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망진 중년] 오십을 바라보는 중년 여성들이 푹 빠진 남자들

이인자 2026. 10. 22.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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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싹 속았수다>의 애순이처럼 요망지게(야무지게), 똘망똘망하게, 유쾌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게 살아온 중년 여성들의 이야기.

요즘 회사 점심시간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어떤 '남자 이야기' 때문에 수다 떨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다.

결국 오십을 바라보는 그녀들이 푹 빠진 남자는 실존하지도 않는 '종이 남자', '모니터 속 남자'였던 셈이다.

아니, 그 나이에 연예인도 아니고 종이 남자를 좋아하는 게 정말 가능한가 싶었는데, 옆에서 지켜보니 지극히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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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남자 주인공에, 듀엣 노래 영상에 설레는 요즘... 당신의 길티 플레저는 무엇인가요

<폭싹 속았수다>의 애순이처럼 요망지게(야무지게), 똘망똘망하게, 유쾌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게 살아온 중년 여성들의 이야기. 10월에는 ‘이 나이에도 가능할까’ 싶은 순간들을 담아 봅니다. <편집자말>

[이인자 기자]

▲ 와이셔츠 입는 남편 착각은 자유
ⓒ AI생성이미지
"뭘 그렇게 봐, 내가 그렇게 좋아?"

아침 출근길, 와이셔츠 단추를 채우던 남편이 뜬금없는 소리를 쏟아냈다. 내가 당신을 보고 있었다고? 그것도 애정이 듬뿍 담긴 눈빛으로? 육하원칙을 모조리 동원해 따져봐도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이었다.

나는 그저 남편 뒤쪽 옷장을 바라보며,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진 날씨에 뭘 입고 출근해야 할지 고민하던 참이었다. 남편은 그 멍한 시선을 자신을 향한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완벽하게 오해한 것이다. 어쩌지? 뇌가 대답을 찾느라 바쁘게 돌아갔다.

일단 미소로 얼버무리며 시간을 벌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아뿔싸, 남편은 그 미소를 암묵적 동의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입꼬리가 자꾸만 솟아올랐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오래간만에 앙큼한 연기력을 발휘해 보기로 했다.

"그러엄~ 좋지."

어우, 나도 모르게 콧소리까지 섞여 나왔다. 순간 남편의 얼굴이 모처럼 빨개진 주식창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단추를 채우는 손길에도 어쩐지 신바람이 실려 있는 것 같았다. 완벽한 착각이 사람을 저렇게 행복하게 해 줄 줄이야. 진실이든 아니든 뭐가 중요할까 싶었다. 연휴 끝 무거운 출근길, 발걸음이라도 가볍게 해 준 것 같아 미안하면서도 속으로 스스로를 칭찬했다.

종이 남자, 모니터 남자에 빠진 중년들

올해로 결혼 27년 차, 남편 나이 쉰둘이다. 내 기억의 오류인지는 모르겠으나 풋풋했던 홍안의 청년은 어느새 검게 그을린 중년 아재가 되었다. 얼마 전 동료가 단톡방에 '중년 여성 질환 자가 체크리스트'라는 유머를 공유해 준 적이 있다. 남편이 멋있어 보이면 백내장, 남편 등에 업혀보고 싶으면 골다공증, 걷다가 남편 쪽으로 자꾸 기울면 관절염, 남편과 달달한 커피를 마시고 싶으면 당뇨병이란다.

혼자서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 기준대로라면 나는 천만다행으로 아무 병에도 걸리지 않았으나, 이걸 감사해야 할 일인지는 모르겠다. 친구에게 이 내용을 공유했더니 자신은 '백내장'에 걸린 것 같다고 하길래 부러워 죽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오늘 아침 풍경을 보니 이 체크리스트는 남편도 알아야 할 것 같다. 아내가 아침 댓바람부터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본다고 착각하는 남편이야말로, 백내장이 의심스러우니 말이다.

뭐, 이런 설렘 유발 착각은 우리 집에서만 벌어지는 일도 아니었다. 가을이라 그런지 중년 아줌마들의 감성도 제철을 맞아 풍년을 이뤘다.

요즘 회사 점심시간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어떤 '남자 이야기' 때문에 수다 떨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다. 그 남자에게 빠진 동료가 한둘이 아닌데, 특히 한 명은 두 손을 모으고 사춘기 소녀처럼 눈빛을 반짝이며 그의 매력을 줄줄이 늘어놓는다.
▲  웹소설 <울어봐, 빌어도 좋고>
ⓒ 네이버 웹툰
그 남자는 바로 웹소설 <울어봐, 빌어도 좋고>의 주인공 '마티어스'다. 요즘은 19금 웹툰으로도 나왔다는데, 참을 수 없이 멋지다는 게 그녀들의 열렬한 고백이었다. 결국 오십을 바라보는 그녀들이 푹 빠진 남자는 실존하지도 않는 '종이 남자', '모니터 속 남자'였던 셈이다.

