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우리 이제 심심해서 어쩌냐... 문화판의 거목 강헌을 애도함

정윤수 2026. 10. 25.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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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찍이 가가거겨를 급히 익히고 자모를 대충 엮어서 소견을 피력하며 살아왔으되 추모사를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이토록 때 이른 추모사를, 향년 64세의 고인을, 활달한 영화제작자이자 뜨거운 문화비평가였고 '딴따라'를 걷어치우고 정명의 좌표를 찾아낸 음악평론가였으며 운명의 투시도를 그린 명리학자이자 과감한 문화행정가였던, 아니 음식이든 카메라든 아! 고인이 일평생 모든 에너지를 투사하여 몰입했던 오디오든(용산전자상가의 고태환 사장은 말한다, 내 온갖 사람을 만났으나 강 선생처럼 투철했던 사람은 없었다고), 옷 갈아입는 거 빼고는 세상의 모든 미를 추적하던 강헌을 이렇게 애도할 줄은 몰랐다.

곧 헌이 형의 모든 기획과 사업과 건강을 챙기면서 더불어 우리 모두를 챙긴 고창서점마을의 이윤호 형이 왔고 정태춘 선생님과 울적하게 앉아있던 우리네 무리들의 따스한 현자 김창남 형이 동석함으로써 우리는 순식간에 80년대의 <새벽>을 거쳐 90년대의 <노래를 찾는 사람들>, <사전심의 철폐 공연>, <월간 예감>, <계간 리뷰>를 지나 세기말 세기초에 너무 일찍 기획했던 아시아 문화 플랫폼 <로고스 앤 파토스>를 지나 노무현 추모 콘서트를 통과하여 <좌파 명리학>에 <걸신이라 불러다오>를 거쳐 작금의 <경기문화재단> 등으로 중단없이 전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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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 소동극 그리고 정명의 좌표... 강헌을 기억하는 사반세기의 기록

[정윤수 기자]

▲  강헌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이사장(대중음악평론가)[문화체육관광부 제공]
ⓒ 연합뉴스
내 일찍이 가가거겨를 급히 익히고 자모를 대충 엮어서 소견을 피력하며 살아왔으되 추모사를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이토록 때 이른 추모사를, 향년 64세의 고인을, 활달한 영화제작자이자 뜨거운 문화비평가였고 '딴따라'를 걷어치우고 정명의 좌표를 찾아낸 음악평론가였으며 운명의 투시도를 그린 명리학자이자 과감한 문화행정가였던, 아니 음식이든 카메라든 아! 고인이 일평생 모든 에너지를 투사하여 몰입했던 오디오든(용산전자상가의 고태환 사장은 말한다, 내 온갖 사람을 만났으나 강 선생처럼 투철했던 사람은 없었다고), 옷 갈아입는 거 빼고는 세상의 모든 미를 추적하던 강헌을 이렇게 애도할 줄은 몰랐다.

눈물 닦기 성가셔서 가을바람 핑계 삼아 몇 번을 망설였으나 <오마이뉴스>가 강헌을 각별히 기억하겠다고 하니 이보다 고마운 일이 따로 없어 고인과 더불어 사반세기 넘게 부대낀 인연을 몇 자 적는다.

장례식, 소동극

장례식장에도 장르가 있다면 강헌의 장례식장은 한바탕 소동극이었다. 20년 넘게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대동맥박리에 의하여 심장이 끝내 작동하기를 멈춘 날, 급히 장례식장을 찾았다. 영정 사진 속 강헌은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서 울었다. 아, 내가 헌이 형에게 엎드려 곡하며 재배를 하는 날이 오다니 이거 자체가 난센스 소동극이었다. 나는 간신히 일어났고 유족에게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섰다.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임진모 형에게 손목을 잡혔다. 그는 이미 울었으나 나를 보고는 다시 울었다. 야, 헌이가 나랑 내가 헌이랑 정말 윤수야 넌 알지, 내 마음 알지. 내가 뭐 다 알기야 하겠어요. 윤수야 그래도 알지 헌이랑 내가. 알죠, 형 마음 알아요. 오래 전 자식을 앞세웠던 진모 형은 강헌과의 애증의 교차로에서 아차 길을 잃고는 윤수야 내 마음 알지, 반복하며 울었다. 다정하여 강헌의 문화기획을 도맡았고 다감하여 고인의 문화행정을 건사해온 공연기획자 주홍미가 진모 형의 눈물을 수습하였다.

