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선 다리 하나, 중국에선 21년 잃은 남자가 걸어온 길

방현석 2026. 11. 3.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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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국제호텔 앞, 김학철의 발자취가 깃든 길목에서 질문을 던진다. 의열단원, 조선의용대원, 외다리의 전사, 남북과 중국의 권력에 맞섰던 비판적 지식인, 그리고 기자이자 소설가인 김학철.

조선의용대가 어떤 부대였는지, 그 부대원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김학철이 어떤 전사였는지를 무엇보다 잘 보여주는 전투가 호가장전투다.

김학철은 포로가 되어서도 조선의용대 대원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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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도루트_ 만주6] 조선의용대 창설대원이자, 기자이자, 사회주의자이자 소설가였던 김학철

연길국제호텔 앞, 김학철의 발자취가 깃든 길목에서 질문을 던진다. 의열단원, 조선의용대원, 외다리의 전사, 남북과 중국의 권력에 맞섰던 비판적 지식인, 그리고 기자이자 소설가인 김학철. 그의 삶은 단 하나의 수식어로도, 수많은 이력의 나열로도 담아낼 수 없는 거대한 산맥과 같다. <기자말>

[방현석 기자]

연길대교를 건넌 차가 연화로로 우회전했다. 얼마 가지 않아 오른쪽 창밖으로 연길국제호텔이 눈에 들어왔다. 연화로와 부르하통하 사이에 서 있는 연길국제호텔 앞에 차를 세웠다. 여기서부터는 김학철이 갔던 길이다.

김학철, 그를 어떤 사람이라고 말해야 할까.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채 상해로 가 밀정을 처단한 의열단원. 황포군관학교 출신의 조선의용대 창설대원. 태항산 호가장전투 결사대원. 나가사키형무소에서 다리 하나를 잘라내고 외다리가 된 포로. 해방된 조국 남한에서 박헌영의 사대주의 발언을 정면으로 공박했던 전사. 평양에서 관료주의를 비판했던 기자. 중국에서 마오쩌둥의 개인숭배를 비판하고 독방에서 10년을 보낸 사회주의자. <격정시대>와 <항전별곡>을 쓴 소설가.

이중 어느 하나로 그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모두를 나열하는 것으로도 그를 설명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 조선의용대 창립기념 사진 맨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김학철
ⓒ 김학철문학상지원단
그는 바로 이 자리에 있던 인민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재판을 받았다. 1300석을 꽉 채운 관객들 앞에서 벌어진 거대한 희극이었다. 원산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태항산에서 일본군과 싸웠던 그는 어떻게 중국의 재판정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을까.

김학철은 18세에 보성고 교복을 입고 채 남대문역에서 기차를 타고 상해로 가 의열단 단원이 되었다. 상해에서 의열투쟁을 벌이던 그는 남경으로 가 중국육군중앙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1938년 10월 10일 조선의용대 창설대원으로 참여했다.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던 무한에서 창설된 조선의용대는 일제가 패망하는 그날까지 가장 치열하게 무장투쟁을 계속했던 부대였다. 조선의용대가 어떤 부대였는지, 그 부대원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김학철이 어떤 전사였는지를 무엇보다 잘 보여주는 전투가 호가장전투다.

5조선의용대 5인의 결사대와 김학철의 운명

1941년 12월 12일 새벽.
태항산 기슭 호가장 마을에 숙영 중이던 조선의용대 대원 29명은 일본군과 황협군에게 포위당했다. 일본군의 전력은 압도적이었다. 포와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적 병력 300명을 뚫고 살아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때 다섯 명이 나섰다. 스물네 명을 살려 보내기로 결심한 결사대였다. 그들은 전우들이 가지고 있던 탄환도 넘겨받았다. 상황은 너무나 급박했지만 그들은 이렇게 침착하고, 담대했다.

"동무들! 탄약을 절약하시오. 탄약을..."
그렇다. 탄약이 결핍할 우려가 있었다.

