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人]우리가 그리워한 아버지, 최불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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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의 어른이 떠나면 그가 차지했던 자리가 얼마나 넓었는지 뒤늦게 알게 된다. 사람들은 그를 배우로 기억하지만, 그리워하는 것은 한 시대를 함께 살아온 아버지의 얼굴이다.
그러나 진정한 어른은 정답을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먼저 보여주는 사람이다.
최불암은 오랜 세월 그런 어른의 자리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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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부친 여윈 아픔 안고 그리워한 모습을 연기로 그려내
어린이 후원·미아 찾기 방송 등 화면 밖으로 이어진 따뜻한 돌봄
밥상 위 이웃 사연 귀 기울이며 누구나 편히 기댈 수 있는 존재로
'나'보다 '우리' 위한 기도 속 저마다의 아버지로 마음에 남아
집안의 어른이 떠나면 그가 차지했던 자리가 얼마나 넓었는지 뒤늦게 알게 된다. 배우 최불암이 남긴 빈자리도 그렇다. 사람들은 그를 배우로 기억하지만, 그리워하는 것은 한 시대를 함께 살아온 아버지의 얼굴이다. 늘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았던 사람. 호령하지 않아도 믿고 따를 수 있었던 어른이었다.

최불암이 보여준 아버지는 흔히 떠올리는 가부장적인 가장과 달랐다. 오랜 세월 아버지는 말수가 적고 권위로 집안을 다스리는 존재로 그려졌다. 그러나 '수사반장'의 박 반장은 원칙을 지키면서도 사람을 내치지 않았다. '전원일기'의 김 회장은 잔소리 속에 식구를 향한 걱정과 미안함을 담았다. 힘으로 누르기보다 책임으로 곁을 지켰다. 권위와 권위주의의 차이도 여기에 있다. 권위는 타인이 인정해 주는 것이고, 권위주의는 스스로 내세우는 것이다.
최불암은 전자의 길을 걸었다. 큰소리를 내지 않아도 사람들이 따랐다. 수사반장은 1971년 3월부터 18년간 안방을 지켰다. 그는 당시 인기를 두고 "서울의 7시대를 정지시켰었다"고 회고했다. 드라마 속 형사의 신뢰는 현실에서도 인정받았다. 1972년 1월 명예경감에 임명됐고, 2024년에는 명예경찰 최초로 치안정감(명예 국가수사본부장)에 위촉됐다.
전원일기에서는 또 다른 아버지로 살았다. 1980년 10월부터 2002년 12월까지 22년간 1088회가 방송된 국내 최장수 드라마다.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살아가던 이들에게 김 회장의 집은 마음속 고향과도 같았다. 시청자들은 매주 같은 마당에서 그를 만나며 타향살이의 그리움을 달랬다. 최불암은 그렇게 수많은 가정의 저녁을 함께했다.

