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븐한 스테이크” 뭐길래…장작불 앞 고기를 쉬게 하는 이유 [쿠킹]

김광중 2026. 10. 31.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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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한 곳의 스테이크하우스를 찾아 그 집만의 고기 철학과 조리 방식, 공간의 결을 차분히 기록하는〈스테이크의 정석〉을 시작합니다. 스테이크 전문가 김광중 셰프가 화제성보다 완성도에 주목해 스테이크 한 접시에 담긴 디테일을 짚어봅니다. 8회는 ‘엘픽’입니다.

⑧ 엘픽(ELPIC)
“스테이크가 이븐하지 않았어요.”
넷플릭스〈흑백요리사〉 시즌1에서 안성재 셰프가 한 참가자의 스테이크를 평가하며 한 말입니다. 한 시간 가까이 공들여 구운 스테이크였지만 익힘이 고르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죠. 당시 안 셰프의 이 한마디는 방송 이후에도 꽤 오래 회자됐습니다. 스테이크를 먹으면서 “이븐하게 익었네”라는 말을 농담처럼 주고받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스테이크가 고르게 익었다는 건 생각보다 복잡한 이야기입니다. 겉은 강하게 구워 고소한 크러스트를 만들면서 속은 원하는 온도까지 균일하게 익혀야 합니다. 고기의 두께와 지방 함량, 열을 가하는 방식에 따라 결과도 달라지죠.

국내 스테이크 시장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특별한 날 찾던 미국식 스테이크하우스에서 이제는 한우, 숙성육, 숯불과 장작 그릴 등 선택지가 훨씬 다양해졌습니다. 좋은 원육을 사용하는 것은 기본이고, 그 고기를 누가 어떻게 굽느냐에 관심을 갖는 사람도 많아졌습니다.

사진만 봐도 엘픽의 스테이크임을 알아볼 수 있는 미경산 한우 1++ 등급 티본스테이크. 사진 김광중

서울 청담동의 엘픽(ELPIC)은 이런 변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기 아까운 곳입니다. 오너 셰프가 이끄는 이곳은 좋은 고기를 사용하는 것만큼이나 불을 다루는 방식에 공을 들이는 레스토랑입니다.

엘픽은 제주에서 시작해 2022년, 서울 청담동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곳의 중심에는 장작 그릴이 있습니다. 앞서 소개했던 뉴욕식 스테이크하우스들이 초고온 브로일러나 강한 열을 이용해 스테이크를 굽는다면, 엘픽은 조금 다른 방식을 택했습니다. 장작불의 열을 조절하면서 고기를 천천히, 고르게 익히는 방식입니다. 스테이크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이를 '그릴 수비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물론 정식 조리 용어는 아닙니다. 일정한 온도의 물을 이용해 식재료를 익히는 수비드처럼, 고기 내부의 온도를 서서히 끌어올려 균일한 익힘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붙은 표현입니다. 엘픽은 장작 그릴에서 열의 세기와 고기의 위치를 조절하며 내부 온도를 서서히 끌어올립니다. 겉면이 지나치게 익는 것을 막으면서 속까지 고르게 열을 전달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말은 간단하지만 실제로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장작불은 가스나 전기처럼 온도를 일정하게 맞춰놓을 수 있는 열원이 아닙니다. 장작이 타들어 가는 정도에 따라 열이 달라지고, 불꽃과 숯의 상태도 계속 변합니다.

셰프는 그때마다 고기의 위치를 옮기고, 불과의 거리를 조절해야 합니다. 고기의 두께와 지방 함량에 따라 열을 가하는 방법도 달라집니다. 장작불을 다룬다는 건 결국 불의 상태를 읽으면서 끊임없이 판단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엘픽이 다른 스테이크 전문점과 구분되는 포인트도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고기를 사용했느냐 못지않게 그 고기를 어떤 열로, 어떻게 익혔느냐가 중요하니까요.