"한 방에 한 눔씩 잘 겨눠서."
누군가 그 급한 통에도
"꼭 한 눔씩만? 한 눔 이상은 않돼?"하고 농을 걸었다.
"아냐, 괜찮어. 둘도 가, 셋도 가. 사양말게 이 사람."

철알의 우박 밑에서 마치 늦은 봄 풀밭에 비스듬이 누워서 소리없이 지는 복숭아꽃닢아리를 외몸에 가득히 맞으며 주고받고 하는 농지꺼리같은 느낌을 준다.

1945년 '피로 기록한 항일사' <아아, 호가장- 조선의용대는 이렇게 싸웠다>에서 김학철은 그날 상황을 이렇게 썼다.

5인의 결사대원은 동지들로부터 넘겨받은 탄환의 아끼고 아껴가며 싸웠지만 적은 포와 기관총탄을 우박처럼 퍼부어 대며 밀고 들어왔다. 마지막 한 발까지 다 소진한 결사대원들은 몸을 던져가며 적과 싸웠다. 탄환이 떨어진 손일봉 분대장은 수류탄을 들고 적진으로 뛰어내려 적 지휘관을 안고 함께 폭사했다. 총상을 입고 쓰러진 한청도는 소매에 수류탄을 감추고 죽은 듯이 누워 있다가, 적이 다가오자 수류탄을 터뜨려 적과 함께 떠났다. 왕현순은 머리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다. 피투성이가 된 채 육박전을 벌이던 박철동은 적의 총검에 찔려 최후를 마쳤다.

마지막 한 대원은 허벅지에 총탄을 맞고 정신을 잃은 채 적의 포로가 되었다. 그는, 눈을 떴을 때, 적의 들것에 실려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포로가 되느니 죽어버리려고 몸을 굴려 떨어지며 저항했다. 일본군은 그를 들것에 꽁꽁 묶어 들고 갔다. 그 포로의 이름이 김학철이었다.

그렇게 5인의 결사대가 열어준 혈로를 타고 스물네 명의 전우들은 적의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김학철이 포로가 된 호가장 전투는 독립군의 정신이 무엇인지, 독립군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가장 잘 보여준 전투였다.

나를 희생해서 우리를 지킨다. 우리 부대가 희생해서 나라를 되찾고 동포를 지킨다. 그것이 그들이 몸으로 보여준 독립군의 정신이었다. 5인의 결사대가 희생해서 24명의 전우를 살리고 조선의용대를 구했다. 그렇게 살아남은 전우들은 대오를 정비하고 다시 싸웠다. 다시 부대가 위기에 처하면 또 누군가 남아서 죽어주며 동지를 지키고, 부대를 지켰다. 우리 독립군은 그렇게 전투를 이어가며, 해방의 그날까지 싸웠다.

김학철과 4인의 결사대원들은 우리 독립군의 화신이었다. 독립군의 정신과 전투력을 보여준 표본이었다.
▲ 호가장전투에서 전사한 4인의 전사 묘역 태항산 호가장전투에서 조선의용대 대원 네 명의 묘역을 벌초하고 있는 범도루트 16기 대원들
ⓒ 방현석
전향서 한 장과 다리 하나를 바꾼 전사

김학철은 포로가 되어서도 조선의용대 대원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총상을 입은 그의 대퇴골은 1/4이 깨어져 나갔다. 지독한 고통이 이어졌지만 치료받지 못했다. 나가사키로 끌려가 10년 징역을 선고받았다. 부상당한 그의 허벅지는 계속 방치되었다. 썩어들어가는 상처에서 구더기가 일었다. 김학철은 젓가락으로 자기 허벅지에서 구더기를 집어내며 견뎠다. 치료받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전향서 한 장. 그것만 쓰면 김학철은 치료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쓰지 않았다. 그는 결국 썩어들어가는 다리 하나를 잘라내 나가사키형무소 무연고자 묘지에 묻어야 했다. 그것이 전우들을 살리기 위해 죽음을 선택했던 네 동지들을 기억하는 그의 방법이었다. 자기 다리가 아깝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그에게는 다리보다, 지켜야 할 더 중요한 무엇이 있었다.

