볶은 서리태와 어울리는 홍차, 빛깔에 놀라지 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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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일상 속, 차 한 잔으로 일상에 쉼표를 찍습니다. 차 한 잔을 마시며 24절기와 동양화를 오가며 흐르는 시간의 아름다움을 기록합니다.
1930년대 후반 운남의 대엽종 찻잎으로 본격적인 홍차 생산이 시작되었고, 풍부한 향미와 특유의 금빛 솜털로 주목받았다고 하죠.
여기에 운남홍차를 한 모금 더하면 달큰한 향이 콩의 고소함과 어우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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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일상 속, 차 한 잔으로 일상에 쉼표를 찍습니다. 차 한 잔을 마시며 24절기와 동양화를 오가며 흐르는 시간의 아름다움을 기록합니다. <기자말>
[노시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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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붉은 빛이 정말 홍차다. 약간 아련한 느낌이 드는 건 저 안에 무수한 금빛 솜털이 떠다니고 있기 때문. |
| ⓒ 노시은 |
상강은 말 그대로 서리가 내린다는 뜻입니다. 스물네 절기 가운데 열여덟 번째로, 한로와 입동 사이인 양력 10월 23일 무렵에 찾아옵니다. 한로에 차가운 이슬이 맺혔다면 상강에는 그 이슬마저 얼어붙을 만큼 밤공기가 차가워진다는 뜻이지요. 물론 절기가 왔다고 전국에 일제히 서리가 내리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제 가을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조선 후기 정학유가 지은 <농가월령가>의 구월령은 이 계절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구월이라 계추 되니 한로 상강 절기로다.
제비는 돌아가고 떼기러기 언제 왔노.
벽공에 우는 소리 찬 이슬 재촉는다.
만산 풍엽은 연지를 물들이고
울 밑에 황국화는 추광을 자랑한다.
제비가 떠난 하늘에는 기러기가 찾아오고, 산을 물들인 단풍은 연지를 바른 듯 붉습니다. 울타리 아래에서는 노란 국화가 가을볕을 받으며 피어납니다. 조선의 가을도 지금 우리가 아는 가을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첫서리가 깊어지기 전, 할 일이 산더미
하지만 이 아름다운 풍경을 느긋하게 즐기기에는 농가가 너무나 바빴습니다. <농가월령가>는 곧 이렇게 덧붙입니다. '물색은 좋거니와 추수가 시급하다'고. 벼를 베어 타작하고, 조와 피를 거두고, 콩과 팥을 털어야 했습니다. 좋은 종자는 이듬해 농사를 위해 따로 갈무리했습니다. 밭에서는 고구마와 토란을 캐고, 김장에 쓸 무와 배추도 살폈지요. 첫서리가 깊어지기 전에 할 일이 산더미였습니다.
그렇다고 가을의 즐거움마저 잊지는 않았습니다. 상강과 가까운 늦가을에는 음력 9월 9일 중양절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국화를 감상하고 국화전을 부치거나 국화주를 마시며 계절을 즐겼습니다. 음력 시월 상달이 다가오면 집안의 평안과 풍요를 기원하는 고사도 준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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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볶은 콩은 언제나 든든한 차시간의 친구가 되지만 상강에는 양생에도 도움이 된다니 더 반가웠다. |
| ⓒ 노시은 |
서리태라는 이름을 곱씹어 봅니다. 까만 껍질 안에는 봄에 씨앗을 뿌리고 여름의 볕과 비를 견뎌낸 시간이 푸르게 담겨 있습니다. 서리가 내릴 만큼 차가운 날씨를 맞이하고서야 비로소 거두는 콩이라니요. 이름만 들어도 늦가을의 밭과 수확을 마친 농부의 손이 떠오르는 듯합니다.
그래서 상강의 다식으로 볶은 서리태를 골랐습니다. 검은 껍질을 깨물면 초록빛 속살이 드러나고, 고소한 맛이 입안에 퍼집니다. 몇 알 집어 먹다 보면 자꾸 손이 가는 소박한 간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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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혹하는 황금빛 솜털이 가득한 운남 출신 홍차, 대금침. |
| ⓒ 노시은 |
찻잎을 뒤덮은 황금빛 솜털 때문에 마른 찻잎이 마치 가느다란 금침을 모아 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뜨거운 물을 부으면 붉고 맑은 찻물이 우러나고, 꿀과 군고구마를 연상시키는 달콤한 향기가 피어오릅니다. 찻잎의 금빛과 찻물의 붉은빛 모두 깊어가는 가을과 참 잘 어울립니다.
운남홍차는 중국의 여러 홍차 가운데서도 비교적 늦게 이름을 알린 차입니다. 1930년대 후반 운남의 대엽종 찻잎으로 본격적인 홍차 생산이 시작되었고, 풍부한 향미와 특유의 금빛 솜털로 주목받았다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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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리태의 검은 껍질과 초록 속살의 대조는 언제 봐도 재미있다. |
| ⓒ 노시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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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뜨거운 물을 붓자마자 달콤한 군고구마 향기가 훅 끼쳐와 재미있다. 차에서 군고구마라니! |
| ⓒ 노시은 |
서리가 찾아올 때까지 견딘 콩 한 알
가을이 끝난다는 말을 들으면 왠지 쓸쓸한 마음부터 듭니다. 무성하던 잎들은 떨어지고, 꽃들도 하나둘 자취를 감춥니다. 봄에 싹을 틔우고 여름 내내 자라던 것들이 마침내 생장을 멈추는 계절이니까요. 하지만 꽃이 졌다고 해서 아름다운 시간이 모두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송나라 시인 소식(蘇軾)은 친구 유경문에게 보낸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一年好景君須記,最是橙黃橘綠時.
'일 년 중 가장 아름다운 때를 그대는 기억해야 하리. 바로 등자는 노랗게 익고 귤은 아직 푸른 이 시절을.'
연꽃도 시들고 국화마저 저물어가는 늦가을이지만, 시인은 오히려 그때가 일 년 중 가장 좋은 시절이라고 말합니다. 봄의 아름다움이 꽃에 있다면 가을의 아름다움은 열매에 있다는 뜻일까요. 무언가가 시들어가는 자리에서 다른 무언가는 비로소 제 빛깔로 익어갑니다. 여름 내내 푸르렀던 나무가 붉고 노랗게 변하고, 밭에서는 알곡이 여물고, 과일은 달콤해집니다.
상강의 찻상에 놓인 서리태도 그렇습니다. 그 작은 콩 한 알은 서리가 찾아올 때까지 제 시간을 다 채웠습니다. 서둘러 익지도, 다른 콩의 속도를 따라가지도 않았습니다. 계절이 허락한 만큼 자라고 마침내 제 안을 충실하게 채웠습니다.
가을이 저물어갑니다. 그렇지만 끝나가는 것들만 바라보며 아쉬워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지나온 시간 속에서 무엇이 익었고, 무엇이 남았는지 헤아려 보는 것도 좋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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