킁킁 대며 한 모금... 나홀로 차 이름 맞히기

노시은 2026. 10. 31.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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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일상 속, 차 한 잔으로 일상에 쉼표를 찍습니다. 차 한 잔을 마시며 24절기와 동양화를 오가며 흐르는 시간의 아름다움을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무슨 단총일까요? 아쉽게도 차를 준 사람도 정확한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림에 어울리는 잔과 차호를 고르고, 그 분위기에 맞는 차까지 마련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차의 이름부터 잘못 짐작한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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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원 장승업의 '팔준도'와 이름 모를 차 한 잔

바쁜 일상 속, 차 한 잔으로 일상에 쉼표를 찍습니다. 차 한 잔을 마시며 24절기와 동양화를 오가며 흐르는 시간의 아름다움을 기록합니다. <편집자말>

[노시은 기자]

▲  팔준도 장승업(張承業, 1843~1897) 지본담채 각 159.5×38.0cm, 간송미술문화재단
ⓒ 간송미술문화재단
고개를 숙인 말이 곁눈질로 사람을 살핍니다. 한 손을 뒷짐 진 채 조심스럽게 다가서는 사람과 얌전히 서 있는 듯하면서도 경계를 풀지 않은 말. 다른 그림에서는 두 마리의 말이 시냇물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내달립니다. 종이 위에 그려진 말인데도 금방 발굽 소리가 들릴 것 같습니다. 오원 장승업(1843~1897)의 <팔준도>(八駿圖)입니다.

당장이라도 달려 나갈 듯 생생한 말 그림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소장한 이 작품은 네 폭에 두 마리씩, 모두 여덟 마리의 말을 담았습니다. 첫 폭인 <어자조련>(御者調鍊)에는 말을 길들이는 사람과 말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마지막 폭인 <호치비주>(豪馳飛走)에는 거침없이 달리는 말의 역동성이 돋보이지요.
▲  팔준도 장승업(張承業, 1843~1897) 지본담채 각 159.5×38.0cm 중 일부,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 노시은 촬영
▲  이토록 생생한 말이라니! 당장이라도 그림을 뚫고 나올 것만 같다 장승업 팔준도 일부,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 노시은 촬영
'팔준'은 중국 주나라 목왕이 타고 다녔다는 전설 속 여덟 준마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예부터 동아시아 회화에서는 즐겨 다뤄온 소재인데요. 장승업의 말들은 전설 속 신비로운 동물이라기보다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 나갈 듯 생생합니다.

장승업은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과 함께 조선의 '삼원(三園)'으로 불리는 화가입니다. 그의 그림을 두고 흔히 호방하다거나 거침없다고 평가하죠. 그런데 <팔준도>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힘찬 필치 못지않게 섬세한 관찰이 눈에 들어옵니다. 고개를 숙인 말의 눈길이나 달리는 말의 근육과 움직임까지, 장승업은 말들의 서로 다른 성격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 그림을 보고 문득 얼마 전 데려온 찻잔이 떠올랐습니다. 다리가 높고 한쪽에 손잡이가 달린 고블렛 잔입니다. 형태로 보자면 옛 고족배(高足杯)를 닮았습니다. 고족배는 높은 굽 위에 잔의 몸체가 올라앉은 기물로, 마상배(馬上杯)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고 합니다. 말 그림을 감상하다 떠올린 잔이 마상배라니, 재미있는 우연이지요.
▲  나는 왜 이 차를 무이암차라고 굳게 믿었던 것일까?
ⓒ 노시은
사실 이 잔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중국 당나라의 삼채 도자기(당삼채)가 생각났습니다. 울퉁불퉁한 가장자리와 얼룩처럼 번진 녹갈색 유약 때문이었을까요. 정확히 어디가 닮았다고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어딘가 오래된 유물 같은 분위기를 풍깁니다.

당삼채 가운데는 말을 빚은 도자기도 많습니다. 당나라 사람들은 말을 흙으로 빚어 녹색과 황갈색 등의 유약으로 장식했고, 상당수는 무덤에 함께 묻는 부장품으로 만들었습니다. 당삼채의 말도 장승업의 말처럼 그 생김새가 제각각이지요. 그림 속 말을 보다가 당삼채의 말을 떠올리고, 마침내 찻장에 넣어둔 잔까지 생각이 미친 셈입니다.

잔을 정하니 차호도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유약을 입히지 않고 구운 무유소성 차호입니다. 표면의 거친 흙빛과 고블렛 잔의 녹갈색이 제법 잘 어울립니다. 그렇다면 차도 묵직한 것이 좋겠지요. 아껴뒀던 차를 꺼냈습니다.

이름 모를 차

찻잎은 짙은 흑갈색이었습니다. 코를 가까이 대니 불을 충분히 거친 듯 구수한 향도 강하게 올라옵니다. 외형과 향을 보니 무이암차가 틀림없겠다 싶었습니다. 이 정도로 배화향이 두드러진다면 암차 중에서도 제법 강하게 홍배(烘焙)한 차일 것 같았습니다.
▲  무화과 피낭시에에 곁들이자 단총의 특징이 도드라지며 본색을 드러냈다.
ⓒ 노시은
중국 푸젠성 무이산 일대에서 생산하는 무이암차는 우롱차의 한 종류입니다. 차를 만드는 과정에서 불을 이용해 찻잎을 익히는 배화 과정을 거치는데, 그 정도에 따라 맛과 향도 크게 달라집니다. 잘 만든 암차에서는 구수하고 묵직한 풍미와 함께 입안을 맑게 하는 듯한 시원한 여운도 느낄 수 있지요.

