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한국 신작 3년치 싹쓸이…80t 주문자 앤트로픽이었다

윤성민 2026. 10. 17.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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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기업 ‘도서 헌팅’]
미국 인공지능(AI) 스타트업 앤트로픽 로고. 로이터=연합뉴스

미국 인공지능(AI) 기업 앤트로픽이 지난해부터 총 5차례에 걸쳐 AI 학습을 위해 80t(톤)에 달하는 한국어 새 책을 한국 업체로부터 매입한 것으로 16일 확인됐다. 약 20만권으로, 3년 동안 한국에서 발행되는 신작 전부를 사간 것과 맞먹는 규모다. 불과 4개월 전까지도 앤트로픽의 한국어 책 매입은 계속됐다.

수출입·선적 정보를 제공하는 임포트키와 판지바에 따르면, 국내 도서도매유통사 웅진북센은 부산항을 통해 미국으로 책을 수출했다. 배에 실린 책은 미국 캘리포니아 롱비치·로스앤젤레스(LA), 워싱턴 타코마로 도착했는데, 구매 업체는 ‘베터 월드 북스’(Better World Books)로 나타났다. 베터 월드 북스는 앤트로픽이 책 조달·배송을 위해 계약한 회사로, 웅진북센의 책은 이 회사를 통해 앤트로픽으로 전달됐다.

책 수출은 지난해 3월 두 차례 그리고 5월, 7월, 올해 6월 이렇게 5번 이뤄졌다. 웅진북센은 올해 6월 수출 건에 대해 “1월 발주 요청이 들어온 거래”라고 설명했다. 선적 문서를 보면 5번의 수출로 나간 책은 총 3349박스였다. 무게는 77.2~85.1t으로 계산됐다. 이 무게라면 책은 17만~21만권 정도다. AI 기업들은 같은 책을 AI에 중복 학습시킬 필요가 없기 때문에 1종당 1권만 사간다.

대한출판문화협회에 따르면, 국내 연간 신작 발행 종수는 6만 종이 조금 넘는다. 한국에서 출판으로 생산된 3년 치 지식이 모두 앤트로픽의 AI 모델 클로드 학습에 사용됐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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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저작권 기념비적 재판 ‘바츠 대 앤트로픽’


앤트로픽이 세계 곳곳에서 책을 대량으로 구입해 AI 학습에 이용한다는 사실은 ‘바츠 대 앤트로픽’ 소송에서 드러났다. 2024년 8월 안드레아 바츠 등 작가 3인이 “앤트로픽이 책의 불법 복제본을 무단으로 내려받아 클로드 학습에 썼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된 소송이다.

재판 과정에 제출된 자료와 판결문을 종합하면, 앤트로픽은 책을 대량으로 매입한 뒤 책등을 잘라 고속 스캔을 하고, 이를 AI가 읽을 수 있는 파일로 전환한다. 그런 다음에 쪽수, 반복 문구 등을 지우는 자료 정제 작업을 거쳐 AI에 학습시킨다. 앤트로픽은 이를 ‘파나마 프로젝트’로 불렀다.

미국 법원에 제출된 ‘12호 증거자료’(Exhibit 12)엔 앤트로픽이 아시아 도서유통업체들과 어떻게 도서 공급 계약을 논의했는지 기록돼 있다. 2024년 11월 27일 회의 때 앤트로픽은 계약 진행 상황을 점검했다.

일본출판판매(닛판·日販)와는 도서 공급 계약을 마쳤다는 게 보고됐고, 웅진북센과는 앤트로픽 내부적으로 계약 내용에 대해선 승인이 됐다는 내용이 공유됐다. 대만의 도서유통사 연합발행(UDC)과도 계약이 논의 중이었다. 앤트로픽은 UDC로부터 중국 본토의 간체 중국어 도서를 수입하려고 했다. 미·중 관계 때문에 대만으로 우회해 중국 도서를 매입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츠 대 앤트로픽’ 소송의 12호 증거자료인 앤트로픽의 내부 회의 자료. 2024년 11월 27일 회의 내용엔 동아시아 도서유통사와 계약 논의한 내용이 담겨 있다. 구입 규모 등 구체적인 수치는 가려져 있다. 사진 미국 법원 제출 자료 캡처

웅진북센은 “앤트로픽으로 책을 수출한 게 맞다. 당시에는 일반적인 도서 공급 거래로 이해했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수출 도서 제목과 규모 등에 대해선 “비밀 유지 조항에 따라 공개 불가”라고 했다. 웅진북센은 국내 도서 도매 유통회사 중 1위다. 웅진북센은 지난해 국외 매출로 32억7500만원을 기록했다. 앤트로픽과 거래로 이전보다 갑자기 25억원 이상 늘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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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책 학습 끝내고 헌책 사기 시작해”


지난 6월 이후로 웅진북센은 앤트로픽에 책을 공급하지 않았다. 서점이자 문화공간인 서울책보고의 김수현 본부장은 “AI 기업들이 새 책 학습을 모두 끝내고 이젠 과거 자료를 학습하기 위해 헌책을 찾기 시작한 것이란 의심이 든다”고 말했다.