그렇다고 늘 푸근한 얼굴만 보여준 배우는 아니었다. 1980년 영화 '최후의 증인'에서는 온기를 지운 채 피로에 찌든 형사를 연기했다. 이 작품은 개봉 당시 독재정권의 검열로 30분 넘는 분량이 잘려 나갔다. 최불암의 연기에는 세상의 어두운 이면을 바라보는 시선도 있었다. 그가 보여준 다정함이 마냥 낙관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세상의 냉혹함을 알면서도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에 가까웠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아버지의 부재에서 비롯됐다. 최불암은 초등학교 2학년 때 부친을 여의었다. 그는 "정작 내게는 아버지에 대한 경험과 기억이 많지 않다"고 털어놨다. "아버지가 어떤 존재인지 몰라 그리워한 모습을 연기에 담았다"는 말도 남겼다.
어린 시절 채우지 못한 그리움이 훗날 그가 연기한 아버지의 바탕이 된 셈이다. 자신이 경험한 아버지가 아니라, 곁에 있었으면 했던 아버지를 그려냈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그의 얼굴에서 저마다의 아버지를 발견했다. 누군가에게는 그리운 아버지였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의 보살핌은 화면 밖으로도 이어졌다. 1981년 전원일기에서 막내 금동이를 입양하는 이야기를 연기한 뒤 어린이 후원에 관심을 기울였다. 1985년부터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전국후원회장을 맡아 나눔을 실천했다. 미아 찾기 특별 생방송도 진행했다. 두 차례 방송을 통해 120여 명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자신만 후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동료 배우와 가족, 지인들의 참여까지 이끌었다. 한 번 맺은 인연은 45년간 이어졌다.
돌봄이 행동으로 드러난 어른다움이라면, 경청은 그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최불암은 2011년 1월부터 14년 3개월 동안 '한국인의 밥상'을 진행하며 전국 곳곳의 식탁에 앉았다. 음식을 앞에 두고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기보다 그 음식을 만든 사람의 삶에 귀를 기울였다. 한 끼에 담긴 지역의 역사와 가족의 사연, 살아온 세월을 차분히 전했다. 그의 앞에서는 평범한 이웃도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됐다.
자신의 자리를 내어줄 때도 알았다. 2024년 '수사반장 1958' 첫 회와 마지막 회에 노년의 박 반장으로 출연해 오랜 배역을 젊은 배우에게 이어줬다. 이듬해에는 한국인의 밥상 진행을 후배 최수종에게 넘겼다. 오래 지켜온 자리를 붙들기보다 다음 사람에게 길을 열어준 것이다.
우리 사회가 그에게서 그리워하는 것도 이런 어른의 모습일지 모른다. 정보는 넘쳐나지만 믿고 물을 사람은 찾기 어렵다. 세대 간 대화는 줄어들고, 어른의 말은 때로 훈계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진정한 어른은 정답을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먼저 보여주는 사람이다.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그런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최불암은 드라마 촬영 당시 "내가 제일 어른인데 잘해야지"라는 생각에 힘든 기색을 내지 않았다고 했다. 자신을 따르는 후배들이 있었기에 먼저 책임을 다하려 했다. 그가 보여준 어른의 무게는 나이나 경력보다 이런 마음에서 나왔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자신보다 '우리'를 향했다. KBS 특집 다큐멘터리 '따뜻한 어른, 최불암'에서 그는 "나만 행복해질 수가 없어. 다 같이 행복해져야지"라고 말했다. 짧은 한마디에 그가 평생 지켜온 태도가 담겨 있다. 자신의 행복을 다른 사람의 행복과 떼어놓지 않았던 사람이다.
각자도생이 익숙한 시대에 우리를 먼저 말하는 어른은 더욱 귀하다. 최불암은 오랜 세월 그런 어른의 자리를 지켰다. 배우 송승헌은 하늘 같은 대선배가 늘 아빠처럼 편하게 대하라고 했던 일을 떠올렸다. 전원일기에서 호흡을 맞춘 남성진·김지영 부부는 그를 인생을 가르쳐준 큰 산으로 기억했다. 팝페라 테너 임형주는 한 시대를 함께 살아주고 우리 모두의 마음에 온기를 남긴 분이라고 추모했다. 저마다 맺은 인연은 달랐지만 그리워하는 모습은 닮아 있었다. 곁곁에 있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기꺼이 기대어 쉴 자리를 내어줬다는 점이다.
최불암은 지난달 29일 오후 10시께 서울 강서구의 한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던 중 향년 87세로 별세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장례는 오랜 인연을 맺어온 초록우산장으로 5일간 치러졌다.

2일 오전 서울 여의도성당에서는 염수정 추기경의 집전으로 장례미사가 엄수됐다. 임형주는 '아베 마리아'를 부르며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카치니의 곡으로 알려진 이 노래는 성모송의 첫 구절인 아베 마리아를 되풀이한다. 성모송의 기도문은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로 끝난다. 그 기도의 주어는 '나'가 아닌 '저희'다.
"나만 행복해질 수가 없어. 다 같이 행복해져야지."
평생 우리를 이야기했던 어른은 그렇게 저희의 기도 속에서 떠났다. 사람들 마음에 저마다의 아버지로 남았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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