그림과 차도구에 어울리는 차까지 마련했으니 이제 마셔볼 차례입니다. 그런데 한 모금 마시자 고개가 갸웃해졌습니다. 어라? 분명 암차 같은데, 무언가 다릅니다. 처음에는 화향이 강한 수선(水仙) 종류인가 싶었습니다. 구운 향 뒤로 꽃향기도 느껴지고, 차의 두께도 제법 묵직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암차에서 즐기는 특유의 시원한 여운 대신, 혀에 살짝 감기는 쌉싸름함과 떫은맛이 남습니다.

이거, 아무래도 좀 이상한데요. 결국 차를 구해준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암차인지 궁금하다고요. 돌아온 대답에 그만 놀랐습니다. 암차가 아니라 봉황단총(鳳凰單叢)이랍니다! 어쩐지! 마시면서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던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물론 무이암차와 봉황단총은 모두 우롱차에 속합니다. 하지만 무이산의 암차와 광둥성 차오저우 봉황산 일대의 단총은 저마다 다른 향미의 세계를 보여주지요. 특히 봉황단총에서는 꽃과 과일을 연상시키는 향, 그리고 살짝 쌉싸름하면서도 떫은 고삽미(苦澀味)를 만나는 일이 많습니다.
▲  독특한 모양에 끌려서 모시고 온 고블릿 잔은 왠지 모르게 당삼채를 떠오르게 하기도 했다.
ⓒ 노시은
그렇다면 무슨 단총일까요? 아쉽게도 차를 준 사람도 정확한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한번 짐작해 볼 수밖에요.

봉황단총은 향의 특징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구분합니다. 꿀과 난초를 연상시키는 밀란향(蜜蘭香), 치자꽃을 떠올리게 하는 황지향(黃枝香), 목련 향을 닮은 옥란향(玉蘭香) 등이 대표적이지요. 그중 제 마음이 기운 것은 행인향(杏仁香)이었습니다.

행인은 살구씨 속 알맹이를 가리키는 말로, 행인향은 아몬드처럼 고소한 견과류의 향미가 특징인 단총입니다. 여기에 은은한 꽃향이나 과일향이 어우러지기도 하지요. 배화 정도에 따라 풍미가 달라지는데, 강하게 홍배한 행인향이라면 제가 처음에 암차로 착각했던 이유도 어느 정도 설명됩니다.

물론 향과 맛만으로 정확한 차의 이름을 알아맞힐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제 입안에 남은 견과류 같은 고소함과 은은한 꽃향을 떠올리니 행인향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피낭시에를 곁들인 맛
▲  가는 가을을 아쉬워하며 무화과와 크림치즈가 올라간 피낭시에를 곁들여 티타임을 즐겨보았다.
ⓒ 노시은
여기에 다식으로 준비한 피낭시에를 곁들였습니다. 피낭시에는 아몬드 가루와 버터로 만드는 프랑스의 구움과자입니다. 버터를 갈색이 나도록 끓여 넣기 때문에 특유의 고소한 향이 나지요. 오늘 고른 피낭시에는 무화과와 크림치즈까지 더해져 있습니다.

한 입 베어 물자 부드럽고 달콤한 과자 속에서 무화과 씨가 오도독 씹힙니다. 크림치즈의 부드러운 산미도 느껴지고요. 여기에 차를 한 모금 마시니 조금 전까지 두드러졌던 구운 향 뒤로 단총 특유의 풍미가 한층 살아납니다. 아몬드와 버터의 고소함, 무화과의 달콤함이 차의 쌉싸름한 끝맛과도 제법 잘 어울립니다.

행인향이라는 추측에 슬슬 자신감이 붙습니다. 그러고 보니 찻물의 색도 궁금해졌습니다. 고블렛 잔은 안쪽이 어두워 탕색을 살펴보기 어렵습니다. 결국 흰 잔을 하나 꺼내 차를 조금 따라보았습니다. 아, 이런 색이었군요!
▲  봉황단총 행인향의 탕색은 맑은 황토빛에 가깝다.
ⓒ 노시은
짙은 갈색일 것이라고 예상했던 찻물은 황갈색을 바탕으로 맑은 주홍빛을 띠고 있었습니다. 행인향에서 기대할 법한 등황색 계열의 탕색과도 잘 어울립니다. 물론 탕색 역시 차의 정체를 확정해 주는 증거는 아니지만, 어쨌든 오늘의 추리는 꽤 그럴듯해 보입니다.

장승업의 <팔준도>에서 시작한 차 시간이 이렇게 뜻밖의 봉황단총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림에 어울리는 잔과 차호를 고르고, 그 분위기에 맞는 차까지 마련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차의 이름부터 잘못 짐작한 셈이지요.

다만 한 가지 아쉬움이 남습니다. 처음부터 단총인 줄 알았다면 이 무유소성 차호 대신 백자처럼 유약을 입힌 도자기나 유리 다구를 골랐을 겁니다. 향을 섬세하게 감상하기에는 그편이 더 좋았을 테니까요. 오늘의 차호도 충분히 즐거운 경험을 선사했지만, 행인향으로 짐작되는 이 차가 본래 어떤 향을 품고 있는지는 아직 다 만나지 못한 기분입니다.

다음에는 백자 개완에 우려봐야겠습니다. 그때도 행인향이라고 생각할지, 또 다른 차의 이름을 떠올리게 될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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