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선거 막겠다”더니 유권자가 사라졌다…세계 곳곳 ‘투표권 전쟁’
유권자인데 투표할 수 없다. 말도 안 되는 일 같지만, 최근 세계 곳곳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선거를 앞두고 부정 투표를 막기 위해 유권자 명부를 정비하거나 신분 확인 절차를 강화하면서, 정당한 투표권을 가진 시민들까지 명부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생기면서다.

먼저 인구가 14억 7000만명에 달하는 인도에선 유권자 명부 재검증을 둘러싼 갈등이 거세다. 인도 선거관리위원회는 지난해부터 약 10억명의 유권자를 대상으로 사망자와 이주자, 중복 등록자를 가려내는 작업을 진행했다. 지난 9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집권 인도국민당(BJP)이 공개한 선관위 자료에서 약 1억3000만명이 명부에서 삭제된 것으로 나타났다. 거주지를 옮긴 사람이 6300만명, 소재가 확인되지 않은 사람이 3000만명, 사망자가 2800만명 등이었다. 다만 이들 모두가 부당하게 투표권을 잃었다는 뜻은 아니다.
문제는 실제 투표 자격이 있는 사람도 명부에서 빠진 경우가 있었다는 점이다. 야권은 무슬림 등 소수집단이 신분이나 거주 사실을 증명할 서류가 부족해 불이익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실제 비하르주와 서벵골주에선 명부에서 이름이 빠져 투표하지 못한 사례가 나왔다. 반면 선관위와 BJP는 선거 조작 의혹을 부인하고 있다. 야권과 시민단체들은 갸네시 쿠마르 선관위원장의 사퇴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지난 12일에는 대법원까지 행진해 명부 정비 중단을 요구했다.

미국에서도 유권자 명부 검증을 둘러싼 법적 다툼이 이어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시민권이 없는 사람의 불법 투표를 막겠다며 연방정부의 신분 확인 시스템(SAVE)을 확대했다. 지난 5월 17일 AP통신에 따르면 최소 25개 주에서 6700만 건 이상의 유권자 등록 정보를 조회했다. 미국에선 유권자들이 직접 우편 등으로 유권자 등록을 하거나 운전면허 발급·갱신 시 자동 등록하도록 되어있는데, 이런 과정에서 비시민권자들이 유권자로 등록된 사례가 많다는 게 트럼프 행정부의 주장이다.
조사를 통해 약 2만4000건이 비시민권자 의심 사례로 분류돼 확인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 가운데 남아공 출신 미국 시민권자가 텍사스주에서 비시민권자로 잘못 분류돼 유권자 등록이 일시 취소되는 일도 있었다. 시민권을 증명할 여권을 재발급받는 사이 30일의 소명 기한을 넘긴 탓이었다. 이에 워싱턴DC 연방지방법원은 이달 19일 정부 자료의 오류로 합법적인 유권자가 투표권을 잃을 위험이 있다고 지적하며 법무부의 유권자 명부 검증 정책이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영국에선 신분증이 문제가 됐다. 지난 5월 7일 잉글랜드 지방선거에서 유럽평의회 선거감시단은 사진이 있는 신분증을 제시하지 못해 투표를 거부당한 사례를 확인했다. 영국은 2022년 선거법 개정 이후 일부 선거에서 여권이나 운전면허증 등 사진 신분증을 의무화했다. 이번 사례로 영국 정부는 은행카드 등도 신분 확인 수단으로 인정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선 선거관리 권한과 개표 방식이 논란이다. 짐바브웨는 지난 8월 독립 선거관리위원회가 맡아온 유권자 등록 업무를 정부의 주민등록 담당 기관으로 넘기기 시작했다. 나이지리아에선 지난 2월 18일 선거법을 개정해 개표 결과를 전자 전송하되 통신 장애가 발생하면 종이 집계표를 활용하도록 했다. 야권은 개표 투명성에 문제를 제기했고, 정부는 전자 전송에 장애가 생길 경우를 대비한 조치라고 반박했다.

각국의 쟁점은 다르지만, 선거의 공정성을 높이려는 제도가 정당한 유권자의 권리까지 제한할 수 있다는 우려는 공통적이다. 부정투표를 막으면서도 유권자의 투표권을 온전히 보장하는 것이 새로운 과제가 된 셈이다.
한지혜 기자 han.jeehy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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