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망진 중년] 오래 산 남자에게도 설렐 수 있을까

이수정 2026. 10. 22.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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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싹 속았수다>의 애순이처럼 요망지게(야무지게), 똘망똘망하게, 유쾌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게 살아온 중년 여성들의 이야기.

며칠째 남편이 주방 장식장 앞에서 수상한 행동을 한다.

얼마 전에는 줌바 수업을 마치고 밤늦게 집에 돌아왔는데, 현관 밖 등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함께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서로를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새롭게 보이는 모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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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가 유학 가고 부부 사이에 생긴 변화

<폭싹 속았수다>의 애순이처럼 요망지게(야무지게), 똘망똘망하게, 유쾌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게 살아온 중년 여성들의 이야기. 10월에는 ‘이 나이에도 가능할까’ 싶은 순간들을 담아 봅니다. <편집자말>

[이수정 기자]

▲ 남편이 고른 머그잔 회사에 가져갈 컵 하나를 고르느라 주방 장식장 앞에서 한참을 서서인 남편. 그날의 선택은 이 컵이었다.
ⓒ 이수정
며칠째 남편이 주방 장식장 앞에서 수상한 행동을 한다. 컵 하나를 꺼내 들여다보다가 다시 넣는다. 다른 컵을 꺼내더니 그것도 도로 넣는다. 내가 아끼는 찻잔까지 만지작거린다. 평소 그릇에는 별 관심이 없던 사람이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물었다.

"뭐 찾는데?"
"아니, 그냥."

그냥이라면서 컵을 고르는 손길이 예사롭지 않다. 한참을 고심하더니 마침내 마음에 드는 컵을 골랐다.

"나 이거 회사에 가져가서 쓰고 싶은데."
"그거? 그래 가져가."
"이 컵은 비싼 거야?"

내가 아끼는 컵인지 확인하는 남편의 얼굴이 제법 진지하다. 평소라면 아무 텀블러나 손에 잡히는대로 들고 나갔을 사람이, 며칠을 장식장 앞에서 서성이더니 고른 컵이다. 남편이 심사숙고하여 고른 컵에는 붉은 열매가 촘촘이 새겨져 있었다. 마음에 드는 머그잔을 손에 꼭 쥐고 있는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 웃음이 났다.

딸아이가 외국으로 떠난 뒤

남편은 몇 년 뒤면 직장 생활을 마무리 한다. 오랫동안 맡았던 중요한 역할에서도 조금씩 물러나는 중이다. 매일 바쁘게 일하고 사람들을 만나던 생활에도 변화가 생기고 있다. 회사에 가져갈 컵 하나를 고르는 남편에게도 내가 모르는 취향과 마음이 있었던 걸까. 오래 함께 살았다고 해서 내가 이 사람을 다 아는 건 아니었나 보다.

딸아이가 외국으로 떠난 뒤 우리 집 저녁 풍경도 부쩍 달라졌다. 예전에는 신호등마다 빨간불이 걸리면 아이의 저녁이 걱정되어 조급했다. 요즘은 아니다. 집에 먼저 도착한 사람이 자연스럽게 앞치마를 두른다. 남편이 일찍 도착한 날엔 저녁을 얻어 먹을 때도 있다. 남편의 요리 철학은 재료만큼이나 간단하다.

"요리는 속도야!"

타다닥닥! 감자와 닭가슴살을 꺼내 뚝딱 요리하고, 먹고 나면 설거지도 후다닥 끝낸다. 설거지가 덜 된 흔적이 남아도 모른 척하기도 한다. 그래야 또 남편이 설거지를 할 테니까.

"우와, 벌써 다 했어?"
"역시 나 빠르지?"
"응, 엄청 빠르네!"

적절한 리액션과 전략적 침묵. 그 전략은 늘 효과 만점이다. 부작용도 있다. 간혹 그릇을 깬다는 것이다. 예쁜 그릇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속은 좀 쓰리지만 웬만하면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잘했어. 그래야 또 사지!"