올초부터 세계 곳곳에는 AI 기업이 뒤에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대량 헌책 주문이 잇따랐다. 독일 고서점에는 새벽 시간에 대량 주문이 갑자기 몰려 들어왔고, 일본의 진보초 헌책방에는 정체불명의 대량 주문이 확인됐다. 한국에도 지난 8월부터 예스24와 알라딘의 중고서점, 그리고 서울책보고에 중고책 구입 문의가 있었다. 미국 애리조나주 도서 유통회사 B사의 구입 문의였는데, B사는 “한국어 일반 단행본을 팔레트 또는 컨테이너 단위로 정기적으로 매입할 공급처를 찾고 있다”고 이메일을 보냈었다.

AI의 새 책·헌책 학습 이전에는 디지털 복제 도서 학습이 있었다. 이 역시 ‘바츠 대 앤트로픽’에서 드러난 사실이다.

앤트로픽은 2020~2021년 라이브러리 제네시스(LibGen), 파이럿 라이브러리 미러(PiLiMi), 북스3(Books3) 등 ‘해적’ 온라인 사이트에서 약 400만 건의 디지털 도서를 다운로드받았다. 지난해 6월 ‘바츠 대 앤트로픽’ 약식 판결문은 이렇게 다운로드된 디지털 도서가 “서로 다른 대규모 언어 모델(LLM)의 학습에 쓰였다”고 판시하고 있다.

미국 재판부는 해적 사이트에서 디지털 도서 다운로드는 불법 취득으로 보고, 저작권자에게 보상하라고 앤트로픽에 명령했다. 법원은 ‘최초 출판 후 5년 이내에 미국 저작권청에 등록돼 있어야 한다’ 등의 조건을 걸어 400만 건 중 48만2460건을 보상 대상으로 분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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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트로픽, 북한 소설도 불법 다운로드


여기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를 비롯해 황석영·김영하·김애란 등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포함돼 있다. 16일 기준으로 앤트로픽 저작권 합의 사이트를 확인한 결과, 16명의 한국 작가의 책 25종이 포함돼 있었다. 이 외에 비문학 저자인 혜민 스님, 장하준 런던대 교수, 철학자 한병철의 책 9종도 있다. 모두 한국어 책이 아니라 영어 번역본이다.

보상 대상엔 북한 소설가 반디의 소설 『고발』도 있다. 이 소설은 한국에도 출간됐고, 한강의 『채식주의자』 번역가 데버라 스미스가 번역해 영어권에도 알려져 있다.

앤트로픽은 저작물 하나에 3000달러(400만원)씩, 총 15억 달러(2조원) 보상하기로 했다. 한강 등 국내 작가들도 보상에 대한 안내를 지난 1월 받았다. 미국 법원이 공개한 문서를 보면, 지난 4월 16일 기준으로 저작물 48만2460건 중 44만490건(91.3%)에 대한 보상 청구가 접수됐다.

그러나 한국 작가의 책 몇 종이 보상 대상에 포함돼 있는지는 큰 의미가 없을 수 있다. 사실 앤트로픽이 다운로드한 해적판 도서 400만 건에는 영어로 번역된 한국어 책 대부분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개발자 플랫폼 깃허브에는 PiLiMi 등에 있는 디지털 도서 명단이 올라와 있는데 『미스터 션샤인』 등 드라마를 소설로 쓴 작품부터 웹소설 등 모두 파악하기 힘들 정도의 한국 작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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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AI 저작권법 공백 상태”


AI 기업이 디지털 도서→새 책→헌책으로 이어가면서 AI 학습을 시키고 있지만, 출판물 저작권에 대한 방어막은 없는 상황이다. 앤트로픽의 보상은 해적 사이트 다운로드를 통한 불법 취득에 대한 보상이지, AI 학습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바츠 대 앤트로픽’ 판결은 AI 기업이 책을 구입해서 AI에 학습시키는 행위를 ‘공정 이용’으로 봤다.
지난 9일 서울시내 한 대형서점에 2026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캐나다 시인 앤 카슨의 서적이 진열돼있다. 뉴스1

한국은 AI 학습시 저작권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 법적 규정이 없다. 저작권법 전문가인 박정인 덕성여대 AI다이나인포 연구교수는 “2023년에 AI 학습에 대해 저작권자의 동의를 받도록 하는 내용을 저작권법에 넣으려고 했는데 무산됐다”며 “지금은 법적 공백 상태”라고 설명했다. 반면 유럽연합(EU)은 지난 8월부터 AI법을 시행하고 작가 등이 거부 표시를 한 경우 AI 학습용으로 사용할 수 없도록 했다.

출판 단체들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한국출판인회의는 15일 호소문을 발표하고 “AI 기업은 출판물 권리자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급해야 한다”고 밝혔다. 대한출판문화협회는 AI 기업의 헌책 매입을 조사할 예정이다.

윤성민 기자 yoon.sung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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