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예수, 장례의 원형을 찾아가다

신상목 2026. 10. 26.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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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베다니 시몬의 집에 머무실 때다. 한 여인이 식사 중인 예수께 다가왔다.

예수께서 소란을 잠재우며 한마디 하셨다.

예수의 죽음 맞이, 임종(臨終)은 로마가 이해하지 못한 복음의 거룩한 언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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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길원 목사
하이패밀리 대표·청란교회 담임

예수께서 베다니 시몬의 집에 머무실 때다. 한 여인이 식사 중인 예수께 다가왔다. 여인은 나드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식탁이 술렁였다. 곁에 서 있던 이들이 발끈했다. 300 데나리온이 넘는 값비싼 향유였다. 노동자 1년 치 품 삯을 훌쩍 넘어섰다. ‘구제 기금’으로 쓸 수도 있다며 분통을 터뜨릴 태세였다. 

예수께서 소란을 잠재우며 한마디 하셨다. “가만두어라. 너희는 어째서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이 여자는 지금 나에게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일’을 한 것이다.”(막 14: 6·더 메시지) 

사람들은 향유의 가격을 계산했다. 예수는 사랑의 가치를 헤아리셨다. 이어 더 놀라운 말을 던지셨다. “이 여자는 기회 있을 때, 내 몸에 기름을 부어 내 ‘장례를 준비’ 한 것이다.”(막 14:8) 

베다니에서 향유를 부음, 율리우스 슈노르 폰 카롤스펠트, 1860년, ‘그림 성경’

옛 로마나 현대의 장례는 죽음 다음에 찾아왔다. 로마 귀족은 숨이 끊어진 주검 위에 막대한 향료를 쏟아부어 가문의 부를 뽐냈다. 예수는 살아 숨 쉬는 순간, 온 마음으로 건네는 배웅을 기꺼이 받았다. 

죽음 이후의 차가운 의전과 격이 달랐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십자가 고난을 거듭 예고했다. 찾아올 죽음을 위해 웅장한 묘실을 짓지 않았다. 호화로운 행렬을 꾸미지도 않았다. 제자들과 마지막 식탁에 둘러앉았다. 식탁에서 예수는 겉옷을 벗고 허리에 수건을 둘렀다.손수 제자들의 발을 하나하나 씻겼다.(요 13:4~15) 

로마 권력자는 사람들을 제 발 아래 꿇렸다. 예수는 제자들의 발 아래 무릎을 꿇었다. 식탁은 권위를 뽐내는 자리가 아니었다. 섬김과 용서를 유언으로 남기는 성소였다. 남겨진 것은 ‘섬김의 유산’이었다. 예수의 장례는 숨이 멎고 난 뒤가 아니라 ‘먼저’였다. 오늘날 생전 장례식, ‘엔딩 파티(Ending Party)’의 원형이 아닌가. 

예수의 죽음 맞이, 임종(臨終)은 로마가 이해하지 못한 복음의 거룩한 언어였다. 예수는 살아 있는 자를 온전히 사랑하며 죽음을 맞이했다. 성경은 만찬과 십자가 죽음 가운데 놀라운 사건 하나를 삽입해 두었다. 가룟 유다의 배반이다. 예수는 그의 음모까지도 알고 계셨다. 가룟유다의 발까지 씻기신다. 그 손으로 빵 한 조각을 건넨다. 어찌 이럴 수 있을까. 그는 받아먹고 일어선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요 13:30) 성경에서 가장 서늘한 대목이다. 나도 모르게 소리친다.

“마지막 내려 덮는 바위 같은 어둠을/ 어떻게 당신은 버틸 수가 있었는가?/ 뜨물 같은 치욕을, 불붙는 분노를,/ 에어 내는 비애를, 물새 같은 고독을,/ 어떻게 당신은 견딜 수가 있었는가?”(박두진, 갈보리의 노래 중)

오늘날 우리 장례는 예수의 장례 문법을 전혀 읽지 못하고 있다. 장례는 언제나 뒤늦은 후회로 얼룩진다. 살아서는 차갑게 외면한다. 숨이 멎고 나서야 울음을 터뜨린다. 살아서는 바쁘다는 이유로 밥 한 끼 나누지 못한다. 숨이 멎고 나서야 부산을 떤다. 생전에 하지 못한 말을 관 앞에서 쏟아낸다. 사랑한다고, 고마웠다고, 미안했다고. 정작 그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은 떠나고 없다.

전도자는 이미 오래 전 이런 장례의 허무를 꿰뚫어 보았다. 악한 사람들이 죽어 무덤에 묻혔다. 그런데 장지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그들을 칭찬했다. 전도자는 이를 허탈한 일이라고 탄식했다.(전 8:10, 새번역) 

살아온 삶과 죽은 뒤의 칭송이 어긋난 것이다. 장례의 화려함이 한 생애의 진실까지 바꿀 수는 없다. 추도사가 삶을 대신할 수도 없다. 살아 있을 때의 사랑이 빠진 장례는 아무리 화려해도 공허하다.

로마 귀족들은 이름을 돌에 새겼다. 예수는 여인의 사랑을 복음에 새겼다. 옥합은 깨졌지만 향기는 남았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향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막 14:9)

장례는 죽은 뒤에만 치르는 의식이 아니다. 살아 있는 동안 사랑을 완성하는 일이기도 하다. 예수는 장례의 새로운 문법을 보여주었다. 죽음 이후의 향유를 살아 있는 사랑으로 바꾸었다. 로마가 이해하지 못한 복음의 언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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