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쳤다' 소리 듣던 아버지... 딸이 물려받은 유기농 과수원의 속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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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그릇의 샐러드! 멸망 직전의, 혹은 멸망한 지구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아삭한 샐러드일지 모른다.
처음부터 '지구적인 대의'를 품고 유기농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어느덧 자리 잡힌 유기농 배 과수원을 부모님은 딸에게 물려주고자 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관행농에 반하며 유기농을 시작한 것처럼, 딸은 아버지와 싸우며 자신만의 과수원을 만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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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정정희 기자]
| 기획의 말 |
| 기후위기와 생태학살로 드러나는 우리 사회의 불평등과 부정의. 하루하루 현실로 다가오는 생존의 위기 앞에서 과연 다른 세계는 가능할 것인가를 묻는다. 다른 세계는 물론 가능하다고 믿는다. 다만 다른 행성이 아니라 바로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땅과 아직 푸른 하늘과 바다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나무와 새들, 함께 호흡하는 뭇생명들이 공존하는 세계를 함께 상상하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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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후주 농부 서울에서 열린 919 기후정의행진에서 남태령 깃발을 든 청년 여성 농부 김후주 |
| ⓒ 변정정희 |
봄이면 하얀 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가을이면 황갈색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은 농부 김후주가 나고 자란 고향이자, 3대째 배 농사를 짓고 있는 땅이다. 저마다 크기가 다르고 더러 흠도 있지만 탐스러운 배는 유기 농사를 짓는 과수원의 결실답다. 우리나라에서는 합성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3년 이상 농사를 지어야 유기농산물로 인증 받을 수 있다. 농업용수와 토양 역시 안전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깐깐한 검사 아래 재배한 유기농산물을, 우리는 경제적으로 넉넉한 이들이 먹거나 환자식, 유아식으로 사용하는 비싼 식재료라고 여긴다. 하지만 기후 위기 시대 유기 농사를 짓는 농부는 그 너머를 말한다.
"유기농이라는 게 그런 개념이 아니거든요. 생태에 대한 존중이죠. 외부적인 투입을 최소화해서 생태계를 보존하는 거예요. 저희는 수출에 대한 요구가 많이 들어오는데 하지 않아요. 탄소 발자국을 줄이고, 지속 가능한 농사의 방향을 생각해요."
합성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들의 생산 과정에서 배출되는 탄소와 살포한 뒤에 나오는 온실가스를 줄이는 일이다. 살충제와 제초제 사용을 멈춘다는 것은, 땅을 터전으로 삼는 미생물과 곤충, 동물을 살리는 일이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먹고 살기 위해 땅을 파헤쳐왔다. 농경으로 먹거리를 안정적으로 확보했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산업형 농업'을 하는 지금, 고효율과 고수익을 향해 달려가며 더 많은 욕심을 쏟아붓고 있다. 이 땅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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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업 유기농은 땅을 지키는 농업이다 |
| ⓒ 변정정희 |
배나무들아, 덥지? 오늘만 성장을 좀 멈춰줄래?
1만 2천 평. 드넓게 펼쳐진 땅에 배나무가 자란다. 더는 농약을 치지 않아도 잎들이 푸르게 흔들리고, 아름답고 튼실한 열매가 맺힌다. 어느덧 자리 잡힌 유기농 배 과수원을 부모님은 딸에게 물려주고자 했다.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유학을 고민하던 김후주는 고향 땅으로 되돌아왔다. 하필 '철학과'여서 어쩔 수 없었다고 농담했지만, 어렵게 확립한 유기농 기술을 이어받고, 오랫동안 일군 유기 농지도 보존하고 싶었다. 청년 농부는 땅에서 어떤 미래를 보았을까?
농생활은 쉽지 않았다.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관행농에 반하며 유기농을 시작한 것처럼, 딸은 아버지와 싸우며 자신만의 과수원을 만들어 갔다. 기존의 유기농법을 이어가되, 홍보와 판매 방식은 소셜미디어를 사용하는 등 과감하게 바꾸었다. 당시 매일 다투느라 부녀 관계가 위기였다고 말했지만, 매출은 최고치를 기록했다.
진짜 위기는 밖에 있었다. 전업 농부가 된 지 10년. 예측할 수 없는 폭염과 장마, 폭우, 가뭄, 돌발 한파가 점점 더 심해졌다. 특히, 올여름은 관측 사상 최고 기온 기록을 경신할 만큼 뜨겁고 가물었다. 냉각조끼나 머리에 쓰는 양산 같은 보호장비를 마련해 겨우 넘겼다. 하지만 모두 무사히 지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농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인과 이주민들은 쓰러지는 경우가 많았다.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대책으로 '폭염중대경보 발령 시 논밭으로 절대 나가지 말아 달라'고 했지만, 경보가 없었던 날이 며칠이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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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 재난과 같은 기후 위기를 이기고 자라난 배 |
| ⓒ 변정정희 |
몇 해 전부터 배 농가에 불어닥친 과수화상병은 예방약도, 치료제도 없다. 나무가 마치 불에 탄 듯 검게 말라 죽는다. 농부의 속도 타들어 간다. 유기 농가에서는 금속 성분이나 미생물을 이용하는 등 생화학적인 방법을 연구해 보지만, 일반 농약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병을 어찌할까? 결국 전염된 나무를 잘라 불태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강력한 전염성 탓에 심하면 과수원을 폐원시켜야 한다. 몇 해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코로나 팬데믹이 떠올랐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그랬듯이 과수화상병 병균 역시 십 년 전부터 알 수 없는 경로로 들어와 우리 농가를 두려움에 떨게 하고 있다.
