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쫓아내려 불 냈다”…대피소 안 가고 버티는 구룡마을 주민들 [르포]

허정원, 노유림, 이규림 2026. 10. 28.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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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밤 9시쯤 화재가 진압되지 않은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에서 주민들이 난로 주변에 모여있다. 노유림 기자

27일 발생한 대형 화재로 마을 절반 이상이 불길에 휩싸였지만 주민 30여명은 대피소로 가지 않고 밤늦도록 마을 어귀를 지켰다. 마을 2지구 가건물에서 시작된 불은 12시간 49분 만인 28일 오전 4시39분쯤 완전히 진화됐다. 매캐한 탄내가 마스크를 넘어들어오고 기온까지 큰 폭으로 떨어졌지만 야외 난로 주변에 둘러앉아 몸을 녹이며 버티는 모습이었다. 현장에는 “불 지른 사람을 봤다”며 분노하는 주민과 “집 안에 약이 있어 가져와야 한다”며 불안해하는 주민들이 뒤섞였다.

27일 화재가 난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의 화재민 대피소. 이날 구룡마을 주민 일부가 '구청이 마련한 대피소로 가지 않겠다'며 소리치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노유림 기

현장에서 만난 구룡마을 주민들은 ‘누군가 우리를 쫓아내기 위해 일부러 불을 냈다’고 의심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7지구 주민 김환국(67)씨는 “소방이 제대로 불을 안 끄고 오히려 번지도록 놔두는 것 같다”며 “낮부터 불이 났는데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그렇지 몇 시간째냐”고 말했다. 그는 “개 목줄도 풀어주고 와야 돼서 집에 한번 가봐야 한다고 하니 경찰 7~8명이 달려들어 막더라. 오도가도 못하고 집에도 갈 수 없다”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3지구 주민인 60대 후반 이모씨 역시 “불이 왜 났는지도 모르는데 냅다 짐을 싸서 나가라고 한다. 주민들 다 철수하고 나면 내 짐이 불에 탔는지 구청 직원이 버리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느냐”며 대피소 이동을 거부했다. 그는 “아무리 떠밀고 내쫓아도 우리가 살아온 세월이 있는데 그럴 수 있겠느냐”며 “여기 주민들이 마을 주변에 다 모여 있으면 우리를 전부 강제로 이사시키지 않는 한 쉽게 (마을을) 철거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SH(서울주택도시개발공사) 직원은 이주하지 않으면 고발한다고 하는데 할 테면 하라지 우리가 나갈 줄 아느냐. 여기서 살아온 세월이 40년”이라고도 했다.

28일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화재 현장이 폐허로 변해 있다. 뉴스1


주민들이 이같이 주장하는 건 이주 보상 문제를 놓고 오랜 기간 서울시와 갈등을 이어와서다. 구룡마을은 1970∼80년대 강남지역이 개발되는 과정에서 철거민 등이 이주하며 조성한 무허가 판자촌이다. 축구장 약 40개 면적으로 8개 지구로 나뉜다. 서울시와 SH는 구룡마을 판자촌 대부분을 무허가 비닐·간이공작물로 보고 이곳에 총 3800여가구의 주거단지를 새로 조성하는 공공주도 도시개발사업을 계획 중이다. 이중엔 기존 주민의 재정착을 위한 1100여가구 규모의 통합공공임대 물량도 포함돼있다. 2017년 이후 SH는 송파헬리오시티·디에이치자이개포 등 송파·강남 일대 5개 단지에 임시 이주 주택을 마련하고 임대보증금 전액 면제, 월 임대료 60~100% 면제 등 방안을 제시했다. 이에 1107가구 중 960여가구는 임시 이주를 마쳤다.

그러나 일부 주민들은 분양전환형 임대주택 도입을 요구하며 버티고 있다. 몇 년간 임대료를 내며 거주하면 분양권을 우선 취득할 수 있는 방식이다. 그러나 SH는 “이주비 등을 이미 지원했고 분양전환 임대는 토지보상법상 허용되지 않는다”며 입장 차를 보이고 있다. 법령상 분양권은 허가된 주택 소유주 또는 1989년 1월 24일 이전 지어진 무허가주택 중 요건을 충족한 소유자 등에게만 제공된다. 2011년 공영개발 공식화 이후 15여 년간 이 같은 갈등은 현재진행형이다. 그 사이 떡솜(보온용 솜)·비닐·합판 등으로 올린 무허가 주택은 더욱 낡았고 2013년 이후 20여 차례의 크고 작은 화재가 발생했다.

27일 밤 10시쯤 화재가 진압되지 않은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에서 소방대원들이 화재 현장으로 진입하고 있다. 노유림 기자

6지구 주민 김순옥(70·여)씨는 4·6지구를 전소시킨 지난 1월 화재의 피해 당사자다. 이후에도 그는 2지구의 이웃집에 함께 머물며 구룡마을에 남았다. 그는 “1월 화재 때도 살림살이를 하나도 꺼내오지 못했다”며 “여름옷은 몇 푼 하지 않으니 새로 사서 입었지만 겨울엔 당장 입을 옷도 없다. 애들 2명을 키우며 26년을 여기 살았는데 단 2번의 불로 살아온 흔적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됐다니 황망하다”고 전했다. 김환국씨는 “가족 중에 병원에서 퇴원한 지 3일밖에 안되는 장애인이 있어 대피소 가기가 더욱 꺼려진다”며 “답답하다”고 말했다.

국가재난의료지원팀(KDMAT) 직원들이 구룡마을 인근에 마련된 중학교 대피소로 주민을 안내하고 있다. 노유림 기자


현재 서울시는 구룡마을 인근의 구룡중·개포중에 임시 대피소를 운영하고 일부 주민들은 호텔로 옮겼다. 국토교통부는 이날 “이재민을 대상으로 한국토지주택공사(LH) 임대주택 등을 2년간 무상 지원하는 긴급주거지원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며 지원 의사를 밝혔다.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도 이재민에게 모포 110장, 생수·식품 등 생필품을 지원했다.

허정원·노유림·이규림 기자 heo.jeong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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