나는 일어났다. 영화감독 김홍준이 손목을 잡았다. 윤수씨 하아 이게 참 윤수씨, 헌씨랑 했던 정글스토리 있잖아요, 그거 다시 개봉하려구요. 이렇게 갈 줄 알았으면 서두를 걸, 하아 참. 겨우 자리가 나서 문학평론가 권성우 형 맞은 편에 앉았다. 헌이 형만한 글쟁이가 없어, 우리 리뷰 때가 좋았는데, 헌이 형하고 신나게 놀았지. 아휴, 형 당대의 비평가가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요. 아냐 아냐, 우리야 할 줄 아는 게 독후감 쓰는 건데 헌이 형은 정말 넓고 깊었어, 그런 글쟁이가 없었어.

그때 곡소리가 났다. 꼭 생전의 강헌처럼 생긴, 덩치도 크고 얼굴도 큰 사람이 조문을 끝내고 나서도 육개장을 앞에 놓고 울고 있었다. 영화 <넘버3>로 시작된 인연이었으되 강헌과 더불어 음악영화 다큐영화 남북한합작공동영화 등 무수한 기획을 남기고 지금은 봉준호 감독의 거의 모든 것을 제작하고 있는 서우식 실장이었다. 지금이야 한류 영화 산업의 간판 회사 대표지만 우리에게는 영원한 '실장'인 서우식은, 울었다. 나는 아주 잠깐 그의 덩치 속에 파묻혔다 나왔다. 윤수씨, 우리 이제 심심해서 어쩌냐.

마침 계간 리뷰의 형들이 와서 잠시 그 품을 떠났다. 날카로운 이성의 소유자들인 정준영과 김종엽도 헌이 형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조금 무너졌다. 곧 헌이 형의 모든 기획과 사업과 건강을 챙기면서 더불어 우리 모두를 챙긴 고창서점마을의 이윤호 형이 왔고 정태춘 선생님과 울적하게 앉아있던 우리네 무리들의 따스한 현자 김창남 형이 동석함으로써 우리는 순식간에 80년대의 <새벽>을 거쳐 90년대의 <노래를 찾는 사람들>, <사전심의 철폐 공연>, <월간 예감>, <계간 리뷰>를 지나 세기말 세기초에 너무 일찍 기획했던 아시아 문화 플랫폼 <로고스 앤 파토스>를 지나 노무현 추모 콘서트를 통과하여 <좌파 명리학>에 <걸신이라 불러다오>를 거쳐 작금의 <경기문화재단> 등으로 중단없이 전진했다.

그러는 중에 천하의 귀명창들도 그 분 앞에서는 말수가 줄어든다는 용산의 터줏대감 금강전자의 고태환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아, 고 사장님. 정 선생, 헌씨 덕분에 정 선생을 다 보네. 아, 고 사장님 고맙습니다. 뭘 고마워, 우리 모임이 있거든, 헌씨하고, 1년에 네 번 하루 종일 듣고 먹고 또 듣는 모임인데 그래서 다들 왔어, 헌씨가 참 헌씨가, 네 사장님. 헌씨가 헌씨가, 하는데 서영채 형이 손을 잡았다. 형, 영채 형. 그래 윤수야. 일찍 와서 눈물 좀 보태고 갔다가, 또 왔다. 형. 그래 윤수야. 두 사람은 관포지교다.
▲  고인의 서가
ⓒ 정윤수
주변을 둘러보니 하아 이런 인구학적 특징을 어디서 또 볼 수 있으려나. 어지간하면 직장 동료와 거래처 직원과 학창의 친우들일텐데, 이 장례식장은 문화판의 국산사자음미실, 거의 모든 장르와 협단체와 선후배가 뒤엉켜 있는데 그들끼리도 어인 노릇인지 호상간에 뒤엉켜 있어서 한쪽이 부르면 저 멀리 해장국에 퍼먹던 자가 고개를 드는 상황이라, 오호라 각자는 우선 개별의 점으로 강헌과 연결되었다가 강헌에 의해 선으로 연결되었다가 급기야 면으로 겹쳐져서 각종 사업과 기획과 칼럼과 음반과 냉면과 웨스트레이크 BBSM12로 사무쳐 버렸으니 아무나 붙잡고 우리 헌이 어쩌냐 해도 그러게 말이냐 응대를 하는 문화적 친족들이다.

