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불편하다, 고로 존재한다

기린은 거의 잠을 안 잔다. 하루 평균 30분에서 2시간 정도, 그것도 나눠서 쪽잠을 잔다고 한다. 내 아버지는 늘 잠을 못 주무셨다. 그에 비해 어머니는 그 섬세한 심성에도 늘 잘 잤다. 아마 그게 장수의 비결일지도 모른다. 부쩍 잠이 많아졌음에도 아직은 기억력이 좋은 어머니가 예전처럼 막 화를 내는 모습이 그립기도 하다. “화 좀 내보세요, 야단 좀 쳐주세요.”
그러면 어머니는 아이처럼 환하게 웃으시며 “화는 내서 뭐하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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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순간 무모한 첫사랑 같은 삶
태어나는 것은 하나의 불편함
도착의 기약 없는 여행길일 수도
」
![[그림 황주리]](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10/20/joongang/20261020000743910jmvp.jpg)
아흔두 살이 되신 우리 이모는 젊을 때부터 잠을 못 잔다. 수면 유도제를 두 알을 먹어야 겨우 네 시간 잔다. 날씬한 미인이던 이모는 기린을 닮았다. 어린 시절 덮기만 하면 갑옷처럼 안심이 되던 무거운 솜이불의 감각을 기억한다. 일본 여행 중 오래된 온천 호텔의 침구를 덮으면 어린 시절 이불의 감촉이 떠오른다. 일본 여행의 기억 중 인상적인 다른 하나는 작은 소도시의 마을 상점마다 가지런하게 진열된 과자들의 풍경이다. 차를 마시는 생활 습관 때문에 과자가 발달하기도 했지만, 그 다양한 포장들은 또 얼마나 정교하고 아름다운가? 요즘 한국 남성과 일본 여성의 결혼이 부쩍 늘었고 이혼율도 놀라울 정도로 적다 한다. 혹자는 일본 여성들이 대체로 검소하기 때문이라 말하지만, 한국 드라마나 K팝의 영향이 크지 않을까? 언젠가 튀르키예 여행길에서도 한국 남자와 결혼을 꿈꾸며 한국어를 공부하는 튀르키예 처녀를 만난 적이 있다.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살아오면서 내가 본 일본 여성은 대체로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 그녀들은 대놓고 타인의 결함을 지적하거나 자신의 잘못에 관해서는 무감한 무례함이 덜하다. 하긴 선입견일 뿐 다 착각인지도 모른다.
문득 어느 영화 속에서 들은 건지 기억나지 않는 만남의 절실함을 표현한 엉뚱한 말 한마디가 떠오른다. “당신을 만나기 전 700년 동안 나는 과부였어요.”
책을 출간할 때마다 실은 누구에게 책을 보내야 하는지 망설인다. 내게는 귀한 책을 누군가는 그냥 버리기도 하고, 펴보지도 않은 채 내가 모르는 누군가에게 줘버리기도 한다. 받은 사람이 만일 좋아했다면 행복한 일이다. 나 또한 얼마나 많이 그런 짓을 했을까?
누구에게 사랑을 줘야 하는지 우리는 모른다. 정치지도자 중 누구를 지지해야 하는지도. 산다는 건 그저 아무것도 모르면서 지금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한 표 던지는 일이다. 그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도 모르는 채, 그렇게 삶은 매 순간 무모한 첫사랑 같다.
거대한 의미 체계가 무너진 이후의 인간을 말하는 철학가 에밀 시오랑은 아무것도 되려 하지 말라 한다. 평생 잠을 자지 못했다는 그의 말이 이 가을 위로가 된다. 어릴 적 빨리 늙어 학교 가지 않아도 되는 게 꿈이던 나의 불편함을 오래전의 누군가가 이미 썼다는 반가움이 앞섰다. 그에게 있어 태어났다는 것은 하나의 불편함이다. 나 역시 성장하면서 느꼈던 그 어눌한 감정이 불편함이었다는 걸 이제야 안다. 죽기보다 싫었던 체육 시간에 공을 던지면 뒤로 날아가던 타고난 몸치의 불편함, 심각한 길치인 내가 던진 공도 허공에서 늘 길을 잃었다.
다수 속에서 늘 말이 막히는 어린 나는 한순간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대학 시절 친했던 친구는 어릴 적 사고를 당해 팔 한쪽이 의수였다. 몸이 불편한 그녀와 마음이 불편한 나는 오래도록 친구였다. 우리가 어떻게 멀어졌는지 모르겠다.
소설가가 꿈이던 내 어머니는 70년대 초 그 시절 헐값이던 땅을 사서 집을 짓는 일을 시작했다. 재주 많은 어머니가 타고난 감으로 설계한 집들은 실용적이라 곧잘 팔려나가 우리는 2층이 있는 큰집에서 큰집으로 계속 옮겨 살았다. 그러면서 나는 큰 집에 대한 열망이 없어졌다.
누군가에게 멋지게 보이는 일에도 관심이 없어져 간다. 어쩌면 예술가란 태어남의 불편함의 감성으로 작품을 시작해 결코 도착하지 못할 종착역을 향해가는 여행자다. 누구나의 삶 또한 그렇지 않으랴.
황주리 화가·동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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