전향서는 그에게 단순한 한 장의 종이가 아니었다.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상해로 가 의열단원이 되었던 자신의 선택을, 태항산 전선으로 갔던 조선의용대의 결의를, 호가장전투 현장에서 죽음을 선택한 결사대 동지들의 결단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살아남은 자신이 죽은 동지들을 배신할 수 없었기에 그는 3년하고도 6개월을 피고름을 흘리며 버틴 조선의용대 대원이었고, 항일무장투쟁 전사였다.

일본은 패전한 다음에도 김학철을 바로 석방하지 않았다. 1945년 10월이 되어서야 그는 나가사키형무소에서 출감했다. 수감될 때 맡겨두었던 신발 두 짝 중 하나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형무소 문를 나섰다.

외다리로 돌아온 해방 조국의 남쪽은 그를 환영하지 않았다. 친일파들이 판치는 미군정을 피해 북으로 갔지만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평양에서 노동신문 기자로 소련군의 관료주의를 비판했던 그는 금강산으로 밀려났다.
▲ 김학철 잊어서는 안 될 항일전사이자 비판적 지식인 김학철, 사진은 2007년 실천문학사에서 출간한 <김학철 평전>(김호웅,김해양(편저))의 책표지
ⓒ 실천문학사
어떤 권력에도 굴복하지 않았던 김학철

한국전쟁 과정에서 중국으로 떠났던 그는 북경에서 최대의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마오쩌둥을 절대권력자로 떠받드는 개인숭배에 눈감지 않았다. 마오쩌둥을 비판하는 최초의 소설을 용감하게 썼다.

대가는 혹독했다. 그는 '반혁명 현행범'이 되었다. 재판도 없이 7년을 독방에 가두어 두었다. 7년 만에 열린 재판은 거대한 정치극이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자리에 있었던 1300석 인민문화회관은 연길의 '대표적인 인물'들로 가득 찼다. 극장 밖도 문전성시였다. 입장하지 못한 '비대표적인 인물'들로 극장 주변도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외다리 김학철은 쌍지팡이를 짚고 무대 위에 마련된 재판정에 올라섰다. 목에는 큼지막한 판대기가 걸려 있었다.

- 반혁명 현행범 김학철
재판관이 호통쳤다.
"고개 숙엿! 허리 굽혓!"
그러나 김학철은, 따르지 않았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이 자리에서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숙이고, 굽히지 않겠다.'
민병들이 달려들어 머리를 찍어눌렀다. 그래도 머리를 숙이지 않자 목에 밧줄을 걸어 잡아당겼다.
쌍지팡이 따로, 의자 따로, 외다리 따로. 김학철의 표현대로 무대 위에 '일곱 개의 다리'가 어지럽게 나뒹굴었다. 그는 반성을 말하지도, 선처를 구하지도 않았다. 그가 준비한 것은 오직 사회주의 정신을 배반한 가짜 사회주의자들을 향한 준엄한 질책이었다.

다급해진 재판장이 외쳤다.
"아갈잡이! 아갈잡이!"
민병들이 달려들어 쇠막대기로 더러운 걸레를 그의 입에 쑤셔 넣었다. 말 그대로 입을 틀어막아야만 입을 막을 수 있었던 사람, 그가 김학철이었다.

일본 감옥에서 전향서 한 장을 쓰지 않았던 그는 중국 감옥에서도 반성문 한 장 쓰지 않았다. 사회주의라는 거룩한 간판을 걸고, 권력을 전횡하며, 무려 수천만 명의 인민들을 아사로 몰아넣은 절대자를 향해 김학철은 혈혈단신으로 맞섰다.

항일 전사로 싸우다 일본에서는 다리 하나를 잃었고, 중국에서는 인민의 생명과 권리를 싸우다 인생의 21년을 잃었다. 그 21년의 10년은 꼬박 형무소 독방에서, 남은 11년은 강제 노역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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