장작불에 구운 스테이크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불향입니다. 하지만 장작 그릴의 매력을 불향 하나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장작이 타면서 발생하는 연기와 향미 성분은 고기 표면에 영향을 줍니다. 그렇다고 연기가 많을수록 맛있는 건 아닙니다. 불완전 연소로 생긴 과도한 연기는 오히려 쓴맛이나 거친 향을 남길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불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열을 어떻게 전달하느냐입니다. 스테이크의 겉면에는 강한 열이 필요합니다. 고기 표면의 아미노 화합물과 당이 열에 반응하는 마이야르 반응을 통해 갈색 크러스트와 구운 고기 특유의 향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반면 내부까지 계속 강한 열을 가하면 겉은 지나치게 익고 속은 원하는 상태를 놓치기 쉽습니다. 특히 두꺼운 스테이크일수록 겉면과 중심부의 온도 차이가 커집니다. 엘픽에서는 이 차이를 줄이기 위해 가열과 레스팅을 반복합니다. 고기를 불에서 잠시 멀리하면 표면에 남아 있는 열이 안쪽으로 이동하면서 내부 온도가 조금씩 올라갑니다. 다시 필요한 만큼 열을 가하고, 또 쉬게 하는 과정을 거치는 거죠.

여기서 중요한 건 오래 굽는, 과정 자체가 아닙니다. 한 시간 동안 구웠다고 반드시 더 맛있는 스테이크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언제 불에 가까이 두고, 언제 멀리할지 판단하는 기술이 결과를 좌우합니다.엘픽의 스테이크를 이야기할 때 조리 시간보다 익힘의 균일함에 주목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부드러운 식감이 돋보이는 최상급 특상 한우 안심 스테이크. 사진 김광중

엘픽에서는 한우와 숙성육을 다룹니다. 흥미로운 건 고객의 취향에 따라 원육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풍부한 마블링과 부드러운 식감을 선호한다면 최상급 미경산 한우 1++를, 지방보다는 고기 본연의 맛을 즐기고 싶다면 2등급 암소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등급의 한우를 비교해 먹어보는 것도 재미있겠습니다. 같은 장작불에 구워도 원육에 따라 풍미와 식감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느낄 수 있으니까요. 숙성 방식도 독특합니다. 일반적인 드라이에이징에 그치지 않고, 숙성 중인 고기 표면에 곱게 간 소고기를 덧바른 뒤 2차 숙성을 진행합니다. 고기의 부드러움과 육향을 더하기 위해 시도하는 엘픽만의 방식입니다.

엘픽은 장작불을 이용해 이 균형을 맞추려 합니다. 강한 열로 겉면의 풍미를 만들고, 상대적으로 완만한 열로 속을 익히는 방식입니다. 그 결과 스테이크의 단면에서도 일반적인 미국식 스테이크하우스와 차이가 나타납니다. 강한 열로 겉면을 빠르게 구운 스테이크는 표면과 중심부 사이에 익힘의 차이가 비교적 뚜렷할 수 있습니다. 반면 엘픽이 추구하는 방식은 중심부까지 익힘을 고르게 가져가는 데 초점을 둡니다. 바로 이 지점이 엘픽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목하는 부분인 동시에 스테이크 취향에 따라 평가가 갈릴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엘픽에서 스테이크만 보고 나오기에는 아쉽습니다. 사이드와 전채 메뉴에도 꽤 공을 들이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메뉴가 감자 밀푀유입니다. 감자를 얇게 썰어 여러 겹으로 쌓아 익힌 뒤 겉면을 바삭하게 마무리하는 요리죠. 바삭한 표면을 지나면 안쪽에서는 부드러운 감자의 식감이 이어집니다.

스테이크와 감자는 워낙 익숙한 조합입니다. 하지만 같은 감자라도 어떻게 썰고, 쌓고, 익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음식이 됩니다. 엘픽의 감자 밀푀유는 그런 조리의 재미를 보여주는 메뉴입니다.

