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자(들)' 세 주인공이 맞닥뜨린 권력의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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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8월 15일, 서울 국립극장에서 열린 광복절 경축식 도중 총성이 울렸다.
영화는 대통령 저격 사건과 동아일보 광고 탄압 사건을 엮어 유신체제의 권력구조와 언론통제, 한일 경제협력을 둘러싼 이해관계까지 끌어들인다.
좋은 거버넌스는 단순한 조직의 효율성을 넘어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참여와 권력에 대한 견제, 의사결정의 책임성을 보장하는 체계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암살자(들)>은 국가 권력구조 안에서 서로 다른 조직의 거버넌스가 충돌하는 영화로 읽힌다.
<암살자(들)>은 높은 실행력을 갖춘 조직도 권력을 부당하게 행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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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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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암살자(들)> 포스터 영화 <암살자(들)> 포스터 |
| ⓒ (주)하이브미디어코프 |
허진호 감독의 영화 <암살자(들)>(2026)은 이 사건을 모티브로 공식 설명과 그 주변에 남은 의혹을 추적하는 팩션(faction) 영화다. 사건 현장에 있던 형사 박철구(유해진), 진실을 쫓는 동성일보 사회부장 김재환(박해일), 취재에 뛰어든 기자 한영일(이민호)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영화는 대통령 저격 사건과 동아일보 광고 탄압 사건을 엮어 유신체제의 권력구조와 언론통제, 한일 경제협력을 둘러싼 이해관계까지 끌어들인다.
표면적으로는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들과 은폐하려는 권력의 대결이다. 그러나 조직과 권력의 관점에서 읽으면 선악의 충돌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보인다. 기자와 일부 경찰, 대통령 경호조직은 저마다 의사결정 체계와 행동 원칙을 갖추었지만 행사할 수 있는 권한과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은 전혀 다르다.
올바른 목적과 절차를 갖춘 조직이 현실의 권력관계에서 반드시 우위에 서는 것은 아니며, 부당한 목적을 좇는 조직도 권력과 자원을 쥐면 높은 실행력을 발휘한다. 영화는 이러한 역설을 통해 선한 거버넌스와 악한 거버넌스의 대립을 넘어, 권력의 배치와 장악 방식이 조직의 목적과 제도의 실제 작동을 어떻게 좌우하는지 보여준다.
좋은 거버넌스는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ESG의 한 축인 거버넌스(governance)는 환경(E)이나 사회(S)와 달리 특정 활동 영역이 아니라 조직의 의사결정과 운영 방식에 초점을 둔다. 어원은 배의 방향을 조종한다는 뜻의 그리스어와 라틴어에서 나왔고, 오늘날에는 투명성과 책임성 같은 원칙에 따라 조직의 방향과 운영을 정하는 체계를 가리킨다. 구체적으로는 누가 결정하는가(의사결정 주체), 어떤 절차를 거치는가(과정), 결정과 실행을 뒷받침하는 장치는 무엇인가(제도)를 아우른다.
그러나 세 요소가 갖추어졌다고 해서 조직이 공정하거나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것은 아니다. 형식상 적법한 절차를 밟으면서도 특정 집단 이익을 위해 결정이 내려질 수 있고 공식 권한과 실제 영향력이 서로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다.
세계은행은 좋은 거버넌스의 핵심으로 포용성과 책임성을 강조하며, 유엔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위원회(UN ESCAP)는 참여·투명성·법치주의·효과성과 효율성 등을 포함한 여덟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좋은 거버넌스는 단순한 조직의 효율성을 넘어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참여와 권력에 대한 견제, 의사결정의 책임성을 보장하는 체계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암살자(들)>은 국가 권력구조 안에서 서로 다른 조직의 거버넌스가 충돌하는 영화로 읽힌다.
국가 거버넌스 아래 충돌하는 세 조직
영화에는 목적과 의사결정 체계가 다른 세 조직이 등장한다. 진실을 취재하고 보도하려는 언론조직, 사건을 수사하고 법적 절차에 따라 진상을 규명해야 하는 경찰조직, 대통령의 안전을 책임지는 경호조직이다. 언론은 취재 독립성과 공적 감시를, 경찰은 적법한 수사와 증거에 따른 판단을, 경호조직은 지휘체계와 신속한 명령 집행을 중시한다.