그런데 얼마 전, 아끼던 비싼 접시가 깨졌을 때는 나도 모르게 뾰족한 한 마디가 나왔다. 남편은 금세 시무룩해졌다. 깨진 접시보다 남편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다행히 살짝 끝에만 깨져서 투명 테이프로 살짝 붙였다.

"이거, 소지품 통으로 쓰면 좋겠다. 이거 봐, 감쪽같지?"
"그래 그러면 되겠다. 좋은 아이디어네."

남편은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미소를 보였다. 그 미소를 보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이번 주말엔 뭐 하지?"

요즘 우리가 자주 하는 말이다. 예전에는 아이 일정에 맞춰 주말을 보냈다. 이제는 둘이 무엇을 할지 의논한다. 대단한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다. 가까운 곳을 산책하거나, 맛있는 것을 먹거나, 근처로 피크닉을 간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 다정한 건배, 다정한 시간 둘만의 추억으로 채워가는 부부의 시간. 잘 숙성 된 와인처럼 세월과 함께 애정도 깊어간다.
ⓒ 이수정
얼마 전에는 우리의 가을 피크닉을 위해 알록달록한 예쁜 도시락 통과 스테인리스 와인잔을 샀다. 꼭 새로 살 필요는 없었다. 집에 있는 그릇에 담아 가도 그만이었지만, 산뜻한 원색의 도시락 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먼저 들떴다.
"이거 봐. 너무 예쁘지 않아? 우리 여기에 김밥 싸서 가자."
"왜 와인잔까지 산 거야?"
"꼭 와인만 마시라는 법 있어? 분위기 내보려고 샀어."
ⓒ 이수정
스테인리스 와인잔을 들고 짠 부딪히는 내 모습에 남편이 웃었고 또 나도 덩달아 웃었다. 함께 김밥을 말고 새로 산 스테인리스 잔도 챙겼다. 우리의 주말 아침은 그렇게 소소하게 분주했다. 도시락을 챙기며 나는 또 한번 웃었다. 남편의 속도전에 걸맞게 김밥은 빈자리를 찾아 얼렁뚱땅 들어앉은 모양새였다. 도시락을 열어 놓고 우리는 또 한바탕 웃었다. 예쁜 도시락 통과 엉성한 김밥의 조합이라니. 그래도 맛은 좋았다.
얼마 전에는 줌바 수업을 마치고 밤늦게 집에 돌아왔는데, 현관 밖 등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남편이 미리 켜 놓았던 것. 사소한 일이지만 어두운 길을 걸어오다 환한 불빛을 보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 남편이 나를 위해 켜 놓은 외등. 운동을 마치고 오는 나를 위해 켜 놓은 외등의 불빛이 유난히 따스하게 느껴졌다.
ⓒ 이수정
내가 웃으면 남편도 따라 웃고, 남편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상대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요즘 우리 둘 다 상대방의 웃는 얼굴을 더 많이 보고 싶어진 것 같다. 마치 서로에게 웃음을 던져주고 핑퐁핑퐁 주고 받듯이.

요즘 나는 남편을 새삼 바라보는 순간이 많아졌다. 컵 하나를 고르느라 고민하는 모습도, 내가 무심코 던진 말에 시무룩해지는 얼굴도 전에는 그저 지나쳤을지 모른다. 남편 역시 내 웃음이나 반응을 기다린다. 함께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서로를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새롭게 보이는 모습이 있다.

단풍이 더 짙어지면 다시 피크닉을 가야겠다. 이번에는 김밥을 조금 더 가지런히 담아 보자고 말해 볼까.
▲ “우리 주말에 뭐하지?”  둘만의 시간이 많아진 요즘. 소박하지만 다정한 피크닉을 즐기기에 딱 좋은 계절이다.
ⓒ 이수정
《 group 》 요망진 중년 : https://omn.kr/group/2026_midlife
<폭싹 속았수다>의 애순이처럼 요망지게(야무지게), 똘망똘망하게, 유쾌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게 살아온 중년 여성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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