기후 재난으로 한 해 농사를 망친 농부가 다음 해 농사를 기약할 수 있을까? 정부에서는 대책으로 스마트팜 도입을 독려하지만, 누구보다 IT에 친숙한 30대 청년 여성 농부는 '그건 다 거짓말'이라고 지적했다. 비닐하우스나 유리온실에 첨단기술을 적용해 과채류를 키우는 일은 막대한 에너지와 비용이 든다. 이마저도 곡물과 감자, 고구마같이 식량이 될 만한 작물은 재배가 불가능하다.
기술이 발전하면 미래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처럼 유토피아를 말하지만, 현실은 빙하가 녹아 산이 무너지고, 폭염으로 논밭이 타들어 가는 디스토피아다. 농사는 생명을 다루는 일이다. 열매는 찍어내는 공산품과 다르다.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다. 문제는 농촌에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40세 미만 청년은 5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현재 70대 이상이 대다수인 농촌에서 그들이 가고 나면 어떻게 되는 걸까? 다음 세대는, 아니 20년 후에는 무엇을 먹고 살까?
유기농이면서 싸고 달고 번지르르한 배는 없다
농부가 사라지는 이유는, 농사가 어렵고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현재 유기농 인증 제도는 농가를 단속하는 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몇 년 동안 공들여 유기 농사를 지어도 근처 논밭에서 드론으로 뿌린 농약 한 방울이라도 날아와 검출되는 날이면 모든 게 무효로 돌아간다. 단속에 가까운 제도가 친환경 농업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까? 그런가 하면 유기농으로 애써 키운 농산물이 시장에서는 모양, 크기, 색깔 등 유통 기준에 미달한다면서 등급 외 농산물로 버려진다. 기후가 재난처럼 변해갈수록 열매는 제대로 자라지 못하지만, 사계절 내내 쾌적한 마트에서 과일을 구매하는 소비자는 싸면서도 달고 크고 예쁜 상품을 원한다.
"거래처에서 '점이 2개 이상 있는 이런 배는 못 받아요.' 이러면서 전량 반품을 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1년 정도 문제 제기를 하면서 여러 얘기를 해봤는데 안 돼서 최근에 탈퇴했어요."
부모님 때부터 거래한 한 친환경 생활협동조합에 배 납품을 포기했다. 유기농 배는 외관상으로 얼룩이 있거나 딱지가 생길 때가 있다. 가끔 벌레가 먹어 파여 있을 때도 있다. 당연히 맛과 영양에는 큰 차이가 없다. 오히려 더 건강한 농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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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환경 농산물 농부시장 마르쉐에서 만난 친환경 방식으로 키워 직거래로 판매하는 농산물 |
| ⓒ 변정정희 |
다행히 최근 규격 외 농산물을 못난이 농산물이나 차별 없는 농산물이라 부르며 판매하는 곳이 생겨났다. 소비자의 인식이 달라지며 시장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생산자와 소비자가 너무 동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농사를 짓는 이도, 농산물을 먹는 이도 모두 같은 지구 공동체의 일원이다.
밭농사 너머 아스팔트 위에서
단물이 꽉 들어차며 배가 영그는 수확의 계절, 농부에게 한창 바쁠 가을이지만, 김후주는 아산의 배밭이 아닌 서울의 아스팔트 위에 있는 날이 더 많다. 그에게는 수확해야 할 또 다른 열매가 있기 때문이다. 농민 운동의 일환인 아스팔트 농사는, 논밭을 떠나 낯선 도시의 아스팔트 위에 모여 농민의 권리를 외치며 투쟁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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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민권리 도심 아스팔트 위에서 농민의 권리를 함께 외치고 있는 시민 |
| ⓒ 변정정희 |
처음 유기농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그는 농사법을 설명하는 대신 '유기농 운동'이라고 답했다. 유기농은 이 땅에서 연결된 우리가 모두 함께 먹고 사는 문제이다. 농부 한 명이 아닌 여러 농민이 목소리를 모아야 하고, 소비자이며 동료 시민인 우리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 시장이 바뀌고, 정치가 달라져야 해결될 수 있다. 요즘 김후주는 과수원을 부모님과 나눠 운영하며,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와 정당의 전국농업인위원회, 청년농업인 모임 등 다양한 곳에서 청년 여성 농부로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누구나 농업이나 기후 위기에 관해 얘기할 수 있어요. 비판하거나 욕하기는 쉬운데, 다음 단계가 너무 어려워요. 한 명의 실천은 가능할 수 있을지 몰라도 어떤 지역, 나라, 세계와 같은 이런 사회 시스템을 바꾸는 것은 엄청난 투쟁과 협의와 조율들이 필요하잖아요. 저는 완전 찐 농업인도 아니고 완전 찐 정치인도 아닌 그 중간에서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의견을 모으고, 자리를 만들고, 혼자 하던 것을 함께 해보고, 그게 좋으면 더 크게 확대하는 식으로 해보려고요."
기후 재난으로 피폐해진 이 땅은 반도체와 AI, 데이터 산업을 위해 다시 한번 파헤쳐지고 있다. 과연 망해버린 지구에서 한 그릇의 샐러드 없이 누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여기 청년 여성 농부가 땅을 되살릴 밭농사를 짓는다. 사회를 되살릴 아스팔트 농사를 짓는다. 유기농 운동이다. 부디 건강한 땅에서 건강한 농부가 만든 건강한 열매가 우리 식탁에서 사라지지 않기를!
[필자 소개] 변정정희: 다큐멘터리와 라디오 방송 작가로 활동했으며, 최근 르포르타주 작업을 하며 새로운 글쓰기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책 <인생은 길고 투쟁은 진행 중>을 썼고, <우리가 잃어버린 푸른 시간>, <작가노동 선언>, <기억의 공간에서 너를 그린다>를 함께 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기획 공동진행: (사)세상과함께>, 익천문화재단 길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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