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2인자와 배후 실세... 이승만 뒤흔든 두 여인

김종성 2026. 10. 24.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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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비 윤씨, 정현왕후 윤씨, 엄귀인(귀인 엄씨), 정귀인(귀인 정씨) 등이 경쟁했던 조선 성종시대 여인천하와 더불어, 인현왕후 김씨, 장희빈(희빈 장씨), 최숙빈(숙빈 최씨) 등이 경쟁했던 숙종시대 여인천하는 후세의 한국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날 오후 5시 김포공항에 착륙하고 조선호텔에 여장을 푼 이승만이 다음날 아침에 가장 먼저 전화 건 곳은 한때 하와이에서 공부한 윤치영(1898~1996)의 집이다.

전화를 받고 단숨에 달려간 윤치영은 고국 사정에 어두운 이승만에게 국내 정세를 알려주고 누구를 만나야 할지를 알려주는 역할을 맡았다.

그렇게 해서 프란체스카는 이승만 정권의 배후 실세가 됐지만, 그에게는 임영신이 여전히 장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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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시대별곡] 임영신과 프란체스카, 이승만 시절의 여인천하

[김종성 기자]

폐비 윤씨, 정현왕후 윤씨, 엄귀인(귀인 엄씨), 정귀인(귀인 정씨) 등이 경쟁했던 조선 성종시대 여인천하와 더불어, 인현왕후 김씨, 장희빈(희빈 장씨), 최숙빈(숙빈 최씨) 등이 경쟁했던 숙종시대 여인천하는 후세의 한국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두 시기의 여인천하보다 강렬했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대한민국 현대사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있었다. 1900년 6월 15일 오스트리아에서 출생한 뒤 동쪽 한국에 정착한 프란체스카 도너, 1899년 12월 22일(음력 11.20) 지금의 충남 금산에서 태어난 뒤 미국에서 공부하다가 귀국한 임영신이 그 중심에 있었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글로벌한 삶을 살았던 두 여성은 '한국 현대사판 여인천하'의 주역이다. 폐비 윤씨 등이 태조 이성계의 5대손을 둘러싸고 경쟁을 벌이고 인현왕후 등이 13대손을 둘러싸고 그렇게 했다면, 프란체스카와 임영신은 18대손을 가운데 놓고 그런 양상을 만들어냈다.

이승만이 귀국 후 부른 이 여성

이야기의 출발점은 이승만이 33년 만에 귀국한 1945년 10월 16일이다. 이날 오후 5시 김포공항에 착륙하고 조선호텔에 여장을 푼 이승만이 다음날 아침에 가장 먼저 전화 건 곳은 한때 하와이에서 공부한 윤치영(1898~1996)의 집이다. 1973년 4월 6일 자 <동아일보> '비화 제1공화국' 제3회에 따르면, 이 전화를 받은 사람은 윤치영의 아내 이은혜(1906~1980)다.

이 통화는 이승만보다 23세 어린 윤치영이 이승만의 핵심 참모로 부상하는 계기가 됐다. 전화를 받고 단숨에 달려간 윤치영은 고국 사정에 어두운 이승만에게 국내 정세를 알려주고 누구를 만나야 할지를 알려주는 역할을 맡았다. 친일파 윤치영이 들려주는 '피아 구분법'은 이승만의 이후 정치행보에 영향을 끼쳤다.

윤치영은 이승만의 정치적 협력자들뿐 아니라 생활 도우미까지 선정했다. 윤치영은 아내 이은혜가 이승만의 잡무를 보살피도록 했다. 그런데 10월 17일 아침 대화 때 윤치영이 추천하지 않았지만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이승만의 여성 조력자가 있다. 1923년에 미국에 갔다가 이승만을 만난 임영신이 바로 그다.
▲  중앙대학교 캠퍼스에 설치된 승당 임영신 박사 동상.
ⓒ 중앙대학교 홈페이지
17일 대화 때 윤치영의 입에서 무심코 루이즈 임(임영신)이 거명되자, 이승만은 윤치영의 말을 도중에 끊고 "치영이, 루이즈도 오라고 그래, 지금"이라고 재촉했다. 이 때문에 임영신도 잠시 뒤 조선호텔에 도착했다. 이로써 이은혜와 임영신이 이승만의 최측근 여성 조력자가 됐다.

1875년생인 이승만은 미국에서 임영신에게 프러포즈했다가 거절을 당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임영신이 이승만의 '승'을 딴 승당(承堂)이란 호를 쓴 것은 그 거절이 이승만에 대한 임영신의 평가에 영향을 주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1945년 10월 16일 귀국 당시 이승만은 부부 동반이 아니었다. 이때 프란체스카는 미국에 있었다. 그랬던 프란체스카가 귀국을 앞당긴 것은 남편과 보통 사이가 아닌 여성이 남편 옆에 있다는 소식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46년 2월 23일 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1946년 1월 22일 미국을 출발해 도쿄에 떨어진 프란체스카는 약 한 달간 체류한 뒤 2월 22일 오후에 김포공항에 착륙했다.

당시 이승만은 지금의 서울 성북구에 소재한 돈암장에 있었다. 이곳에 들어간 프란체스카가 잠시 쉬었다가 가장 먼저 처리한 '현안'은 '임영신 숙청'이다. 2007년 8월호 <신동아> '대통령 상전, 영부인 열전'은 프란체스카가 몸을 추스른 뒤에 신속히 매듭지은 일이 임영신의 돈암장 출입을 금지시킨 일이었다고 알려준다.