아니, 그 나이에 연예인도 아니고 종이 남자를 좋아하는 게 정말 가능한가 싶었는데, 옆에서 지켜보니 지극히 가능한 일이었다. 남편도 이 사실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그건 절대 비밀이란다. 남편이 알면 질투할 테니 들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종이 남자를 좋아하는 걸 알면 남편이 질투할 거라는 동료의 귀여운 착각이라니! 어쩌면 남편이 자신을 그만큼 사랑한다고 믿고 싶은 건 아닐까. 혹은 그 질투마저 즐거운 상상으로 간직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이런 착각에서 자유로울까. 천만에다. 나 역시 즐거운 착각으로 무료한 시절을 그런대로 즐기고 있다.

한 달 전쯤 여동생이 유튜브 링크 하나를 보내왔다. 가수 최유리와 진영이 함께 부른 노래 <생각을 멈추다 보면>이었다. 영상을 열자마자 같은 취향의 동질감이 밀려왔다. 나 역시 두 달 전부터 그 영상에 푹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음악 프로그램에서 두 사람이 듀엣으로 노래를 부르는데, 보고 들으면 눈은 저절로 반달이 되고 귓가에는 카푸치노 크림 같은 음색이 종일 맴돈다.
▲ 최유리 진영의 생각을 멈추다 보면 손가락이 멈추다 보면
ⓒ 유리의숲 방송이미지
풋풋했던 그 시절, 어떤 남자가 달달한 눈빛을 하며 노래를 불러주는 거 같은 착각에 사로잡힌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영상 밑에는 나처럼 이 노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중년 여성들의 솔직한 댓글이 수두룩했다. 진짜 사랑에 빠진 게 아니라, '사랑에 빠진 기분'에 빠져드는 착각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착각의 순간, 더 자주 찾아와도

남편의 책장에 꽂혀 있던 <마음의 어휘력>이라는 책을 들춰보다가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라는 말에 잠시 눈길이 머물렀다. 남들에게 알리기는 부끄럽지만 나를 즐겁게 하는 행동, 약간의 죄책감이 동반되는 즐거움을 뜻한다고 한다.

저녁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배달 음식으로 대충 때우고 부엌 대신 모니터 앞에 앉아 아이돌의 노래에 마음을 적시는 일, 종이 남자의 대사 하나에 설레는 일. 현실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기꺼이 빠져드는 이런 즐거움은 내게도, 동료에게도 길티 플레저인지 모르겠다.

물론 나는 안다. 이 착각도, 설렘도 다 무탈한 일상이 건네준 잠깐의 선물이라는 것을. 가족 중 누구 한 사람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아이돌은커녕 마이클 잭슨이 살아 돌아와 내 앞에서 춤을 춘다 한들 눈에 들어올 리 없다. 아무리 예쁜 옷을 입고 나가도 다초점 안경만 쓰면 옷태가 무너지고, 안 쓰면 세상이 무너진다. 그게 중년의 현실이다.

남편도 마찬가지. 출근하면 산처럼 쌓인 업무와 씨름해야 할 테니, 집에서만큼은 잠깐이라도 다정한 보상을 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 멍한 시선을 알았음에도, 자신을 설레는 눈으로 바라봐 주길 바라는 데서 오는 착각이었으리라.

그러니 중년의 삶에는 착각의 순간이 더 자주 찾아와도 좋겠다. 오래 산 배우자가 여전히 나를 보고 설렜다고 믿어 보고, 현실에 없는 존재에게 마음을 빼앗겨 보고, 노래 한 곡으로 젊은 날의 온도를 되찾는 것. 그 비현실적인 설렘이 삶을 갉아먹기는커녕 덤덤한 일상을 견디게 해 준다면, 그보다 건전하고 다정한 일탈은 세상에 없을 듯싶다.

요즘 늙크크와 영크크를 가르는 말들이 유행이라던데, '착각은 자유다'라고 외치면 너무 늙크크처럼 들리려나? 그래도 이보다 더 좋은 말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니 감히 용감해지련다. 그 자유를 마음껏 누려보리라. 마침 하늘은 높고, 감성은 양떼구름처럼 떼 지어 몰려오는 가을이 아니던가.
▲ 가을 하늘 감성이 양떼구름처럼 몰려오는 계절
ⓒ 이인자
《 group 》 요망진 중년 : https://omn.kr/group/2026_midlife
<폭싹 속았수다>의 애순이처럼 요망지게(야무지게), 똘망똘망하게, 유쾌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게 살아온 중년 여성들의 이야기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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