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욱의 가장자리 읽기] 우리는 아무 이유 없이 존재한다

2026. 11. 5.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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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욱 서강대 철학과 교수

나는 왜 존재하는가? 혹시 신은 어떤 심오한 사명을 수행하게 하려고 나를 필연적으로 창조한 게 아닐까? 사람은 살면서 이런 질문을 한 번쯤 던져 본다.

옛 사상가들은 우리가 존재하는 어떤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는 것을 설명하려 노력했다. 가령 17세기 철학자 라이프니츠가 내놓은 ‘충족이유율’이 그것이다. 이는 ‘충분한 근거 없이는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다는 원리’이다. 어떤 것은 왜 꼭 이렇게 존재해야 하고, 없으면 안 되는가를 해명하기 위한 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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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니츠의 존재 필연 주장
1차대전 파국과 함께 무너져
신은 없고 우연만 가득한 세상
인간만이 인간을 구할 수 있어
」

김지윤 기자

왜 이 세계는 꼭 이렇게 존재해야 하나? 왜 나는 꼭 이런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고 다르게는 안 되는가? 이런 질문들이 노리는 ‘존재의 필연성’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까? 라이프니츠는 이에 대한 답을 신에게서 얻으려 한다. 신은 가능한 모든 세계 가운데 가장 완전한 세계를 원했고 그래서 가장 완전한 세계인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을 괴롭히는 현세의 도덕적 악이나 자연재해 같은 것도 완전한 세계를 위한 필연적 요소가 된다.

이런 주장은 곧 사람들에게 의심받는다. 왜냐하면 신이 가장 완전하게 창조한 이 필연적인 세계 안에는 완전성을 의심케 하는 너무도 많은 결함과 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를 폭로하는 유명한 작품이 바로 18세기 볼테르의 소설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이다. 이 소설에는 라이프니츠의 학설을 신봉하는 철학자 팡글로스가 나오는데, 그는 온갖 불합리한 일들 때문에 한평생 고통받고도 이 세계가 라이프니츠가 말한 가장 완전한 최선의 세계라고 믿는다. 희화된 라이프니츠라고 해도 좋을 이 인물에게 주인공 캉디드가 반박하듯 묻는다. “선생님은 교수형을 당하고 칼로 몸을 해부당하고 매타작을 당하고 갤리선에서 노까지 저으셨습니다. 그래도 아직까지 이 세상 모든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십니까?”(이봉지 역) 팡글로스는 대답한다. “내 생각은 항상 처음과 같아 (…) 라이프니츠는 결코 틀릴 수 없어.”

신을 변호하는 변신론의 실패
이 세계가 선한 신이 창조한 최선의 필연적인 세계라는 사상은 당연히 무너져 나간다. 내가 세계에서 목격하는 것은 결함과 우연성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나 자신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신이 완전한 세계의 필연적인 구성 요소로서 창조한 피조물이 아니라, 존재의 이유 없이 ‘그저 있는 자’일 뿐이다. 철학이 세상의 악, 결함, 우연성으로부터 신을 변호하려는 계획, 변신론(辯神論)은 실패했다.

이러한 인식은 20세기가 벽두부터 겪은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초유의 거대한 파국과 함께 깊어진다. 이 세계가 결코 최선도, 완전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전쟁만큼 경험적으로 잘 알려주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정황에 최초로 민감하게 반응한 사람 가운데 하나는 『특성 없는 남자』의 저자 로베르트 무질이다. 그는 1차대전을 겪은 후 이 소설을 썼는데, 소설 자체의 배경은 1차대전 직전의 오스트리아, 몽상 속에 전쟁을 일으키고 또 패전한 국가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울리히는 노골적으로 라이프니츠와 정반대되는 원리를 내세운다. ‘충족이유율’ 반대편의 ‘불충분한 근거 원리’ 말이다. “불충분한 근거의 원리죠! (…) 우리의 실제 삶에서는, 다시 말해, 우리의 개인적인 삶과 우리의 공적, 역사적 삶에서는 사실 올바른 근거가 없는 일이 항상 일어나지요.”(신지영 역) 사람들은 신에게 또는 라이프니츠에게 속은 것이다. “심지어 속았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하필 지금과 같이 된 데 대한 충분한 근거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으니까. 달리 될 수도 있었다 (…) 사방으로 가능성과 무(無)로 가득 차 있었다.”

한마디로 모든 존재의 바탕에는 필연적인 이유로서 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가 있다. 존재의 근거라곤 아무것도 없다.

존재의 바탕에 무가 있다는 이런 생각이 바로 무질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철학자 하이데거 사상의 핵심을 이룬다. 우리는 이유 없이 그저 존재 속에 던져져 있을 뿐이다. 우리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라이프니츠가 설명하려 했던 존재의 필연적 근거는 사라지고, 이제 ‘우연성’만이 남는다.

신을 대신하는 인간 사랑의 원리
이후 이런 존재의 우연성에 대한 사색에 몰두한 유명한 작품이 사르트르가 1938년에 낸 『구토』이다. 한 구절 읽어 보자. “본질적인 것, 그것은 우연성이다. 원래, 존재는 필연이 아니란 말이다.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거기 있다’는 것이다 (…) 내가 생각하기에 그 사실을 이해한 사람들은 있었다. 다만 그들은 (…) 필연적인 하나의 존재를 발명함으로써, 이 우연성을 극복하려고 애썼던 것이다.”(김희영 역) 필연적인 하나의 존재, 바로 신을 발명하여 우리 존재의 우연성을 극복하려던 자 가운데 하나가 라이프니츠다. 이는 부질없는 일이었다. 전쟁이 되었건 기근이 되었건 사회의 혼란이 되었건, 사람들은 삶의 이 모든 비극적 경험을 통해 존재한다는 것에는 아무런 필연적 원리가 없고 그저 혼돈과 우연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21세기에 와서도 철학자들은 존재에는 필연적 이유가 없고 우연성만이 있다는 사상을 공들여 다듬고 있는데, 가령 메이야수가 그렇다.

그런데 중요한 다른 길이 열려 있다. 신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존재함의 근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인간들 사이에서 위대한 일이 일어난다. 인간은 또 다른 존재를 떠받치는 원리가 될 수 있다. 인간은 동물이나 자연이나 타인을 돌보는 ‘사랑의 원리’가 될 수 있다. “너는 사랑 속에서 보호받고 존재하는 거야”라고 말하며 다른 존재의 근거가 되어줄 수 있다. 인간은 다른 존재를 ‘떠받치는 자’이다.

서동욱 서강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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