임영신은 중앙대 총장 겸 이사장직을 내려놓은 1972년에 발표한 그해 6월 23일 자 <중앙일보> 기고문에서 "아버지 같기도 하고 남편 같기도 하고 오빠 같기도 한 이 박사"라고 이승만을 지칭했다. 임영신은 7년 전에 죽은 이승만을 회고하면서 "나는 비서일과 식사·의복 시중까지 세세한 것을 도맡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시중들던 와중에 프란체스카가 돈암장 대문을 열고 들어왔고, 얼마 안 있어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회의에 참석키 위해 외출하려는 이 박사에게 두루마기를 입혀주다가 프란체스카 여사가 보고 '이제 그런 일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면박을 해 말다툼을 하게 됐다. 이 박사가 이런 자리를 잘 중재해주었지만, 나는 그 일이 있은 후 이 박사 곁을 떠났다."

이승만 정권의 배후 실세가 된 프란체스카
▲  대구 순시를 위해 공항에 나온 이승만 대통령 내외. 1951.3.23
ⓒ 연합뉴스
프란체스카는 임영신 외에도 여러 사람들을 남편 곁에서 밀어냈다. 돈암장 시절의 공보비서였던 최기일의 회고록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에 따르면, 이승만의 열렬한 지지자인 송필만 전 연희전문 교수는 열 살 적은 프란체스카에게서 "나가요!"라는 말을 들으며 쫓겨났고, 이곳에 근무하던 고희동 비서는 "들어오지 마세요"라는 말을 들으며 쫓겨났다. 민족지도자 안재홍도 이곳에 갔다가 푸대접을 받았다. 이승만의 호불호가 아닌 프란체스카의 호불호에 따른 것이었다.

프란체스카는 1946년부터 이런 식으로 이승만 주변 사람들을 정리해나갔다. 그는 정부수립 직후에는 남편의 참모들을 쥐락펴락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 시기의 대통령비서관인 박용만의 <제1공화국 경무대 비화>에는 프란체스카의 인사권 개입 앞에서 이기붕 비서실장과 장택상 외무부장관이 꼼짝도 못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그렇게 해서 프란체스카는 이승만 정권의 배후 실세가 됐지만, 그에게는 임영신이 여전히 장애물이었다. 임영신을 돈암장에서는 내쫓았지만, 남편의 주변에서는 내쫓지 못했기 때문이다. 프란체스카에 밀려 돈암장 출입이 금지된 뒤로도 임영신이 이승만과 긴밀히 공조했다는 점은 1948년 7월 24일의 대통령 취임사에서도 확인된다.

이날 이승만은 취임사 도중에 엉뚱하게도 임영신의 실명을 거론했다. 국제연합 임시본부가 있는 뉴욕주 롱아일랜드섬 레이크석세스에 나가 있는 임영신을 거명하면서 "우리의 대표로 레이그썩세스에 가서 많은 성적을 내고 있는 임영신 여사에게 대해서는 우리가 다 고맙게 생각하는 바이다"라며 임영신을 파격적으로 언급했다. 이로써 임영신은 대통령 취임사에 나온 인물이 됐다.
▲  이승만 초대 대통령 취임식
ⓒ 대통령기록관
정부수립과 함께 상공부장관이 된 임영신은 정권 2인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승만의 확고한 신임이 그의 위상을 높여주었다. 프란체스카가 경무대에서 음지의 2인자 역할을 했다면, 임영신은 정부 내에서 양지의 2인자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임영신의 퇴장, 굳어진 프란체스카 1인 체제

이 같은 양립관계는 1949년 중반에 해소됐다. 임영신이 과욕을 부린 데다가 반대파의 공격이 그에게 집중된 결과였다. 이승만의 전폭적 신임을 받은 임영신은 현직 장관직을 보유한 상태에서 1949년 1월 13일 경북 안동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 때문에 견제와 비판이 가중되던 속에서 그가 관권을 남용해 부정선거를 했다는 의혹이 일어났고(임영신 독직사건), 이로 인해 그는 그해 6월에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이 독직 사건은 재판에서는 무죄로 결론지어졌다.

임영신이 당선된 다음달인 그해 2월 15일, 프란체스카가 이끄는 대한부인회가 발기인대회를 열었다. 프란체스카는 반관반민 성격인 이 단체의 총재가 되어 정치 현안에 노골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1950년 2월 26일 자 <조선일보>에서 확인되듯이 회비 명목의 실질적 세금을 전국적으로 거둬가며 위세를 부렸다.

임영신이 정치적으로 몰락하고 프란체스카의 대한부인회가 영향력을 확대한 이후로 이승만 정권의 여인천하는 프란체스카 1인 체제로 굳어졌다. 이 시스템 속에서 프란체스카와 그의 여성 동지들은 이승만의 불법적 임기 연장과 3선 출마에 앞장섰다.

1956년 대선 이틀 전인 그해 5월 13일에는 이 여성들이 대한부인회 명의로 민주당을 '친일파 집단 소굴'로 매도하며 이승만의 3선 출마를 지지하는 목소리를 냈다. 그 내용이 <동아일보>에 담겼다. 이승만 정권의 부조리를 심화시키는 과정에서도 프란체스카와 동료 여성들이 선봉을 섰던 것이다. 제1공화국의 여인천하는 성종 및 숙종 시대의 여인천하보다는 강력하지 않을지라도 현실정치에 미치는 파급력은 두 시기를 능가하면 능가했지 뒤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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