요즘은 페이스북이 부고장이요, 추모관이라 불가피하게 오지 못한 분들의 추모사 또한 흐르고 넘쳐 눈물의 시인 박상률 선배 또한 페북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으나 항상 곁에 가까이 있는 듯한 사람'이라고 기억했다. 그 외 셀 수 없다.

헌이 형의 마지막 기획은 바로 이 소동극이었다. 다들 모이게 해놓고는 고인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우리끼리 떠들고 있으니 주연 없는 소동극이 따로 없구나.

정명의 좌표

강헌은 쉬지 않고 놀았다. 노는 데 아주 집중했다. 한 때 일과 놀이가 하나 되는 세상이라는 구호가 번다하게 운위되었으나 아주 개인적 차원에서 보면 이 놀라운 경지를 공사 구분 없이 온종일 실천한 사람은 강헌이었다. 일하다가 노는 게 아니라 일이 곧 놀이였다. 놀다가 돈이 급하여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놀이가 곧 글이 되고 사업이 되고 강의가 되었다. 나는 수도 없이 보았다. 그가 조용필에 대하여, 냉면에 대하여, 비틀스에 대하여 신나게 떠들었을 때 아, 녹음해둘 걸 하고 아쉬워하던 수많은 사람들, 강헌은 그들을 위하여 강의를 했고 책을 썼다. 아, 지금도 음성지원으로 들린다, 윤수야 뭐 재미있는 일 없냐.

내가 그를 언제 만났던가. 1990년대가 막 시작하던 무렵이니 사반세기를 훌쩍 넘었다. 그때 <장산곶매> 등 영화 운동 판에 뭔 일이 생겼는데 뜻을 서로 달리하는 사람들이 하루바삐 강헌을 만나는게 갑자기 중요해진 날이었다. 그때 그는 뒤늦게 18개월 방위로 복무 중이었는데 왜 서울의 급한 일을 방위병과 결단내야 하는가, 오직 그게 궁금해서 몇몇 사람과 부산행 기차를 탔고 저녁이 되기 전에 광안리 방파제 옆 테이블에 앉았는데 정작 주인공은 이미 대취한 상태로 나타나는 바람에 공적 담화가 불가능하였다.

그는 그날 집안에 큰 문제가 있었고 그런 이유로 자기는 오늘 죽어야 한다고 중얼거리다가 그만 방파제 밑으로 떨어졌다. 담론을 포기하고 다들 술에 취한 상태라서, 그때나 지금이나 술 한 방울 입에 대지 않고도 천하의 문물을 능히 즐길 수 있다고 여겨 온, 내가 방파제 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횟집 사장님과 함께 거구의 강헌을 끌어올려서, 살렸다.

얼마 후 우리는 과천에서 다시 만났다. 그 무렵 나는 우환으로 갈 곳이 없었고 결혼을 앞둔 그의 아파트에서 한 달을 살았다. 그 한 달이 나의 대학이었다. 강헌 대학의 학생이었다. 우리는 숱하게 들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해금에 아쟁을 들었고 밤에는 브람스로 마무리하였다. 그 무슨 음악감상반 모임인 양 심호흡 한번 못하는 코스츔이 아니라 온 정열을 다 바쳐 스피커를 존숭하였다. 이미 그는 <스테레오음악>에 글을 쓰면서, 나는 왜 브람스가 지루한가 독서백편의자현이라고 하니 100번을 들어봐야겠구나 했으나 24번쯤 반복하여 들었을 때 아, 브람스는 정녕 지루하고녀, 하는 깨달음을 얻은 자였는데, 나는 슬며시 카를로스 클라이버라면 어떠한가 문의하니 4번의 4악장은 록이지 하면서 우린 또 들었다.

