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은폐된 허구' 직시한 무라카미 류 별세

이준목 2026. 10. 24.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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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69> <오디션> 등의 작품을 통하여 일본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꼽히던 무라카미 류가 별세했다.

23일 NHK 등 일본 현지 언론들은 무라카미가 지난 17일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했다.

무라카미는 동명이인인 무라카미 하루키와 함께 1980년대 이후 일본 문학계를 대표하는 양대 산맥으로 꼽힌다.

무라카미의 자전적 경험담을 바탕으로 한 소설은 첫 작품부터 미군기지 주변에 모여 사는 젊은이들의 마약과 섹스, 폭력 등 도발적인 설정과 묘사를 선보이며 일본 사회에 거대한 충격을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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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별세 소식... 현실 사회 구조의 모순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 탐구

[이준목 기자]

▲  일본 베스트셀러 작가 무라카미 류
ⓒ 교도=연합뉴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69> <오디션> 등의 작품을 통하여 일본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꼽히던 무라카미 류가 별세했다.

23일 NHK 등 일본 현지 언론들은 무라카미가 지난 17일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했다. 향년 74세, 유족의 뜻에 따라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진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과 오랫동안 함께 작업해온 일본의 유명 출판사 겐토샤 북스는 공식 계정을 통해 "늘 젊은 세대를 향해 강렬한 메시지를 전해온 무라카미 작가의 갑작스러운 별세 소식에 깊은 슬픔을 금할 길이 없으며, 삼가 애도의 뜻을 표한다"고 고인을 추모했다.

무라카미는 동명이인인 무라카미 하루키와 함께 1980년대 이후 일본 문학계를 대표하는 양대 산맥으로 꼽힌다. 1952년생인 무라카미는 일본에서 학생 운동이 쇠퇴하던 시기에 젊은 시절을 보내며 무기력하고 냉소적이면서도 한편으로 기성세대와 질서를 불신하던 '시라케 세대(しらけ世代, 일본의 1950~1960년대생)'를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주일 미군 기지가 들어서 있던 나가사키현 사세보시에서 출생한 무라카미의 성장기는, 그의 대표작 <69> 속 배경처럼 록 음악과 히피같은 자유분방한 미국식 문화와 엄격하고 보수적인 일본의 전통 문화가 뒤섞이며, 전후 일본의 사회적 모순이 교차하는 혼돈의 현장이었다. 이는 훗날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과 작품세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무라카미는 무사시노 미술대학교 재학 중이던 1976년, 24세의 나이에 데뷔작이자 대표작으로 꼽히는 첫 소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무라카미의 자전적 경험담을 바탕으로 한 소설은 첫 작품부터 미군기지 주변에 모여 사는 젊은이들의 마약과 섹스, 폭력 등 도발적인 설정과 묘사를 선보이며 일본 사회에 거대한 충격을 안겼다.

이후 무라카미의 시선은 일관되게 현실 사회 구조의 모순이 인간의 운명과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탐구하는 데 집중해왔다. <코인로커 베이비스>에서는 사물함에 영아유기된 두 아이의 잔혹과 성장과 복수를 통하여 집단주의 사회의 폭력성을 포착했다. <러브 앤 팝>에서는 일본의 사회문제가 된 원조교제, <미소 수프>에서는 연쇄살인과 인간의 폭력성을 담아냈으며, <사랑과 환상의 파시즘>에서는 냉전 해체 이후 경제적-사회적 혼란이 어떻게 새로운 권력을 탄생시키는지 과정을 조명했다.

또한 북한의 일본침공을 다룬 <반도에서 나가라>나 2차대전 이후 평행세계의 일본을 다룬 <5분 후의 세계>에서는, 가상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국가라는 거대 시스템이 위기 앞에서 얼마나 무능하게 무너질 수 있는가를 고발했다. 무라카미의 또다른 대표작으로 꼽히는 <희망의 나라로 엑소더스>에서는 무기력한 교육 시스템을 거부하고 스스로 대안적 경제 생태계를 구축하는 청소년들을 통해 일본 사회의 경직성을 정면으로 꼬집기도 했다.

이러한 무라카미의 방대한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 철학은, 국가나 사회 집단이라는 거대한 허구에 가려진 현실의 어두운 환부를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한다는 저항 정신이었다. 또한 구원을 기대할 수 없는 암울한 세상 속에 던져진 인간이, 과연 개인의 노력과 의지만으로 무너진 사회적 질서와 공동체를 복원해낼 수 있는가라는 실험적 질문이기도 했다.

"사람은 그렇게 단순한 생물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자신조차도 자기의 전부를 알지 못하는 게 인간이다. 그런데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타자를 컨트롤하려고 하거나, 사회적인 틀 속에 사람들을 집어넣고 사람의 자유를 구속할 수 있을까? 인간은 좀더 겸허해져야 하지 않겠나 라는 생각을 표현하고 싶었다." (2005년 방한 인터뷰에서)

무라카미가 바라본 일본 사회는 겉보기에는 한쪽에는 문제없이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듯하지만, 그 이면에는 질서가 충돌하고 무너지고 있는 모순의 현장이었다. 물질적 풍요에 도취되었던 버블경제의 붕괴 이후, 일본 사회는 실제로 빈부 격차와 세대 갈등, 전통적인 공동체 해체와 개인주의 득세 등으로 극심한 사회적 혼란에 직면했다.

