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전·하이닉스 없어?" 묻더니 이제는 "아직도 안 팔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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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시민이 주식시장에서 마주치는 욕망, 불안, 확신, 후회 같은 감정을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라캉의 시선으로 읽어보려는 기록이다.
소나무는 가을이 되면 안쪽의 묵은 잎부터 떨군다고 한다.
편지는 손에서 손으로 돌고 돌면서, 그것을 쥔 사람의 자리를 정한다(신영헌, <'도둑맞은 편지'를 둘러싼 주체와 권력의 상관관계>, 2010). 주식 이야기에 빗대면, 내 계좌의 편지는 반도체 주식,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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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거시경제 분석도, 종목 추천도 아니다. 평범한 시민이 주식시장에서 마주치는 욕망, 불안, 확신, 후회 같은 감정을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라캉의 시선으로 읽어보려는 기록이다. <기자말>
[안유림 기자]
부쩍 바람이 차가워진 10월의 점심시간, 산책길 소나무 아래 누렇게 마른 솔잎이 아스팔트 위에 흩어져 있었다. 나무가 아픈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소나무는 가을이 되면 안쪽의 묵은 잎부터 떨군다고 한다. 나무는 멀쩡하다. 떨어지는 건 몇 해 전에 난 잎들이다. 같은 나무에 달려 있어도 잎마다 난 해가 다르고, 떨어지는 때도 다르다. 그 장면에서 내 계좌가 떠올랐다. 같은 종목이어도 언제 샀느냐에 따라 떨어지는 잎이 달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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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도체 투톱 급락...코스피·코스닥 7%대 하락 마감 인공지능(AI) 투자 수익성 논란이 다시 부각된 가운데 코스피가 15일 7% 넘게 급락했다. 코스피는 전날보다 454.59포인트(7.57%) 내린 5,554.22로 장을 마쳤다. 코스닥 지수는 63.06포인트(7.65%) 급락해 760.82로 장을 마쳤다. 이날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 모니터에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 종가가 표시되고 있다. |
| ⓒ 연합뉴스 |
반면, 올해 6월에는 이 두 종목 비중이 가장 큰 반도체 ETF 두 개를 샀다. 반도체 주식으로 더 큰 차익을 보고 싶은 욕심이 들었고, 돌이켜보니 그때가 고점이었다. 지금은 수익률이 -30% 가까이로 팔지도 못하고 있다.
비슷한 반도체 종목이 담긴 상품인데, 내 포트폴리오 안에서 개별주와 수익률이 정반대다. 같은 반도체인데 결과가 갈린 가장 큰 이유는 '언제' 샀느냐였다. 산업이 성장하는 것과 그 산업의 주식이 성장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성장산업이라도 내가 언제 샀느냐에 따라, 내 주식이 성장할 수도, 하락할 수도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삼성전자가 하루에 10% 넘게 떨어진 날은 얼마나 될까. 궁금해서 한국거래소 일별 시세를 확인해봤다. 종가 기준으로 하루 10% 이상 떨어진 날은 2000년 이후 13번이었다. 2000년부터 2024년 8월 5일까지 약 24년 동안 8번, 올해 들어서만 5번이다(10월 21일 종가 기준). SK하이닉스는 올해만 9번이다.
최근 기사(매일경제, 10월 21일)에 따르면, 올해 개인투자자는 코스피에서 100조 원 넘게 순매수했고, 7월 급락 직전 두 달 동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70조 원이 몰렸다. 그리고 고점 대비 주가는 삼성전자 -41.7%, SK하이닉스 -58.1%까지 내려왔다(10월 19일 기준).
