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달에 보낸 우주선, 경인고속도로의 또 다른 이름

이영천 2026. 10. 11.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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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청(瀝靑)은 천연탄화수소물의 총칭이다.

경인고속도로가 착공된 1967년, 경인선과 경인로 주변으로 도시화가 서서히 진행 중이었다.

경인고속도로는 대체로 평탄한 지형을 지난다.

1967년 3월 착공 당시 경인고속도로는 기점과 종점이 지금과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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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기억을 찾아서] 1967년 착공부터 통행료 징수까지, 경인고속도로의 역사

[이영천 기자]

역청(瀝靑)은 천연탄화수소물의 총칭이다. 영어로 비투먼(bitumen), 성경에선 피치(pitch)라 했다. 천연 역청은 오래전부터 건축재료나 접착제 등으로 사용해 왔다. 구약에 등장하는 '바벨탑'이나 '노아의 방주'에 사용된 게 대표적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아스팔트(asphalt)나 타르(tar)도 모두 역청의 종류다.

19세기 후반 석유를 정제하고 난 최종 산물인 끈적끈적한 중유를 증류하게 되면서 아스팔트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다. 20세기 초, 아스팔트에 모래나 자갈 등 골재를 섞은 아스콘(asphalt-concrete)을 도로포장 재료로 본격 사용하게 된다. 이로써 고속의 자동차 주행이 가능한 발판이 마련되었다. 자동차의 성능향상도 평탄도와 접착력이 뛰어난 아스콘의 발달에 전적으로 힘입은 바다. 고속도로 탄생의 발판이다.

독일의 아우토반(autobahn)은 이런 바탕에서 구상되었다. 1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바이마르 공국은 그러나 재정이 빈한했다. 1932년 본∼쾰른 20km가 아우토반 효시다. 1933년 나치 정권에 의해 건설이 본격화한다. 히틀러가 구상한 아우토반이 2만km였다.

혹자는 1923년 이탈리아의 '아우토스트라다'가 세계 최초 고속도로라 주장하기도 한다. 무솔리니 집권기다. 사실 여부를 떠나 파시즘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서 생겨났다. 우리나라의 고속도로 구상과 건설도 독재자에 의해 이뤄졌다. 우연의 일치일까.
▲  우측 상단의 제2한강교(양화대교)와 당시 시점인 사거리(경인고속입구), 그리고 안양천이 구불구불하다. 농지로 추정되는 목동, 그 왼쪽 한가운데 요금소가 가느다랗게 보인다. 맨 좌측에 현재 신월IC 옆 반달 모양의 '서서울호수공원'이 까맣다(1969).
ⓒ 국토정보플랫폼
군사 정변으로 나라를 독차지한 독재자가 1963년 12월 독일(서독)을 방문한다. 차관을 얻으러 갔다. 광부와 간호사의 파견이 선결 조건이었을 개연성은 농후하다. 일정 중에 160km/h의 아우토반을 경험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고속도로를 구상'했다는 일화는 사실일까. 그로부터 3년 반 후인 1967년 3월 24일, 우리나라 최초 경인고속도로가 착공한다. 아우토반 탄생 35년 후이고, 제6대 대통령선거 40일 전이다.

경인과 경부고속도로

철도는 물론 전신과 전화, 우편까지 서울∼인천을 잇는 게 최초였다. 1899년 개통된 '경인선' 철도가 대표적이다. 다만, 신작로라 부른 '경인로'는 예외였다. 1936년 개통이니, 오히려 조금 늦은 편이다.

모름지기 두 도시 간 교통이 경인선에 크게 의존한 까닭으로 해석된다. 경인로는 경인선과 거의 나란하다. 그럼에도 두 도시를 잇는 주요 도로로 자리매김해왔다. 현재까지도 간선 기능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
▲  서울-인천간 고속도로 기공식이라 써진 문 형식의 조형물. 왼쪽에 건설부가, 오른쪽에 시공을 맡은 회사이름이 써 있다. 착공 후에 기공식을 했는지 날짜가 1967년 5월 27일이다.
ⓒ 인천시청
경인고속도로가 착공된 1967년, 경인선과 경인로 주변으로 도시화가 서서히 진행 중이었다. 뭔가 변화가 필요했다. 이웃한 화곡동에 30만 단지가 구상되었고 신월동과 부천, 부평은 허허벌판 다름 아니었다. 목동은 영등포산업단지 배후로 슬럼화가 진행 중이었다.

경인고속도로는 대체로 평탄한 지형을 지난다. 일부 갯벌도 있으나, 첫 고속도로를 실험하기엔 대체로 무난해 보였다. 노체(路體)도 흙을 쌓아 만들었기 때문에 공사가 까다롭지 않았다. 경인로에서 4.0∼4.5km의 북쪽에 계획되었다. 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1966)에서 제시한 '경인공업지대'의 인프라로 계획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1967년부터 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시작되었고, 그해 5월 3일이 대통령 선거일이다. 4월 29일, 장충단 공원 유세에서 박정희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공약으로 들고 나온다. 급박했나 보다. 굴욕적인 한일 협정과 베트남파병으로 궁지에 몰려 있었다.
▲  1968년 당시 경인고속도로 시점 부근에 해당하는 목동교의 2020년 모습.
ⓒ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
나라는 가난하기 그지없고, 자동차도 그다지 많지 않던 시절이다. 반대가 극렬했다. 그럼에도 밀어붙였다. 그 배경에 공사 중인 경인고속도로의 자신감과 상징성이 깔려있지 않았을까. 철도 위주의 교통정책이 도로교통으로 급변하는 순간이다. 경인고속도로보다 늦었음에도 경부고속도로가 '고속국도 1호선'의 지위를 꿰찬다.

