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기대가 실망으로 바뀐 시간 500일

지난주 초 한 언론사 기자에게 전화를 받았다. 이재명 대통령 취임 500일에 대해 평가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500일이 딱히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에 평가를 사양했는데, 전화를 끊고 나서 생각해 보니 500일이면 임기의 4분의 1이 지난 기간이었다. 현 정부 출범 이후 제법 긴 시간이 흐른 것이다. 이 정도 시간이면 초기의 시행착오를 딛고 국정의 틀이 잡히고 정책의 실질적인 성과가 가시화되기 시작해야 할 때이지만, 솔직한 심정은 여전히 안정감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
「 70% 지지율 30%대로 반토막
대통령 지시가 곧바로 정책되는
만기친람 리더십이 문제의 원인
실용보다 이념·정파 우선도 많아
」
이 대통령이 여러 차례 관심을 보인 부동산 정책은 내 집 마련은 물론 전셋집 구하기조차 버거워졌고, 정부와 여당이 치적으로 내세우던 주식시장은 최근 급락했다. 긍정적 평가를 받던 외교, 안보 분야도 꼬이고 있다. 미국과의 관계는 단순한 정책적 이견을 넘어서 심각한 균열이 드러나고 있고, 대북 정책 역시 미사일 발사와 지뢰 도발, 모욕적 담화에도 불구하고 의료장비 지원 제안처럼 실효성 없는 정책으로 국민 정서와 안보 현실을 도외시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초기에 70%에 근접하던 이 대통령에 대한 여론의 지지도는 500일이 지난 지금 30%대에 묶여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자주 지적된 것이지만, 이 대통령이 모든 일을 직접 챙기려는 만기친람식 리더십이 우선 문제로 보인다. 뜬금없이 제기된 농지 전수조사는 이런 문제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정책의 시급함과 필요성을 두고 관련 부서의 충분한 검토와 사전조율을 거쳐 나온 결정인지 모두를 의아하게 했다. 대통령의 즉흥적인 판단이나 지시가 곧바로 정책으로 이어지는 모습은 국정 운영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국민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대통령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많은 일을 직접 챙기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정책이 시의적절하고 실효성이 있는 것인지, 국정이 체계적이고 신뢰감 있게 움직이는지 하는 점이다.
안정감을 주지 못한 또 다른 문제는 반복된 인사 논란이다. 이 대통령은 사람을 쓰는 범위가 매우 좁다는 인상을 준다. 효과적으로 국정을 이끌기 위해서는 경험과 전문성은 물론, 심지어 다른 생각을 가진 인물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인사는 익숙하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의존하는 모습이다.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을 기용하는 것이 불가피한 일이라고 해도, 그것이 국정 운영의 인적 기반을 제한해서는 곤란하다.
리더십의 무게감도 아쉽다. 임기 초부터 시작된 대통령 중임을 둘러싼 개헌 논란은 실현 가능성도 크지 않은 문제를 두고 오랫동안 정치적 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북한 지뢰 사건을 둘러싼 대통령의 애매한 발언이나 ‘좌아하게’와 같은 가벼운 표현도 대통령의 언어로 적절했는지 의문이다. 소탈함이 아니라 지도자로서의 품격과 안정감의 부재로 읽힌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는 개인의 의견을 넘어 국정의 방향을 보여주는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대통령의 언어에는 신중함과 절제가 필요하다. 소통 역시 마찬가지다. 이 대통령은 SNS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국무회의를 공개하면서 국민과의 소통을 강조해 왔다. 하지만 일방적 자기주장과 지지층에 치우치기 쉬운 SNS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태도는 국정 운영의 불안정성을 높일 수밖에 없다. 국무회의 공개도 ‘국무’를 다루는 부서 책임자들 사이의 진지한 토론보다 대통령 한 사람의 발언과 지시, 질책만 눈에 들어왔다. 이런 문제들이 쌓이면서 취임 초의 기대감은 점차 실망감으로 바뀌고 있다.
이 대통령은 취임 이후 줄곧 실용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국정 운영이 과연 얼마나 실용적이었는지도 의문이다. 실용 정치의 출발점은 문제 해결이지만, 누구의 잘못인지, 누구 때문에 문제가 생겼는지를 따지는 방식으로 사안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고, 이념이나 정파적 입장이 앞서는 모습도 적지 않다.
결국 500일이 지난 지금 필요한 것은 국정 운영 방식의 쇄신이다. 대통령 개인의 판단과 지시에 의존하기보다 제도와 조직이 제 역할을 해야 한다. 인재 풀을 과감하게 넓히고 다른 의견, 쓴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 상황을 심각하게 인식하는 일이다. ‘만만해 보이는’ 야당 때문인지, 대통령의 말에 수긍만 하는 주변 때문인지는 몰라도, 상황의 심각성에 비해 이 대통령과 집권층의 위기감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앞으로 다시 500일이 지나면, 이 대통령과 집권당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지금부터 500일 후는 다음 총선을 눈앞에 둔 시점이다. 그동안의 500일이 새 정부를 지켜보며 기대와 가능성을 평가하는 시간이었다면, 앞으로의 500일은 국정 운영의 성과와 책임을 따지는 시간이 될 것이다. 그때 내려질 1000일의 평가는 더욱 냉정하고 엄중할 것이다. 지난 500일을 아프게 되돌아보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강원택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명예교수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돈나무 언니’가 점찍은 K종목 “삼전닉스 외에 4곳 더 있다” | 중앙일보
- “집 폭발한다” 17세 아들 조현병…아빠가 후회한 1가지 사건 | 중앙일보
- “지방대도 광탈” 그 ADHD 학생, 카이스트 뇌과학자 된 비결 | 중앙일보
- 합의 성관계 뒤 “6차례 성폭행당했다”…20대 여성 무고로 실형 | 중앙일보
- 일본서 숨진 23세 한국인 여대생…“징역 10년 너무 낮다” 40대 결국 | 중앙일보
- 배우 김세인 충격 폭로 “장자연 사건 때 나도 비슷하게 당했다” | 중앙일보
- [단독] 퇴근 없는 신입 온다…삼성의 ‘24시간 일하는 로봇’ | 중앙일보
- 머스크 “스페이스X 주식 1주씩 줄게” 美어린이에 깜짝 선언 | 중앙일보
- “찍은 손 지지고 싶다”…여권 리스크 된 ‘광역단체장 3인방’ | 중앙일보
- [단독] 흡연자 주머니서 1000억 털고…담배꽁초 처리 손 놓은 정부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