'무주식이 상팔자'라는 말이 있다. 하락장이 되면 나도 한 번쯤 생각한다. 애초에 하지 말걸. 그런데 올해 4~5월만 해도 "너 아직도 하이닉스 없어?"라는 말이 내 주변에서는 인사처럼 오갔다. 하이닉스 주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나뉘는 것 같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도 안 팔았냐?"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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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K하이닉스 부스에 전시된 고대역폭 플래시 모형 14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제28회 반도체대전(SEDEX 2026) SK하이닉스 부스에 고대역폭 플래시(HBF) 모형이 전시돼 있다. |
| ⓒ 박혜경 |
왕비가 남에게 들키면 안 되는 편지를 받는다. 장관이 그 편지를 훔치고, 편지를 쥔 채 왕비를 움직인다. 경찰이 몇 달 동안 장관의 집을 뒤져도 찾지 못하자 사설탐정이 나선다. 탐정은 편지가 명함꽂이에 겉모습만 바뀐 채 꽂혀 있는 걸 알아보고, 가짜 편지를 두고 진짜 편지를 갖고 온다.
편지는 왕비에게 돌아가고, 장관은 왕비를 움직이던 힘을 잃는다. 이 소설에서 끝내 편지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라캉은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건 편지의 내용이 아니라 편지가 누구 손에 있느냐라고 보았다.
내용은 끝내 나오지 않는데도, 편지를 쥔 장관은 왕비를 움직이고, 편지를 잃자 힘도 잃는다. 편지가 옮겨 갈 때마다 사람들 사이의 힘의 관계가 바뀌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누구일까. 라캉은 왕비도 탐정도 아닌 편지라고 봤다.
사람이 편지를 갖는 게 아니라, 편지가 사람을 붙잡고 움직인다. 라캉이 이 소설을 꺼낸 것도 이걸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뜻을 알 수 없는 편지인데도 옮겨 다니는 것만으로 사람들을 움직인다면, 사람을 움직이는 건 편지에 담긴 뜻이 아니라 편지 그 자체다.
라캉은 이런 편지를 '기표'라고 불렀다. 편지는 손에서 손으로 돌고 돌면서, 그것을 쥔 사람의 자리를 정한다(신영헌, <'도둑맞은 편지'를 둘러싼 주체와 권력의 상관관계>, 2010). 주식 이야기에 빗대면, 내 계좌의 편지는 반도체 주식,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였다. 이 편지는 올해 내내 사람들의 손을 돌고 돌았다. 갖고 있느냐 아니냐가 한때는 큰 힘처럼 보였다.
그 편지에 나는 처음 '성장안전주'라는 봉투를 씌웠다. 지난해 10월 살 때만 해도 그 봉투는 근사해 보였다. 그런데 고점이 지나고 다시 들여다보니, 봉투에는 어느새 '의심성장주'라고 적혀 있었다. AI 투자가 정말 돈이 되느냐는 의구심이 시장의 이야기를 바꿔 놓은 것이다.
알맹이는 같은 주식인데 겉봉만 바뀌었다. 누가 바꿔치기한 것만 같았다. 소설 속 경찰이 겉모습만 바뀐 편지를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듯이. 하지만 처음의 '성장안전주'도 결국 봉투였다. 삼성전자는 원래 크게 흔들리던 종목이었고, 하이닉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그 봉투를 믿은 건 나였다.
6월에 반도체 ETF를 더 산 것도 그 화려한 봉투를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30% 가까운 손실에 팔지도 못하고 있다. 나는 미래의 수익을 기대하며 주식을 샀고, 그 주식을 내가 쥐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은 주식이 나를 쥐고 있는 셈이 됐다. 수익이 났는데도 도둑맞은 기분이 든 건, 알맹이가 아니라 봉투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나는 정말 도둑맞은 걸까. 아니다. 주식은 그대로 내 계좌에 있다. 줄어든 수익도 팔지 않았으니 애초에 내 것이 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사라진 건 무엇일까. '성장안전주'라는 봉투, 이 주식은 안전하다는 내 믿음이다. 그 믿음은 누가 훔쳐 간 게 아니다. 처음부터 내가 씌운 봉투였을 뿐이다. 애초에 도둑은 없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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