의 설계 단계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이 가진 제조 기술에 AI 기반 설계 역량을 결합한다면 새로운 소재의 개발부터 생산까지 주도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국내 연구 환경에는 제약이 적지 않다. 한 교수는 그래픽처리장치(GPU) 확보 문제와 해외 LLM 의존도를 주요 병목으로 지적했다.
그는 "연구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병목 가운데 하나는 GPU"라며 국내 연구자들이 필요한 장비를 충분히 확보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해외 기업의 LLM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해당 모델에 대한 의존도도 높아지고 있다고 했다.

기술은 발전했지만 기업은 불황…혁신 가로막는 현실
AI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지만 국내 산업계가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석유화학 업계의 장기 불황이 새로운 기술에 대한 투자 여력을 제한하고 있다는 것이 한 교수의 진단이다.
한 교수는 "화학 산업이 너무 어려워 새로운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 보인다"며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코로나19 이전에도 기업들과 소재 설계 및 시뮬레이션 분야에서 협력했다. 당시보다 AI 기술은 훨씬 발전했지만 기업들이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기에는 경영 여건이 녹록지 않다는 설명이다. 한 교수는 기업의 소극적인 태도를 비판하기보다 산업계가 처한 현실을 이해해야 한다고 봤다.
데이터 보안도 걸림돌이다. 반도체와 배터리, 화학 기업들은 AI를 소재 개발에 활용하려 하지만 핵심 기술과 연구 데이터의 외부 유출을 우려한다. 기업 간 데이터 공유도 쉽지 않다.
한 교수는 기업들이 AI 활용의 필요성을 인식하면서도 데이터 보안 문제로 적극적인 도입을 주저하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자체 데이터가 충분한 대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 사이의 격차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대학과 연구기관 역시 데이터 공유에 어려움을 겪는다. 소재 연구는 실험 조건과 측정 방식에 따라 데이터 형태가 달라 AI 학습에 활용하려면 표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데이터 정리는 연구자에게 추가적인 부담이다. 한 교수는 자신의 연구실에서도 실험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공유하기가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한 교수는 AI가 물질을 제안하고 로봇이 실험을 수행하는 자율실험실에도 주목했다. AI의 예측과 로봇 실험, 결과 분석을 연결하는 방식이다. 다만 고가의 장비와 공간이 필요한 만큼 정부출연연구기관이나 대학에 여러 연구자가 공동 활용할 수 있는 시설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AI 시대에도 중요한 것은 사람…연구의 출발점은 '문제 정의'
AI가 계산하고 새로운 물질까지 제안하는 시대에 과학자의 역할은 어떻게 달라질까. 한 교수는 빠른 기술 발전 자체가 연구자에게 새로운 어려움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6개월 전과 지금이 너무 다르고, 1년 전과는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달라졌다"고 말했다. 몇 달 동안 개발한 알고리즘이 새로운 LLM의 등장으로 의미를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AI 시대에 과학자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은 무엇일까. 한 교수의 대답은 "문제 정의"였다. 그는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야 AI가 풀 수 있다. AI가 문제를 정의해 주지는 못한다"며 "문제를 정의하려면 공부를 많이 하고 해당 분야의 과학적 지식을 충분히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AI가 계산을 대신하더라도 무엇을 연구할지 판단하는 능력은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연구자 사이의 교류도 강조했다. 학술대회에서 나누는 대화가 새로운 공동연구의 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수들이 학술대회에서 식사하고 교류하는 모습을 보고 연구와 무관한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식사 자리에서도 연구 이야기가 이어진다고 했다.
그는 "먹으면서 하는 이야기가 결국 다 연구예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게 연구밖에 없거든요"라고 했다. 한 교수에게 학술대회는 정보를 얻고 연구자 사이에 신뢰를 쌓는 공간이다. 다른 연구자들의 생각을 듣고 학문 분야의 흐름을 파악하면서 앞으로의 연구 방향을 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이 분야에서 일하는 다른 학교의 모든 교수님을 제 직장 동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소속이 달라도 비슷한 문제를 고민하며 협력하는 관계라는 설명이다.
그는 학술대회에 참석하는 이유에 대해 "그 분야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고, 잠시 떨어져서 우리가 어떻게 가야 하는지 생각해 볼 기회가 많이 된다"고 말했다.
■ 한정우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는
2002년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를 졸업하고 2007년 미국 카네기멜런대에서 화학공학 석사, 2010년 조지아공대에서 화학생물분자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박사후연구원을 지냈으며, 서울시립대와 포항공대 교수를 거쳐 2023년 서울대에 부임했다. 계산과학과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촉매·에너지 소재 설계가 주요 연구 분야다. 2022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이달의 과학기술인상'과 2024년 한국공업화학회 '베스트페이퍼상(Best Paper Award)'을 수상했다. 최근에는 스위스 취리히연방공과대학(ETH Zurich)과 공동으로 AI 시뮬레이션과 실험을 연계한 가스센서 소재 설계 전략 '트윈 루프(Twin-loop)'를 제시했다. 관련 전망 논문은 2026년 9월 국제학술지 '네이처 센서스(Nature Sensors)'에 게재됐다.
부산=김종화 기자 justi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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