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지하철에서의 단상

2026. 10. 27.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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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옥 작가·문예평론가

얼마 전 치과에서 치아 몇 개를 뽑았다가 링 위에서 KO패당한 선수 몰골이 되었다. 얼굴 통증에 부기까지 심해져 매일 병원에 다녔는데 그날은 지하철을 이용했다. 북적거리는 출근 시간에 무심코 마스크를 벗었다가 졸지에 자리를 양보받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 얼굴을 본 승객이 후다닥 일어났다. 팅팅 부은 검보라색 얼굴은 내가 봐도 고개를 돌리고 싶은데 나는 왜 마스크를 벗었던가. 사람들이 힐끔거리다가 눈이 마주치면 놀란 듯 고개를 돌렸고 몇 사람은 넋이 빠진 듯 나를 바라보았다.

■

「 도스토옙스키풍의 심술 발동
흉한 몰골 내비쳐 자리 양보받아
손해 자초는 자유의 한 형태
」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지하로부터의 수기』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병든 인간이다 (…) 나는 심술궂은 인간이다. 나는 매력 없는 인간이다. 나는 간이 아픈 것 같다.” 마치 첫 만남에서 “저는 까다롭고, 심술 많고, 호감 없는 인간입니다”라고 자기소개를 하는 격이다. 본능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싶지만, 묘하게도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 고백은 불편하지만, 설득력이 있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은 독자에게 문학적 초대장을 건네는 대신, 문턱에서 삿대질한다. 인간의 영혼이란 원래 금지된 문구에 더 혹하는 법이다. ‘들어오지 마시오’ 하면 더 들어가고 싶어지지 않는가.

이 첫 단락은 ‘반(反)영웅 서사’의 서막이자 인간 심리의 음지로 향하는 안내판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을 더럽고 비틀린 모습 그대로 세상 한가운데 내놓았다. 꽃향기 대신 곰팡내, 영웅의 눈부심 대신 패자의 축축함. 이상한 건, 우리는 그 지하에서 친밀감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마치 오래된 지하실에서 숨겨둔 사진첩을 찾아낸 듯, 불편한데 익숙하다. 그는 스스로 병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병의 정체를 알지 못하고, 의사를 찾을 의지도 없다. 이유는 단순하다. 심술 때문이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은 보통 숭고한 인간성, 사회 개혁, 이상적인 세계에 시선을 두었다. 톨스토이는 도덕적 완성의 가능성을, 투르게네프는 청년 지식인의 열정을, 고골은 풍자를 통해 사회적 각성을 말했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그 반대편으로 갔다. 그는 “나는 매력 없는 인간이다”라는 문장으로 독자를 불러들인다. 불쾌하고, 불친절하며, 심지어 추하다. 하지만 바로 거기에서 새로운 문학의 문이 열렸다.

이때 심술은 단순한 성격적 결함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비합리성을 끌어안는 태도, 오히려 자기 존재를 지탱하는 기묘한 자존심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심술을 인간의 본질로 밀어 올린다. 현대 심리학의 용어를 빌리자면 ‘자기 파괴적 충동’이고, 철학적으로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에 더 가깝다. 그러나 지하 인간에게 심술은 철학의 논리도, 정신의학의 진단도 아니다. 그것은 더 원초적인, 어린아이가 울면서 장난감을 던져버리는 듯한 고집이다. 다만 어른의 심술은 아이의 그것보다 훨씬 더 냉정하고 계산적이다. 그는 자신의 손해를 정확히 안다. 그러면서도 기꺼이 그 길을 택한다. 그것은 어쩌면 자유의 한 형태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나도 남녀불문 아름다운 이를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신체가 심하게 훼손된 기괴한 모습을 봤을 때 강렬한 시각 정보를 소화하느라 눈을 떼지 못한다. 심지어 타인의 불행을 바라보며 자신의 안전을 확인하기도 한다. ‘병적 호기심(Morbid Curiosity)’은 안전한 거리에서 위험을 관조하며 안도감을 얻으려는 인간의 어두운 본능 중 하나이다.

그날 나도 모르는 심술이 살짝 올라왔던 것 같다. 타인을 위한 배려, 흉한 꼴을 보이지 않으려는 자존심, 그리고 나의 불편함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었다. 호기심 왕성한 아주머니 한 분이 모든 걸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많이 맞았구만” 했다. 상대가 민망하지 않도록 눈길을 돌리고 침묵하는 일은 교양에 속한다. 하지만 흉한 것은 가려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에 먼저 심술을 부린 자는 나였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과 지하철에서 승객들의 눈길을 끈 사실을 연계하며 분석하다 강남역에 도착했다. 개찰구에서 내게 자리를 양보한 승객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나는 바람 소리가 숭숭 새는 발음으로 정중하게 인사했다. “자니를 얀보해 주서서 간사하니다.”

김미옥 작가·문예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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