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작가의 욕망 부채질한, 감춰진 자서전 원고

조영준 2026. 10. 25.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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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콜린 후버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마이클 쇼월터 감독의 <베러티>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베러티(앤 해서웨이 분)의 성공을 보여준 뒤, 1년 후 무명작가 로웬(다코타 존슨 분)의 삶으로 시선을 옮긴다.

이 글은 로웬에게 베러티의 미완성 소설만큼이나 큰 관심사가 된다.

반면, 로웬은 저택이 감추고 있는 사실을 밝히고 베러티의 모든 것을 획득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베러티가 남긴 글을 일방적으로 읽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위치에 놓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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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베러티>

[조영준 기자]

▲  영화 <베러티> 스틸컷
ⓒ 소니 픽쳐스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콜린 후버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마이클 쇼월터 감독의 <베러티>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베러티(앤 해서웨이 분)의 성공을 보여준 뒤, 1년 후 무명작가 로웬(다코타 존슨 분)의 삶으로 시선을 옮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출간했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작가다. 그러던 중 사고 이후 몸을 움직이거나 말할 수 없게 된 베러티를 대신해 그의 인기 시리즈 '고귀한 미덕'을 완성해 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베러티의 저택을 찾은 로웬은 그가 남긴 자료와 메모를 뒤지다 숨겨진 자서전 원고를 발견한다. 결혼과 출산, 아이들의 죽음에 얽힌 충격적인 고백이 쓰인 글이다. 그동안 베러티의 남편 제러미(조쉬 하트넷 분)과 가까워진다. 영화는 한 사람의 비밀을 파헤치는 이야기처럼 출발하지만, 차츰 그 사람을 의심하는 여자가 얼마나 그를 닮아가는지를 보여준다.

베스트셀러 작가의 이름을 빌리게 된 작가

로웬과 제러미는 우연한 사고를 계기로 처음 만난다. 출판사 미팅에 가던 로웬은 눈앞에서 일어난 교통사고로 피를 뒤집어쓰고, 근처에 있던 제러미의 도움을 받는다. 그런데 미팅 자리에서 다시 만난 그는 베스트셀러 작가인 베러티의 남편이다. 제러미는 아내가 로웬의 소설인 '오픈 엔디드'를 좋아했다며 대필을 제안한 이유를 설명한다. 좀처럼 인정받지 못하던 작가에게 갑자기 주어진 인정과 기회다. 다만 여기에는 모순이 하나 존재한다. 로웬이 제안받은 일은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 아니라 베러티를 대신해 쓰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문장을 쓴다고 해도 베러티의 이름으로 세상에 소개될 것이다.

대필 제안을 수락하고 베러티가 남긴 자료와 메모를 확인하기 위해 그의 저택을 찾지만, 그곳에서 마주한 베러티는 조언조차 해줄 수가 없는 상태다. 전신 마비 상태로 꼼짝도 하지 못하는 모습. 한편, 로웬은 서재에서 감춰진 USB 하나를 발견한다. '받아들일 수밖에'라는 제목의 문서, 인간은 누구나 추악한 면을 감추고 산다는 취지로 시작되는 자서전이다. 이 글은 로웬에게 베러티의 미완성 소설만큼이나 큰 관심사가 된다. 그의 이름을 빌려 대필하고자 했던 작가가 이제 그의 과거까지 살피기 시작한 것이다.

이 관계를 결정적으로 바꾸는 것은 제러미의 고백이다. 그는 로웬의 소설을 좋아한 사람이 베러티가 아니라 자신이었다고 고백한다. 로웬에게는 이성적 호감의 표시지만, 한편으로는 제러미가 아내의 이름과 명성을 빌려 로웬을 집으로 끌어들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처음 로웬은 자신이 베러티의 선택으로 이곳에 왔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제러미가 꾸민 설명을 믿었던 것이나 다름없다. 이 과정은 로웬이 베러티의 글을 읽고 감춰진 진실을 확인하는 일련의 과정과 닮아 있다.
▲  영화 <베러티> 스틸컷
ⓒ 소니 픽쳐스
사랑을 독점하고자 했던 두 여성