이들은 국가의 제도적 질서 안에서 서로 다른 기능을 맡지만 관계는 대등하지 않다. 유신체제에서는 국가권력이 대통령에게 집중돼 기관 사이의 견제와 균형이 제한적이었다. 경찰과 경호조직은 법적 임무가 달라도 정치권력의 영향에서 자유롭기 어려웠고, 국가기관이 아닌 언론 또한 통제와 압력에 노출돼 있었다.
영화에서 기자와 일부 경찰은 진실 규명이라는 공통 목적을 좇는 반면, 경호조직으로 대표되는 권력기관은 체제 보호와 권력 유지를 앞세운다. 전자가 투명성과 책임성, 법치주의를 실현하려 한다면 후자는 위계와 통제, 조직의 실행력으로 목적을 관철하려 한다. 다만 이들의 대립은 영화적 서사일 뿐 실제 역사적 사건의 배후 관계가 입증됐다는 뜻은 아니다.
세 조직의 갈등은 운영 방식의 차이에 그치지 않고, 결과가 권력의 불균등한 배분에 따라 갈리는 구조적 문제를 드러낸다. 개별 조직이 올바른 원칙을 갖추었더라도 상위 권력구조가 독립성을 보장하지 않으면 좋은 거버넌스는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
거버넌스와 권력구조, 조직을 움직이는 실질적 힘
거버넌스가 의사결정의 규칙과 제도, 행위자 사이의 관계를 포괄한다면 권력구조(power structure)는 그 관계에서 누가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해 다른 조직의 행동과 결정을 좌우하는지에 주목한다.
두 개념은 분리되지 않는다. 다만 의사결정 주체와 절차, 제도에만 초점을 둔 형식적 분석으로는 권력의 장악과 통제, 비공식적 영향력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조직이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려면 누가 조직 목적을 규정하고 정보를 통제하며 인사권과 자원배분권을 쥐는지, 다른 조직이 결정에 개입하거나 공식 절차를 무력화할 수 있는 힘이 어디에 몰려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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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암살자(들)> 스틸컷 영화 <암살자(들)> 스틸컷 |
| ⓒ ㈜하이브미디어코프 |
영화에서 진실을 추적하는 인물들은 서로 다른 위치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같은 의문에 도달한다. 광복절 경축식 현장 경호에 투입됐던 형사 박철구는 자신이 목격한 총격 상황과 감식 결과가 공식 설명과 어긋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처음에는 책임 문제로 곤경에 처한 동료를 지키려 했지만, 점차 사건의 실체를 추적하게 된다.
동성일보 신입 기자 한영일은 저격범이 제압된 뒤에도 총성이 한 차례 더 울렸다는 기억을 놓지 않고, 저격범 문태광의 행적을 취재하기 위해 일본으로 향한다. 사회부장 김재환은 이들이 확보한 증거와 증언을 모아 사건의 의혹을 보도하려 한다. 현장에서 여섯 차례 총성이 울렸지만 발견된 탄환은 네 발뿐이고, 저격범의 위치에서는 사격하기 어려웠던 고등학생 최승화가 사망했다는 사실은 공식 발표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킨다.
그러나 진실을 추적할수록 조직 내부의 압력도 거세진다. 감식계장 이현도(박지환)는 현장 증거의 조작 가능성을 감지하면서도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며 물러서고, 박철구는 해임 위기에 몰린다. 기자들 역시 취재와 보도를 가로막는 압력에 직면한다.
이들은 증거에 따른 판단과 직업적 독립성을 지키려 하지만 개인의 의지가 곧 조직의 결정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자는 의혹을 보도할 수 있어도 수사나 공적 판단을 강제할 권한이 없고, 경찰 역시 정치적 개입을 막을 제도적 독립성이 없다면 수사권을 온전히 행사하기 어렵다. 개인의 직업윤리가 조직의 투명성과 책임성으로 이어지려면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적 조건이 필요하다.
반면 영화에서 권력기관은 정보와 인사권, 물리적 강제력을 장악해 조직의 목표를 관철한다. 명령은 위계에 따라 신속하게 집행되고 자원은 특정 목적에 집중된다. 반대 의견을 수용하거나 조정하는 절차가 생략되면서 단기적으로 높은 실행력을 발휘한다.
