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사랑한다

홍영미 2026. 10. 20.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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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등단 40년을 앞두고 아홉 번째 시집 <내가 사랑한 거짓말>(창비, 2025)을 펴낸 장석남 시인은 그 순간 조용히 "언덕이 되어보자"고 나지막이 건네온다.

가물어 터진 일상 속에서 마른 먼지를 뒤집어쓴 채 살아가고 있다면, 장석남의 시집 <내가 사랑한 거짓말>을 펼쳐보길 권한다. 맑은 바람과 대숲의 소리, 그리고 찌들어버린 삶마저 사랑으로 안아주는 시인의 나지막한 '거짓말'이, 당신의 묵은 어둠을 가만히 덮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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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장석남 시집 <내가 사랑한 거짓말>... 상처와 구원이 뒤섞인 생의 자화상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홍영미 기자]

▲  장석남 시집 <내가 사랑한 거짓말> 창비, 2025년 1월 출간
ⓒ 창비
살다 보면 삶이 마른 꽃다발보다 가볍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거창한 포부나 치열했던 투쟁의 흔적마저 바람 한 줄기에 사르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허무가 찾아올 때,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등단 40년을 앞두고 아홉 번째 시집 <내가 사랑한 거짓말>(창비, 2025)을 펴낸 장석남 시인은 그 순간 조용히 "언덕이 되어보자"고 나지막이 건네온다. 걸어온 내력이 핑경 소리처럼 아득해진 이들에게 시인은 스스럼없는 메꽃들이 모여 놀고, 오후 3시 버스가 희끗한 걸음을 마저 내려놓고 가는 언덕에 함께 앉자고 청한다.

경기도 양평 용문산 자락 오두막에서 시를 지어온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한층 더 원숙해진 도연명풍의 서정과 생의 깊은 비감을 넘나든다. 시인의 말을 빌리면, 이제는 제법 '회고'가 많아지는 삶의 단계. 겨울 뜰에서 솔 앞에 서서 "내게도 저 푸른 정진이 있는가" 자문하는 시인의 검지에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펜대의 굳은살이 남아있다. 그 굳은살 끝에서 피어난 시편들은 가문 밭 같은 우리 가슴에 붉은 피를 돌게 한다.

자연이 건네는 뜻밖의 위로

1부에 실린 시편들은 전원의 조용한 호흡과 자연의 세밀한 움직임을 감각적으로 포착한다. 시인에게 자연은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경전이자 끝없는 음률이다.

"창 앞 / 대숲 아침해 / 굶주린 호랑이처럼 쏟아져 들어와 / 내 넘치는 불면의 살들을 내주니 / 서둘러 먹고는 입술을 핧으며 / 남쪽으로 돌아가네" - '대숲 아침 해 - 대나무가 있는 방 2' 중에서

아침 햇살을 '굶주린 호랑이'에 비유하고, 불면의 밤, 헐떡이던 자아를 그 햇살에 내어주는 문장은 신운(神韻)이 생동한다.

어디 그뿐인가. 연꽃을 심는 행위를 두고 시인은 "물에 노래를 심다니요 / 그것도 지금 노래가 아니라 훗날 / 하지 때의 그 노래를 심다니요"('연꽃 심을 때')라며 탄성을 지른다. 가을 연밭에 이르러 연꽃은 모두 떠나고 참담히 고개 꺾은 그림자만 남았을 때도, 시인은 절망하는 대신 차의 시동을 끄고 이마를 내려놓는다. 지나간 소나기의 코러스는 없지만, 누년간의 연 농사가 남긴 쓸쓸한 음률 위에 가 앉아 안개와 는개의 수레를 기다리는 마음. 그것은 참혹함마저 수확으로 바꾸어내는 시인만의 깊은 눈 밝음이다.

아버지가 남긴 닮아진 목도장, 콩 알갱이의 귀

2부로 넘어서면 시인의 시선은 사유의 깊이를 더해 가계(家系)와 유년의 기억으로 향한다. 서랍 속 거심줄 아래서 발견한 아버지의 목도장을 찍어보는 시인의 손길은 경건하고도 서글프다.

