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 엄마 말이 날 살게했다…‘카약 2관왕’ 보육원 집 ‘귀한’ 자식 [안혜리의 인생]

안혜리 2026. 10. 14.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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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게임 2관왕 김효빈 선수 인터뷰


김효빈 선수가 지난달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에서 레이스를 펼친 후 환호하고 있다. 김효빈은 4인승과 2인승 2관왕에 올랐다. [사진 아이치 · 나고야 아시안게임 조직위]
" "세상은 언제나 따뜻해요. 출발선이 달라서 불공정하다는 불만, 그런 생각 해본 적 없어요. 목표가 있으니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가자, 그런 마음으로 여태껏 달려왔고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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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림 받았지만 부끄럽지 않았다
형·누나·동생 많아 자랑스러워
피해 준 축구 국대 군 면제 발언
도움 주는 진짜 어른 되고 싶어
」

담담하게 지난 삶을 들려줬을 뿐인데 나 혼자 몇 번을 울컥했다. 최근 막을 내린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에서 비인기 종목의 온갖 어려움을 뚫고 4인승과 2인승 500m 2관왕에 오른 카누(카약) 김효빈(25·울산시청) 선수와의 지난 10일 인터뷰 얘기다. 생사를 오갈 만큼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로 생후 9개월에 두 살 위 누나와 함께 보육원에 맡겨져, 학창 시절엔 '시설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왕따에 자살 충동까지 겪던 청년이 끝내 금메달을 목에 건 고난 극복 서사는 감동적이다. 하지만 2시간 넘는 인터뷰 후 유독 진한 여운이 남았던 건 다른 이유에서였다.
노력을 믿는 성실함, 어떤 출발선에 섰든 인생의 결승선은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자세, 그리고 지금까지 받은 걸 감사할 줄 알고 더 많이 갚고 싶어하는 성숙한 마음이다. 아무리 가진 게 많아도 남보다 적다고 투덜대고, 해보지도 않은 채 남 탓 사회 탓부터 하는 요즘 세상 소음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친가족과 다를 바 없는 형·누나·동생이 남보다 더 많아 자랑스러울 뿐"이라는 당당한 이 청년 앞에서 부끄러웠다. 아니, 부러웠다. 김 선수 시각에서 그의 인생을 정리했다.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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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귀한 우리 집 자식"


유치원 때였다. 왜 우리 집은 다른 친구들 집보다 훨씬 크고 방이 많은지 궁금했다. 원장님(최현숙 충남 부여 삼신늘푸른동산 원장·63)한테 물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
"응. 보육원. 넌 생후 9개월에 여기 왔어. "
내가 다른 아이들과 달리 보육원에 산다는 걸 안 후에도 처지를 심각하게 비관하진 않았다. "얘 보육원 산대"라는 놀림 받고 따돌림당할 때마다 물론 힘들었다. 울면서 원장님한테 "왜 내가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느냐"는 하소연도 참 많이 했다. 원장님은 늘 단호하게 다독여주셨다. "맞아, 넌 그런 비난 받을 사람이 아니야. 귀한 우리 집 자식이야. " 그래서인지 난 항상 여기를 시설이 아니라 따뜻한 내 집이라고 생각했다. 숙소 생활하다 가끔 놀러 가면 자고 갈 내 방 하나가 여전히 마련돼 있다. 그래서일까. 나뿐만 아니라 우리 원에서 자란 아이들 모두 여길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언제든 돌아가면 반겨주는 내 집이라고 여긴다.
두세 살 무렵. 유모차 뒤 어른이 생명의 은인 최현숙 원장님이다. [사진 김효빈]
원장님 부부가 이렇게 본인 친자식들과 똑같이 우리를 사랑으로 키워도 누군 사춘기를 심하게 앓는다. 내가 그랬다. 상주 상담사 두세 분이 일대일로 상담하며 돌봐주고 외부 정신과 도움도 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중학교 무렵부터 죽고 싶다는 나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죽을래요, 죽고 싶어요" 소리를 반복하며 방황했다. 그럴 때마다 원장님은 이렇게 말했다. "죽기는 왜 죽어. 네가 죽는다고 하면 원장 엄마는 너를 또 살릴 거야. " 빈말이 아니었다.

중3 때 심리 검사로 우울증 진단을 받아 외부 정신과 상담과 함께 약물치료를 받았는데 나아지기는커녕 약 탓인지 점점 더 무기력해졌다. 그렇게 좋아하던 운동도 하기 싫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만 들었다. 원장님이 의료진과 상의해 결단을 내렸다. "약을 끊어보자. " 불안했지만 그럴 때마다 원장실 가서 차 한잔하며 같이 울어주는 원장님의 진심 어린 얘기를 들으면서 결국 우울증을 극복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내가 시설에 들어오자마자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진 후 사경을 헤매 인근 대전병원, 심지어 서울의 큰 병원을 숱하게 드나들었다고 한다. 한 번에 늘 100명 가까이 많은 아이들이 있었지만 원장님 이하 20~30명 직원 모두 마치 내가 유일한 자식인 양 지극정성으로 돌봐 아기였던 나를 살렸다. 그리고 원장님은 이렇게 '또' 사춘기 나를 살려냈다. 이때부터 용기를 얻어 더 운동에 집중했다. 내가 원장님을 괜히 생명의 은인이라 부르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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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도 영어도, 늦지 않았다