그러다가 때가 되었다. 윤수야, 응 형, 한 가지 작은 소망이 있는데, 뭔데? 내가 다음 주에 결혼을 하잖니. 알아 형. 신혼여행을 갔다 오면 이 집에서 너가 안 보였으면 좋겠다, 형. 왜? 내 아무리 천지분간을 못 해도 그 정도 눈치가 없겠어. 그래 미안하다.

나는 그 집을 나왔으나 이 비범한 자를 다른 무리들이 낚아채갈까 봐 내 삶의 영원한 향도자 이윤호 형에게 급보를 띄웠다. 그리하여 우리는 <월간 예감>과 <계간 리뷰>로 시작하여 작전동, 갈현동을 전전하며 이십여 년을 때로는 동고하고 대체로 동락하였다.
▲  고인의 책상
ⓒ 정윤수
이제사 우스갯소리로 말하지만 강헌은 그때 이후로 기나긴 시한부 인생이었다. 방파제 투신은 말년 방위병의 객기라 하더라도 두번의 중대한 교통사고를 겪었고 심장 질환으로 몇 번이나 세브란스 중환자실로 실려갔다. 그 중에 한 번은, 브라질 월드컵 때인가 싶은데, 마지막 인사라도 하라는 의료진의 권면으로 세브란스 중환자실에 들어갔는데 헌이 형은 희미한 숨소리를 내며 손짓을 했다. 어라, 유언인가. 이거 내가 들어도 되나 하면서도 연거푸 손가락을 움직이니 가까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입가에 귀를 바짝 대니 헌이 형이 말했다. 누, 가, 이겼, 냐. 그 절박한 순간에도 강헌은 브라질 월드컵 우승팀이 궁금했던 것이었다. 나는 웃었다. 아직 죽을 때가 아닌가 보다.

그는 죽음의 언저리까지 갔다가 우리에게로 다시 걸어와서는 또 같이 놀았다. 이에 관하여 나의 아름다운 후배이자 친구인 조장훈이 비통한 부고(철들지 않던 내 맘속의 큰 형, 저랑 놀아줘서 고마웠어요 https://omn.kr/2k8jx)로 이미 쓴 바 있어 이로써 갈음하건대 훗날 그가 남긴 무수한 문화적 고투와 유류품으로 남은 글들은 엄정히 논평할 일이 따로 있을 것이다. 그때는 또 그때 가서 냉정하게 돌아볼 일이지만 황망 중에라도 증언하자면 강헌은 문화의 위계와 경계 따위 구분없이 그 모든 것의 좌표를 구축하여 정명을 부여한 평론가다. 그것이 음악이든 냉면이든 오디오든 낱낱의 생애와 맥락과 경로를 민완형사처럼 추적하여 각각이 지닌 문화사적 가치를 부여하고자 하였다. 대중음악으로 한정해봐도 수많은 뮤지션과 수천 장의 음반과 크고 작은 공연들이 그의 집요한 문장과 탐미적 서사에 의하여 불멸의 좌표를 얻었다. 가왕(조용필), 독립군(정태춘), 전복자(서태지) 등의 정명은 단순한 수사학을 넘어 '딴따라'를 예술의 경지로 드높이려는 고인의 필사적인 구호였다. 그는 한국 대중음악의 정명을 위하여 멸사봉공하였다.