"이 도장으로 무엇을 하셨나 눈앞으로 뜨거운 것이 지나간다 이 흐린 나라를 하나 물려주는 일에 이름이 다 닮았으니 / 국경이 헐거워 자꾸만 넓어지는 이 나라를 / 나는 저녁 어스름이라고나 불러야 할까보다" - '목도장' 중에서

평생 문턱처럼 닮아진 이름 세 글자로 견뎌냈을 아버지의 삶. 아버지가 물려준 그 흐린 나라, 저녁 어스름 같은 세상 귀퉁이에 아버지의 이름을 붉게 찍어놓고 "제법 그럴싸한 표구가 되었으나 그림은 비어 있네"라고 나지막이 읊조릴 때, 독자의 가슴에도 뜨거운 무언가가 지나간다.

유년 시절 눈 오는 날 반상 위에서 노란 콩을 고르던 할머니의 모습('콩') 역시 잊히지 않는 장면이다. 상 위에서 구르던 콩 소리를 들으며 시인은 푸른 떡잎의 생명력을 읽어낸다. 콩 속에 숨겨진 두 개의 귀가 눈소리까지 새겨들었을 것이라 믿는 시인의 천진하고도 깊은 상상력은, 가난하고 쓸쓸했던 지난날의 시간을 아름다운 보석으로 바꿔 놓는다.

내가 사랑한 거룩한 거짓말

이번 시집의 타이틀롤(Title Role)이자 3부의 문을 여는 <내가 사랑한 거짓말>은 시인이 자신의 생을 마주하는 가장 솔직하고도 파격적인 자화상이다.

"나는 살아있다. 나는 살았다 / 살고 있고 얼마간 더 살 것이다 / 거짓말 /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거짓말 // 나는 어느 날 사타구니가 뭉개졌고 해골바가지가 깨졌고 / 어깨가 쪼개졌고 누군가에게 버림받고 누군가에게 구조 되었다 / 거짓말, 사실적인.. / 그러나 내가 사랑한 거짓말" — <내가 사랑한 거짓말> 중에서


삶이란 무엇인가. 우연과 비극, 상처와 구원이 어지럽게 뒤섞인 이 현실에서 우리가 '살아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하나의 거대한 거짓말이자 환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그 거짓말을 폄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아름답고도 슬픈 거짓말로 자신의 자서전을 꾸민다. 보라색 거짓말이 피어있고 붉은 거짓말이 봉오리를 맺는 정원 속에서 시인은 거짓말에 물을 주며 생을 견뎌낸다.

문학평론가 최원식 교수는 해설에서 "장석남은 리얼리즘과 비리얼리즘 사이에 시적으로 걸터앉았다"며 이번 시집이 도달한 원숙함을 격찬했다. 사회적 비극과 정치적 사유를 가전체나 풍자로 다룬 4부의 시편들까지 더해지며, 시집은 단순한 개인의 회고를 넘어 우리가 살아가는 국토와 시대에 대한 거대한 진혼곡으로 확장된다.

꽃이 무거워 가지가 휘어질지라도

시인은 자신을 "노래를 청하러 다니는 자"라 부른다. 주전자에게, 담쟁이에게, 사과에게 노래를 청하며 살아온 삶. 누군가 시인에게 노래를 청한다면 망설이다 "그 모두가 나의 노래, 뗏목 / 앓는 사랑"이라고 고백하겠노라 말한다.

삶의 무게는 때로 너무 무거워서 우리를 짓눌러 꺾어놓는다. 그러나 시인은 <꽃이 무거운 꽃나무여>에서 꽃의 중량을 세상에 와서 처음 업어보는 연인의 무게, 상기된 미소의 무게에 비유한다. 꽃이 무거워 가지가 휘어질지언정, 그 무게는 결코 파멸이 아닌 피어남의 숭고함이다.

"꽃의 무게로 일생이 휘는 일이여"

가물어 터진 일상 속에서 마른 먼지를 뒤집어쓴 채 살아가고 있다면, 장석남의 시집 <내가 사랑한 거짓말>을 펼쳐보길 권한다. 맑은 바람과 대숲의 소리, 그리고 찌들어버린 삶마저 사랑으로 안아주는 시인의 나지막한 '거짓말'이, 당신의 묵은 어둠을 가만히 덮어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브런치,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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