말문이 빨리 트였고 글도 빨리 깨친 나를 두고 원장님 부부는 항상 "넌 공부해라"고 했다. 그런데 유치원 때 진작 단칼에 거절했단다. 어릴 땐 지금(187㎝)과 달리 키가 작았는데 워낙 몸이 약해서인지 오히려 공부가 아니라 운동이 그렇게 하고 싶었다. 특히 물을 너무 좋아했다. 보육원 인근 부여 백마강(금강)에 자주 갔는데, 저 멀리 물 위에 하얀 게 둥둥 떠다니는 게 뭔지 궁금했다. 초등학교 체육 선생님이 "카누"라고 알려줬고, "인근 부여중에 카누부가 있으니 한번 해보라"는 권유를 받아 태권도·육상·씨름을 돌고 돌아 중학교부터 카누에 정착했다.
유치원 무렵. 유치원 시절 태권도를 시작으로 육상 · 씨름 등 다양한 스포츠에서 두각을 나타내다 중학교부터 카누를 시작했다. [사진 김효빈]
작은 키로 초3 때 육상 단거리(80m)로 도민 체전 3등, 초6 때 한 씨름은 전국대회 3등까지 할 만큼 악으로 깡으로 버틴 경험 덕분인지 카누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중학교 땐 청소년 국가대표, 고교 시절부터는 매년 선발전에 나가 국대 상비군을 거쳐 지난해 드디어 국대로 정식 선발됐다.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솔직히 훈련이 너무 힘들어서 "언제까지 이렇게 해야 하나" 싶을 때도 많았다. 하지만 아직 올라가야 할 고지가 남았으니 더 열심히 해보자고 계속 마음을 다잡았다.

선수로서의 궁극적 목표는 은퇴할 때 그간 쌓아온 기술과 노하우, 후배들한테 아낌없이 물려주기다. 어린 선수들이 나를 치고 올라가야 카누가 발전하니까. 물론 당장의 목표는 2028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카약 4인승 500m 한국 첫 메달이다. 그러려면 우선 세계선수권과 월드컵 등에 나가 포인트를 쌓아 올림픽 본선 티켓부터 거머쥐어야 한다. 현재 점수로는 아직 부족해 계속 치열한 싸움을 할 수밖에 없다. 주변의 큰 기대가 없는 상황에서 형들과 코치진이 독기 품고 원팀으로 이번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일궜으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해외 경기나 훈련 때 만난 좋아하는 외국 유명 선수들한테 메시지 보내 "내 동작 좀 보고, 피드백 달라"는 부탁을 서슴없이 한다.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딴 아시아 정상이지만 세계 수준에선 우린 아직 약하고 부족한 팀이니까. 훈련 시스템이나 스케줄까지 알려달라, 배워서 해보겠다고 요청하면 다들 도와준다.

이 과정에서 어릴 때 공부 안 한 거 처음으로 후회했다. 지금은 번역기 돌려서 어찌어찌 연락 주고받는데, 분명 한계가 있다. 그래서 유료 온라인 영어 수업 신청해서 하루 1시간씩 영어 공부하고 있다. 좀 더 일찍 했더라면 좋았겠다 싶지만 아직 늦지 않았으니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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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불안하지 않다


카누가 한국에선 생소한 비인기 종목이다 보니 실업팀 수가 많지 않고 기업 스폰서는 꿈도 못 꾼다. 웬만한 장비도 해외 경기 나갔을 때 선수들이 사비로 직접 사 올 정도라 은퇴하면 지도자 자리 구하기가 녹록지 않다. 일단 노력하겠지만 만약 지도자가 안 돼도 괜찮다. 어릴 때부터 워낙 요리를 좋아해 주방 드나들면서 이것저것 해봤던 터라 그쪽으로 진로를 바꿀 생각도 있다.

보육원 출신, 게다가 운동만 하느라 공부 소홀히 했다고 하면 선수 이후의 내 삶을 걱정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번 기회에 오해를 바로잡고 싶다. '만 18세에 보육원 퇴소하면 나라가 주는 500만원밖에 없어 자립준비청년들 삶이 막막하다'는 식의 언론 보도를 꽤 봤다. 아니다. 국가와 지자체의 자립정착금과 매달 나오는 자립수당, 아이 이름으로 쌓이는 개인 후원자 통장, 그리고 살아온 생필품 지원 등 다양하다. 신청만 하면 2년마다 갱신할 수 있는 LH(한국토지주택공사)의 청년 임대주택도 있다. 풍족하진 않아도 열심히 살면 살 수 있다. 만약 시설 청년들이 이런 복지혜택을 못 받는다면 그건 시설 원장이나 자립지도사 등 어른들이 제대로 알려주고 챙겨주지 않은 잘못이 아닐까 싶다.

지난달 27일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에서 2개의 금메달을 딴 김효빈 선수(가운데)가 공항에 마중나온 최현숙 원장(사진상 김 선수 오른쪽)과 이공헌 대표(김 선수 왼쪽) 부부에게 각각 금메달을 걸어줬다. 김 선수는 생후 9개월부터 최 원장이 운영하는 시설에서 컸다. [사진 김효빈]

최근 물의를 빚은 아시안게임 축구팀의 경솔한 군 면제 발언도 이런 맥락에서 어른의 잘못을 떠올리게 된다. 우선, 초등생도 다 아는 기본적 예의 없는 선수들의 발언이나 '절둑 세리모니' 영상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지뢰 사고로 피해 본 군 장병이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이나. 이런 선수들 잘못으로 피해는 엉뚱한 다른 선수들이 받을 텐데 정말 화가 난다. 축구팀 안에 이걸 미리 말해준 지도자가 없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난 다른 어른이 되고 싶다. 어렵게 자란 만큼 작게는 후원이나 봉사활동, 크게는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을 행복하고 건강하게 품어주는 기관을 만들고 싶다. 당장은 이 말을 꼭 하고 싶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뭐든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으니, 나를 보고 힘 내라고.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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