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혜의 마음 읽기] 자신을 덜 주장하는 글

2026. 11. 4.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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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혜 글항아리 대표

시인 Y는 메일을 보낼 때 돋움체에 글자 크기 9포인트를 쓴다. 지난 몇 년간 내가 메일을 가장 많이 주고받은 사람인데, A4 용지 한두장 분량의 긴 글은 작은 글씨로 인해 더 섬세하고 조심스럽다. 작은 글자들은 자신을 덜 주장한다. 또 글자가 축소되면서 생기는 여백은 그 문장이 조용해 보이게 만들며, 읽는 이는 그 안으로 좀 더 쉽게 들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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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체와 행간은 독서에 영향 끼쳐
고딕체·밑줄은 사유의 자유 간섭
작은 글자의 글이 몰입에 도움
」

김지윤 기자

역사학자 K는 책 기획을 논하는 첫 만남에서 미감과 외래어표기법을 강조했다. 교정·교열과 마케팅이 주요 안건일 줄 알았던 내 예상은 빗나갔다. 미감은 여러 단서로 추측될 수 있는데, 그가 보내온 한글 파일의 서체와 행간이 하나의 힌트를 준다. 글꼴은 나눔명조, 행간은 200%. 나는 그 서체와 줄 간격이 아름답다고 느끼면서도 왜 이런 조판을 선호하는지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그래야만 읽힌다”는 것이었다. 자음과 모음이 비교적 안정된 구조로 결합된 서체, 낱글자의 개성이 튀기보다 문단 전체가 균질한 인상을 띠는 것, 거기서 고유의 리듬감이 발생한다. 그 활자 형태들의 정확성은 그가 써내려가는 글에 직접 관여하는 듯 보인다.

작가는 글을 쓰면서 형식에 개입할 기회를 갖는다. 니체가 『즐거운 학문』에서 “자신의 성격에 맞는 ‘양식(樣式)을 부여하는 것’은 위대하고 희귀한 예술이다”라고 말했듯이, 쓰는 이들은 그러한 구속력과 완성 안에서 세밀한 기쁨을 누린다.

독자로서 나는 굵은 고딕체와 밑줄을 잘 견디지 못한다. 독자는 학생이 아니고, 저자의 정신과 대화하며 자기 사유를 전개하는 사람이므로 누군가 밑줄과 두께로 강제하면 자유를 빼앗기는 것 같다. 독자는 추상적인 『돈키호테』를 읽지 않는다. 그는 앞에 놓인 판형과 페이지 구성, 장 구분, 구두점, 글자의 배열을 읽는다. 저자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게 있다면 그건 독자 스스로의 지성으로도 알아차릴 수 있다. 묵독하는 독자는 글을 침묵 속에서 읽는데, 이때 자신의 감정 상태에 수시로 좌우되며 조판 형태는 여기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해외 원서에서 저자들이 이탤릭체로 강조한 것을 한국어판으로 편집할 때 나는 주로 돋움체를 쓴다. 굵은 고딕을 사용하면 특정 개념어가 너무 두드러져 그것이 속한 문장의 리듬이 깨지면서 주어와 서술어뿐 아니라 형용사와 부사까지 거의 소멸되어 보이기 때문이다. 개념어, 특히 명사들이 이따금 강압적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이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거기에 서체까지 강조되면 독자의 머릿속엔 추상적인 개념만이 남을 우려가 있다.

지난 6월 서울국제도서전에서 한 독자가 부스에 찾아와 20여 분간 울분을 토했다. 왜 글자를 작게 인쇄해서 독자를 힘들게 하냐고. 인문학 도서는 대개 10.2~10.3포인트로 편집한다. 이보다 커지면 판면이 흐트러지고 못생겨지는 느낌이다. 게다가 한 페이지에 담기는 정보량이 줄면 독자는 셈법을 작동시킨다. 책에서 펼쳐지는 사고와 문장은 정확해야 하는데 정확성은 의외로 낭비의 제거, 즉 밀도와 중량감에서 얻어질 때도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문서 편집자는 평균 연령대를 계산해 40세 전후의 시력을 본보기로 삼곤 한다.

한글 프로그램을 쓸 때 내가 기본 포맷인 함초롱바탕에 글자 크기 10포인트를 써왔던 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 이 서체는 또렷하며 어떤 감정도 자아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저자의 예민한 서체와 조판으로부터 그들의 미의식과 무의식을 읽어내면서 이제는 PC 교정을 볼 때 각 저자가 준 포맷 그대로를 사용한다. 그 글꼴에 젖어 드는 것이 그 저자의 책을 만드는 출발점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생각만큼 의미 중심적이지 않을 수 있다. 글쓴이의 서체에 대한 관점은 단순히 미적 취향의 표현만이 아니다. 뒤라스는 고다르와의 대화에서 “침묵은 늘 텍스트 주변을 맴돈다”고 말했고, 고티에와의 대화에서는 “타이포그래피 속에 침묵을 남겨둘 수 있다면” 하고 말했다. 그건 타이포그래피가 단순히 문장을 읽기 좋게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문장에 속한 침묵까지 보존할 수 있느냐는 미학적 문제를 제기한다. 벤야민 역시 말라르메의 시집 『주사위 던지기』의 그래픽적 긴장감에 대해 ‘서체와 여백은 외부 장식이 아니라 작가의 문체 내부에서 자라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즉 외양은 꾸밈이라기보다 글쓴이의 정신을 관통하는 하나의 핵일지도 모른다.

이은혜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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