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손잡고 간 잠실…아들 손잡고 나왔네요

고봉준 2026. 10. 14.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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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열린 두산-롯데전이 끝난 뒤 펼쳐진 불꽃놀이. 이날 경기는 잠실구장에서 열린 정규시즌 최종전이었다. [사진 두산 베어스]

1995년 가을, 김정연(가명)씨는 고3이었다. 그해 담임 선생님은 OB 베어스(현 두산)의 홈경기를 모두 직관했다. 때론 혼자가 아니었다. 반 아이들을 번갈아 데리고 갔다. 수험생들에게 잠실 외야석은 교실 밖의 또 다른 교실이었다. 그해 OB는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담임 선생님과 아이들은 매점에서 과자를 잔뜩 사다 교실에서 우승 파티를 열었다. 김씨는 “지금처럼 메마른 고3 교실에선 상상도 못 할 낭만이었다. 나는 그 시절을 두산과 함께 보냈다”고 했다.

잠실야구장에는 이런 사연이 셀 수 없이 쌓여 있다. 누군가는 연인과 첫 데이트를 했고, 누군가는 그 연인과 헤어진 뒤 홀로 외야석에 앉았다. 퇴근길 넥타이를 풀고 맥주 한 잔으로 하루를 털어 내던 어른들의 놀이터였다. 아버지 손을 잡고 왔던 꼬마는 어느새 자기 아이의 손을 잡고 같은 자리에 앉는다. 역전승에 낯선 옆자리 사람과 얼싸안았고, 끝내기 패배에 말없이 지하철역으로 걸었다.

1982년부터 올해까지 잠실을 찾은 프로야구 관중은 모두 7382만4821명이다. 대한민국 인구보다 2000만 명 넘게 많다. 7000만 개가 넘는 사연이 이곳을 거쳐 갔다.

그 잠실구장이 12일 은퇴식을 치렀다. 롯데와 두산의 정규시즌 최종전이 끝난 뒤였다. 엄밀히 말하면 ‘두산의 은퇴식’이다. 당장 14일 LG 트윈스와 두산의 와일드카드 결정전이 열리고, 포스트시즌 경기도 더 남아 있다. 하지만 정규시즌 마지막 홈경기를 치른 두산은 작별을 미루지 않았다. 잠실구장은 올 시즌을 끝으로 철거되고, 그 자리에 2032년 3만 석 규모의 돔구장이 들어선다.

같은 날 ‘굿바이 잠실구장’ 깃발을 흔드는 어린이 팬. [사진 두산 베어스]

경기장 은퇴식이 처음은 아니다. 2008년 뉴욕 양키스는 양키스타디움 마지막 경기에서 역대 레전드들을 각자의 포지션에 세웠다. 2006년 아스널의 하이버리 고별전에서는 티에리 앙리가 해트트릭을 한 뒤 무릎을 꿇고 잔디에 입을 맞췄다. 국내에서도 광주 무등경기장과 대구시민야구장이 새 구장으로 떠나기 전 작별 행사를 열었다.

그러나 잠실만큼 많은 추억을 품은 경기장은 없다. 가장 인기 있는 두 팀이 수도 서울의 한 지붕 아래 함께 살았다. 한국 프로야구의 절반이 잠실에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야구도 잠실을 보내기 싫은 눈치였다. 타격전 속에 경기는 3시간 31분 동안 이어졌다. 경기가 끝나자 돔구장에서는 볼 수 없는 불꽃놀이가 잠실의 밤하늘을 수놓았다. 두산이 정한 은퇴식의 키워드는 ‘연대기’였다. 시대를 추억할 줄 아는 두산이라 쓸 수 있는 시나리오였다. 두산은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매 시대 한 차례 이상 한국시리즈 정상에 오른 팀이다. 몇 차례 암흑기를 겪었지만 그때마다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조명이 꺼진 그라운드에 시대를 대표하는 전설들이 차례로 등장해 잠실에 작별을 고했다. 2010년대 내야를 지킨 ‘왕조의 유격수’ 김재호, 2000년대 ‘허슬두’를 대표한 ‘투혼의 필승조’ 정재훈, 1990년대 기적을 함께한 ‘미스터 OB’ 김형석이 인사했다. 김정연씨 반 아이들이 과자 파티를 열던 그 1995년의 주역들이다.

대미는 1980년대 OB의 역사를 연 ‘영원한 불사조’ 박철순이 장식했다. 고별사를 마친 네 명의 전설은 잠실의 홈플레이트를 함께 들어 두산 주장 양의지에게 건넸다. 잠실의 현역 은퇴를 알리는 의식이었다.

마지막은 밴드 봄여름가을겨울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였다. 두산 팬들이 가장 아끼는 노래다. 8회 공격을 앞두면 늘 흘러나와 잠실을 달궜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도 팬들은 휴대전화를 열어 화면 불빛으로 장관을 만들었다. 2만여 관중의 떼창이 겹치며 은퇴식은 막을 내렸다. 행사가 끝나고 한참이 지나서도 팬들은 잠실 밖에서 응원가를 목청껏 부르며 마지막 추억을 새겼다.

고봉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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