뭐 재미있는 거 없냐

헌이 형은 용인 '평온의숲'에 영면했다. 예산 도덕사에 주석하시는 원철 스님이 화장장에서 봉안당까지 집례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야 경목아, 라고 불렀던 친구인데 뜻한 바 있어 출가를 하여 나는 어색하지만 합장으로 예를 갖춰 원철 스님이라고 불렀다. 원철 스님 또한 속세에서 강헌과 이십여 년을 부대낀 인연이다. 헌이 형이 뜨거운 불길로 들어갔을 때 원철 스님은 강헌 영가시여 영가시여 천도의 송을 하며 마침내 울었다. 아니 프로가 울어버리면 우리 같은 아마추어는 곡이라도 하며 엎어지란 말이냐, 내가 한마디 하자 원철 스님은 아직 법력이 부족하여 눈물이 납니다, 하고 울었다. 경목이가 헌이 형을 잘 보내줬어 하고 제주도의 친구에게 소식을 전했다. 전국체전 때문에 비행기표가 동이 나서 함께하지 못한 우리 모두의 오랜 친구 권순범은 전화통을 붙들고, 또 울었다.

나는 마지막 행로까지 다하기 위하여 십수 명의 조문 길을 따라 헌이 형 집으로 갔다. 이근이, 전상규, 김원석, 조길상 등과 함께 강헌의 모든 일을 오랫동안 건사해 온 우리의 '씨더앤배리'(시다바리라고 하면 기분이 영 그러하니 씨더앤배리라고 부르면 좋지 아니한가 했더니 다들 흡족해하여 그리 명명함)의 조장훈이 고인이 어수선하게 남겨 놓은 일들에 질서를 부여했다.
▲  주인의 호명을 기다리며 베란다에서 기립하고 있는 오디오들
ⓒ 정윤수
덕분에 나는 고인의 흔적을 둘러보았다. 당연하게도 우선 오디오가 눈에 들어왔다. 스레숄트 빠워암프를 기반으로 하여 거실에 한 세트, 중간 방에 또 한 세트, 작은 방에 또 한 세트, 주방 식탁 위에 한 세트,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기기들은 베란다에서 고인을 위해 도열하고 있었다. 고인의 책상 위에는 그가 반세기 동안 살아낸 모양 그대로 온갖 사물들이 무질서하게 놓여 있었다. 클라이버의 베토벤 음반과 대중음악 자료들과 학술서들, 오직 이 사물들에 질서와 내러티브를 부여할 수 있는 자는 강헌뿐이니 나는 다만 짐작으로 응시할 뿐이다. 혹시라도 친우 관계를 재는 저울이 있다면 아무도 그 오른편에 오르기를 주저하게 만드는, 고인의 참된 친구 이윤호 형의 고창서점마을 한 켠에 헌이 형의 유류품 몇 점이라도 남겨서 '헌 집ZIP'이라 명명하여 모시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렇게 헌이 형과 헤어지고 나서 망연한 시간을 보내다가 이비인후과 예약 알림을 들었다. 동네 이비인후과에 가서 청력검사를 받았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진동과 주파수 검사를 했고 단어 검사를 했다. 반, 양, 서, 인, 직, 미, 동... 무의미한 단어들이 흘러갔다. 나는 간호사의 지시에 따라 그 단어들을 소리내어 말했다.

헌이 형과 나는 서로에게 청력 검사를 권했다. 음악이 아니라면 달리 무엇으로 극한의 아름다움을 구하겠는가. 그랬는데 나는 형을 보내고 혼자서 청력검사를 받고 앉아 있다. 이제 누가 있어 담양에 일을 보러 갔다가 목포까지 가서 점심을 먹겠는가. 이제 누가 있어 사문난적을 엎어버리고 광휘로운 음악과 고졸한 문장을 더불어 탐닉하겠는가. 희, 과, 엽, 중, 자, 열... 나는 무의미한 낱말을 반복하면서, 울었다.

강헌(姜憲)

1962년 3월 11일 생, 2026년 10월 20일 몰
향년 64세,
딸 소이와 아들 동재가 용인 '평온의숲' 봉안당 2-22322호에 모셨다.

/ 정윤수 (고인의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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