여기서 역설이 드러난다. 정당한 목적과 원칙을 추구하더라도 이를 실현할 권한이 부족하면 무력해지고, 부당한 목적을 가진 조직도 권력과 자원을 장악하면 높은 효율을 발휘한다. 그러나 효율이 곧 정당성은 아니다. 목표를 얼마나 잘 달성하느냐와 그 목표가 공익에 맞느냐는 별개다.
세계은행의 포용성과 책임성 기준으로 보면 영화 속 권력기관은 실행력은 높아도 외부의 문제 제기를 배제하고 책임 추궁을 차단한다. 불리한 정보와 반대 의견이 막히면 잘못된 판단을 고칠 기회가 줄고 권력 유지가 조직의 목적보다 앞설수록 자기교정 능력은 떨어진다. 권력 집중은 효율을 높이는 동시에 견제와 자기교정의 가능성을 약화한다.
진실을 발견하는 권한과 진실을 공인하는 권력
박철구와 김재환이 부딪힌 한계는 진실을 밝혀내는 일과 그것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일이 별개임을 보여준다. 형사는 현장에서 단서를 찾고 기자는 증언과 자료를 대조해 사건의 실체에 다가가지만, 이들이 확보한 사실이 곧 공식적인 진실이 되지는 않는다. 권력은 이미 일어난 사실을 바꾸지는 못해도 어떤 증거가 공개되고 어떤 설명이 공식 기록으로 남을지는 통제할 수 있다.
수사기관은 증거의 수집과 공개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정부는 공식 발표로 사건의 해석을 주도하며 언론통제까지 더해지면 권력의 설명에 어긋나는 사실과 의혹은 공론장에서 밀려나기 쉽다. 진실을 발견하는 능력과 그것을 공적으로 인정받게 하는 권한 사이에는 근본적인 불균형이 있다. 사회적 인식을 좌우하는 쪽은 사실을 밝힌 사람이 아니라 그 사실의 공개와 해석을 통제하는 권력이다.
이는 곧 책임성의 문제와 직결된다. 권력기관이 자신의 결정과 행동을 설명할 의무를 피하고 외부 검증을 막으면 진실을 규명하고 잘못을 바로잡는 제도적 기능은 약해진다. 그 빈자리를 개인의 양심과 용기가 메우지만, 제도의 뒷받침이 없는 진실 추구에는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다.
선한 권력보다 중요한 것은 권력을 통제하는 구조다
박철구와 김재환, 한영일은 진실을 추적하지만 조직의 압력 앞에서 한계를 드러낸다. 이들의 좌절은 개인의 양심과 직업윤리만으로 권력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수사의 독립성과 언론의 자유가 제도적으로 보장되지 않으면 진실 규명은 개인의 용기와 희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권력기관이 외부의 검증과 책임 추궁에서 벗어나면 공적 임무보다 권력의 보존을 앞세울 위험이 커진다.
<암살자(들)>은 높은 실행력을 갖춘 조직도 권력을 부당하게 행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좋은 목적과 절차가 실제 성과로 이어지려면 이를 뒷받침할 권한과 자원, 권력 남용을 견제하고 잘못된 결정을 바로잡을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선한 권력자가 등장하는 일이 아니라 권력자의 선악에 따라 조직의 운명이 좌우되지 않도록 만드는 구조다. 좋은 거버넌스는 특정한 권력자의 선의에 의존하지 않고 누구도 권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할 수 없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암살자(들)>을 둘러싼 현실의 논란에도 적용된다. 역사적 사실과 영화적 상상력의 경계를 어디에 둘 것인지, 서로 다른 역사적 해석을 어떻게 검증하고 오류를 수정할 것인지, 그 과정에서 창작과 비평의 자유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가 쟁점이다.
좋은 거버넌스는 특정한 해석을 강제하거나 논쟁을 종결하는 데 있지 않다. 서로 다른 주장이 제기되고 증거와 논증을 통해 검증되며 반박과 수정이 가능한 공론장을 보장하는 데 있다. 의견의 충돌과 대화 역시 그 과정의 일부다.
<암살자(들)>을 둘러싼 논쟁은 한 편의 영화에 대한 찬반에 그치지 않는다.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예술을 어떻게 창작하고 비평하며 수용할 것인가, 그 사회적 기준과 절차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해석을 서로 검증하고 수정하는 그러한 대화가 곧 역사를 다루는 예술의 거버넌스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ESG비즈니스리뷰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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