단새우의 진한 풍미를 살린 비스큐 파스타. 스테이크 마니아들은 파스타 소스에 스테이크를 찍어 먹기도 한다. 사진 김광중

해산물을 활용한 요리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육류 중심의 식사에 해산물이 들어오면 맛의 흐름이 달라집니다. 장작불에 구운 스테이크의 묵직한 풍미를 즐기기 전이나 후에 다른 식감과 향을 경험할 수 있으니까요. 또한 제주에서 출발한 레스토랑답게 계절마다 제주산 제철 식재료를 활용해 샐러드와 파스타, 사이드 메뉴에 변화를 주는 것도 엘픽의 특징입니다.

제주산 워터크레스로 만든 샐러드. 씹을수록 알싸한 맛이 느껴져 스테이크와 잘 어울린다. 사진 김광중

이런 메뉴들을 보면 엘픽이 스테이크 굽기에만 관심을 둔 곳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고기를 중심에 놓되, 앞뒤로 어떤 요리를 먹으면 좋을지도 고민한 흔적이 보이니까요.

청담동에는 이미 유명한 스테이크하우스가 여럿 있습니다. 미국식 정통 스테이크하우스부터 한우를 중심으로 한 레스토랑까지 선택지도 다양합니다. 과거에는 USDA 프라임 등급 원육이나 드라이에이징, 커다란 포터하우스 자체가 특별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좋은 원육을 사용한다는 설명만으로 손님을 발길을 이끌긴 쉽지 않습니다. 같은 부위라도 숙성법과 조리법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는 것을 경험한 소비자가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스테이크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굽기와 크러스트, 지방의 상태를 비교하는 일도 낯설지 않습니다.

엘픽은 이런 시장에서 장작 그릴이라는 자신만의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셰프가 불을 다루는 기술을 전면에 내세운 셈입니다. 다만 이 방식이 누구에게나 정답은 아닐 겁니다. 엘픽이 추구하는 고른 익힘과 스테이크의 단면은 마니아들 사이에서도 취향이 갈리는 부분입니다. 겉면과 중심부의 대비가 뚜렷한 스테이크를 좋아한다면 엘픽의 방식이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엘픽의 입구(왼쪽)와 장작 그릴이 있는 주방을 마주한 바 테이블. 사진 김광중

공간에 대한 아쉬움도 조금 남습니다. 음식의 완성도에 비해 공간에서 느껴지는 스테이크 전문점 특유의 고급스러움은 다소 부족했습니다. 고가의 스테이크를 즐기는 레스토랑인 만큼, 식사 공간에서도 그에 걸맞은 분위기를 기대하게 되니까요.

좋은 스테이크를 만드는 조건은 많습니다. 좋은 원육을 고르고, 숙성 상태를 살피고, 고기의 두께와 지방 함량에 맞춰 열을 조절해야 합니다. 겉면에는 충분한 크러스트를 만들면서 속은 원하는 굽기로 익혀야 하죠. 엘픽이 흥미로운 건 이 모든 과정에서 장작불을 선택했다는 점입니다. 장작은 오래전부터 음식을 익히는 데 사용해 온 열원이지만, 그 불로 매번 일정한 결과를 만드는 일은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결국 고기의 상태를 읽고 불을 다루는 사람의 경험과 판단이 중요해집니다.

다시 『흑백요리사』의 그 장면으로 돌아가 볼까요. “스테이크가 이븐하지 않았어요.” 방송에서는 익힘의 균일함을 평가한 말이었지만, 엘픽에서 스테이크를 먹고 나면 조금 다른 생각도 하게 됩니다. 셰프가 의도한 굽기와 손님이 기대한 맛이 얼마나 잘 맞아떨어지는가. 기술적으로 고르게 익힌 스테이크라고 해서 모든 사람의 입맛에 똑같이 좋은 것은 아닐 테니까요. 엘픽의 장작 그릴은 그 차이를 생각하게 합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이븐한 스테이크'는 어떤 모습인가요?

김광중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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