무라카미는 기성세대로 성장하면서 그러한 일본의 가치관 변화와 흥망성쇠를 생생하게 목격했다. 확고해 보이는 전통적 질서와 안정된 사회가 사실은 '은폐된 허구'에 불과할 수 있다는 불안감과 냉소는 무리카미의 대표작에서 일관되게 나타난 문제의식이었다.

이처럼 무라카미의 소설은, 작가 본인의 페르소나가 반영된 지독한 염세주의와 반사회적 기질을 지닌 캐릭터들을 내세워 외면하고 싶은 일본 현대사회의 현실과 전통적 가치관의 충돌을 보여준다. 마조히스트, 원조교제, 연쇄살인 같은 가학적이고 비정상적 행위들이, 사실은 현실에 엄연히 실존하는 우리의 그림자같은 모습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무라카미의 극중 인물들이 겪는 사건사고들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구속의 허구성이 인간이 가진 다면성과 충돌하면서 벌어지는 모순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무라카미의 작품에서 묘사된 코인로커 영아 유기, 어긋난 신념을 지닌 극단주의자들의 테러, 신자유주의의 확산, 마약 문제, 청소년의 동반자살과 은둔형 외톨이 증가 등, 소설 속 내용과 비슷한 사건들이 이후 모두 실제 현실로 벌어지기도 했다. 이를 두고서 시대 현상을 앞서 내다본 작가의 선견지명이 재조명되기도 했다.

정작 무라카미 본인은 자신이 소설을 통하여 미래를 예견했다는 데는그리 동의하지 않았다. 무라카미는 항상 '사회가 변화하는 방향과 징후에 항상 관심을 기울여야한다'고 주장해왔고, 자신의 작품에서 묘사된 설정들 역시 논리적인 직관과 추리의 결과물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그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불편한 진실을 사회적으로 보지 않으려고 외면하기 때문에 못 보는 것일 뿐"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무라카미는 1990년대 이후 일본 문학이 한국 출판시장에서 인기를 얻는 과정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와 함께 주목받았다. 두 사람은 성이 같고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다는 이유로 일본에서 '더블(W) 무라카미'로 불렸다.

하루키가 상실과 고독, 개인의 내면세계를 감성적 서사로 풀어냈다면, 류는 폭력과 성, 사회경제적 위기를 직접적이고 냉소적인 언어로 묘사하는 스타일에 가까웠다.한국에서도 청년층 사이에서 확산된 일본 현대문학 열풍 속에서 무라카미의 팬덤이 형성됐다. 무라카미 특유의 쿨한 문장력과 거침없는 서사의 에너지, 도시적 데카당스(퇴폐미)에 매료된 많은 창작자들과 청년들이 영감을 얻었다.

한편으로 무라카미의 다재다능함과 활동반경은 소설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영화감독, 각본가, 방송진행자, 잡지 편집장, 공연 연출자, 화가, 라디오 DJ, 사진작가 등 다양한 활동을 넘나들었다. 무라카미는 영화 <도쿄 데카당스> 등의 작품을 직접 연출하고 <오디션>의 영화화 대본을 집필했다. 경제 분야에서도 깊은 관심을 보이며 이메일 경제 매거진 <JMM>을 발간하고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TV도쿄의 경제 대담 프로그램 <캄브리아 궁전>을 약 20년간 진행하며 주요 기업 경영자들과 인터뷰를 통해 일본의 경제와 사회 현실을 조명했다.

또한 무라카미가 집필한 청소년 진로및 직업 안내서인 <13세의 헬로워크>는 발매 이후 한국과 일본에서 모두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어둡고 염세적인 작품만 쓴다는 선입견과는 달리, 무라카미는 다양한 직업과 노동의 의미를 강조하며 미래의 사회를 이끌어나갈 청소년 교육에도 깊은 관심을 보인 인물이었다. 2023년에는 70세 소설가가 자신의 과거와 욕망을 돌아본다는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유튜버>를 발표하며 노년에 접어들어서도 창작활동을 놓지 않았다.

무라카미의 삶은 평생 일본의 보수적 권위주의와 기성 정치권력의 무능을 끊임없이 직시했던 리얼리스트였다. 그는 특정한 이념이나 국가주의와는 철저히 거리를 둔 채 개인이 사회속에서 직면해야하는 고뇌와 문제의식을 통찰하려는 작가정신에 충실했다. 또한 나이가 들어서도 현실과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지금의 세상이 어떻게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탐구와 도전을 멈추지 않은 실천주의자이기도 했다.

"세상이 바뀌기를 수동적으로 기대하지 말고 먼저 변해야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다." 반세기 동안 그가 꾸준히 제시해온 화두는, 화려한 문명의 이면 속에 여전히 결핍과 불안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변화와 소통의 가치를 일깨우는 유산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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