베러티의 자서전은 남편이 집을 비운 사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내용과 출산 이후의 감정으로 시작된다. 쌍둥이 하퍼와 크루의 탄생이 기쁨보다 고통에 가깝게 묘사되고, 아이들에게 남편의 관심을 빼앗겼다는 불만도 드러난다. 아이들을 방치하고 잔혹하게 대했다는 고백의 대목에서 로웬은 구토할 만큼 크게 충격받기도 한다. 딸 하퍼의 죽음에 관한 서술에 이르러서는 베러티를 향한 의심이 더 커진다. 물론 이 원고에 쓰인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한 작가의 서술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는 이를 따라 사건을 재현해 관객들에게 보여줄 뿐, 그에 대한 정확한 근거나 증거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조명하지 않는다.

이 원고에서 베러티는 제러미의 사랑을 아이들과 조금도 나누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그런 인물이 하나 더 있다. 현재의 로웬 역시 제러미와 가까워지며 베러티를 자신과 그사이에 놓인 불편한 존재로 바라본다. 두 사람이 동일한 행동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원고 속 베러티가 두 아이를 향한 제러미의 마음을 질투하고, 로웬은 베러티가 여전히 그의 아내라는 사실을 불편해 하는 등 그 대상도 다르다. 다만 두 사람이 한 남자의 애정을 온전히 자신에게로 돌리고 싶어 한다는 점, 그 애정을 가로막는 상대를 점점 적대하게 된다는 점은 분명히 겹쳐 보인다.

로웬이 제러미와 키스를 나누던 중 복도에 서 있는 베러티를 목격하는 장면은 이런 관계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로웬은 베러티가 자신들을 지켜봤다고 주장하지만, 제러미는 움직일 수 없는 아내에게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단정한다. 그렇게 진위가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로웬은 그와 육체적 관계를 이어간다. 그의 원고 속 베러티의 질투와 집착을 혐오하면서, 자신 역시 제러미를 독점하려는 마음에 휩싸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돌아보려 하지 않는 것이다. 베러티의 상태가 어떤가 하는 문제보다는 그 존재 자체가 점점 방해물로 느껴진다는 부분이 점점 더 중요해진다.
▲  영화 <베러티> 스틸컷
ⓒ 소니 픽쳐스
감춰진 원고가 부채질하기 시작한 욕망

로웬은 베러티의 집에서 생활하고 집안의 비밀을 알게 되는 동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욕망을 키운다. 처음에는 꼼짝도 할 수 없는 베러티를 동정했을지 모르지만, 그가 남긴 자서전 원고를 읽은 뒤로는 경계하고 미워할 이유까지 얻을 수 있게 된다. 베러티와 단둘이 남았을 때 그의 모든 것을 빼앗겠다고 선언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두 여성 인물의 처지를 반대로 위치시킨다. 베러티는 지금 물리적으로는 움직일 수 없지만 글로 자신을 드러내고 타인의 심리를 움직이는 능동적인 인물이 된다. 반면, 로웬은 저택이 감추고 있는 사실을 밝히고 베러티의 모든 것을 획득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베러티가 남긴 글을 일방적으로 읽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위치에 놓이게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글의 진위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영화에는 적어도 중후반부까지 글의 내용에 대한 진위 여부가 가려지지 않고 로웬은 모든 내용을 그대로 믿는다. 순수한 믿음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얻기 위해 한 인간을 너무 쉽게 악인으로 확정해 가는 과정이다.

영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베러티가 남긴 원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기록을 제시하며 서사를 매듭짓는다. 영화가 보여주는 장면들의 진위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믿음과 욕망에 따라 이미 어떤 선택을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로웬은 영화의 시작과 끝을 비교해 볼 때 그 변화에 가장 크게 휘둘리는 인물이 된다. 베러티와 로웬, 두 작가의 투영적 관계가 날카롭게 드러나는 지점이다. 타인의 추악함에 경악하던 이가 자신의 욕망 앞에서는 별로 다르지 않은 태도를 보인다는 것. 이 영화 <베러티>가 마지막까지 다시 돌아보게 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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