경인고속도로주식회사

1967년 3월 착공 당시 경인고속도로는 기점과 종점이 지금과 달랐다. 제2한강교(양화대교)가 남쪽으로 뻗어 교차하는 영등포 양평동 사거리가 시점이다. 현재 '경인고속입구'라 불리며, 당시 흔적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이곳을 기점으로 내리∼부평∼석남∼용현동∼인천항제2부두를 잇는 폭 20.4m, 길이 29.5km의 왕복 4차선이었다.
▲  무척 단순하게 그려진 경인고속도로 조감도(1967). 양화대교와 평면 위의 시종점, 김포공항과 부평, 도로 단면을 보여 주고 있다. 도로가 지나는 구간이 허허벌판이다.
ⓒ 인천시청
이에 앞서 경제개발 1차 계획 중 수송부문의 획기적인 개선이 필요하다는데 인식이 집중됐다. 그 결과 1965년 9월 당시 교통부가 세계은행(IBRD)과 용역계약을 체결한다. 요지는 '우리나라 교통의 종합적인 조사·연구'에 관한 총체적인 내용이었다. IBRD가 4개의 해외 합동조사단을 추천한다.
조사단이 1966년 6월 최종보고서를 제출한다. 보고서는 '기존 철도·공로(公路)·해운 부문의 수송 능력이 한계에 이르렀고, 공로 교통에 대한 수요가 급증할 것이며, 도시에 편중된 산업과 인구 분산을 위해서는 기존 도로망의 정비와 함께 고속도로의 신설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적시하고 있다.
▲  1968년 개통 당시 경인고속도로 시점이었던 경인고속입구 교차로. 당중초등학교 인근이다. 사진 오른쪽 방향이 목동교로 향하는 국회대로의 현재다.
ⓒ 이영천
공사로 당시 신생 업체인 '삼안산업'이 선정된다. 그러나 경험이나 시공 능력에 있어서 부족한 점이 많아 공사 진척이 더뎠다.

이에 당시 도급순위 1, 2, 3위인 현대·대림·삼부가 주식회사를 설립, 경인고속도로에 투자 및 시공에 참여하게 한다. 이들 3개 민간건설사가 세운 회사가 설립자본금 10억 원의 '경인고속도로주식회사'였다. 무엇보다 공사 기간 단축이 목적이었다.

두 고속도로 준공

민간건설사가 세운 회사 때문이었을까. 양평동∼가좌동까지 23.5km가 1년 9개월만인 1968년 12월 21일 완공된다. 잔여 6km는 공사 중이다. 이때 경부고속도로가 서울∼수원까지 22.4km도 완공된다. 경부고속도로는 11개월을 못 채운 기간이다.
▲  경인고속도로 개통식(1968.12.21). 현재의 홍익병원별관 앞에 있었던 요금소를 지나는 자동차. 요금소 위에 개통을 알리는 글이 써 있다. 그날 양평동 당중초등학교에서 서울-인천간, 서울-수원간 고속도로 준공식이 같이 열렸다.
ⓒ 인천시 부평구청
서울을 중심으로 서쪽과 남쪽으로 두 개의 고속도로가 뿌리를 내린 셈이다. 대대적인 준공식이 개최된다. 양평동 당중초등학교 교정에서다. 최고 권력자가 참석해 "특히 이 공사에서 자랑스러운 것은 두 고속도로를 모두 우리 기술과 자본으로 세계에서 가장 싼 값에 가장 짧은 시간 안에 이룩했다는 점입니다"라며 치하했다.
▲  1968년 12월 21일 서울-인천간, 서울-수원간 고속도로 준공식이 같이 열렸던 당중초등학교 교정의 현재.
ⓒ 이영천
8시간 3교대로 일하며, 거기에 뼈를 갈아 넣었을 노동자들의 노고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다. 자랑스러워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혼란스럽다. 나머지 6km 구간은 지반이 연약해 침하하는 지반의 보강과 안정화가 필요한 구간이다. 애당초 갯벌이던 곳이기 때문이다.
가좌∼인천항 구간은 1969년 7월 21일에 완공된다. 이로써 세계에서 7번째 고속도로를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준공된 해, 미국이 달에 우주선을 보냈다. 그 우주선의 이름을 따 처음엔 '아폴로 하이웨이'라 불렸다. 1970년 7월 7일 완공되는, 당시 438km의 경부고속도로보다 1년 빠르게 완공된 것이다.
▲  당시 경인고속도로의 요금소(1970). 통행량이 많지 않았는지, 요금 부스가 몇 개 안된다.
ⓒ 인천시 부평구청
▲  경인고속도로 요금소가 있었던, 현재 홍익병원별관 앞의 모습. 지하차도가 생기고 양쪽으로 부채도로가 붙었어도, 당시 요금소 모양은 그대로 남아 있다.
ⓒ 이영천
준공정산 공사비는 31.5억 원이다. 정부예산이 14.7억, 민간투자가 12.6억, 아시아개발은행(ADB) 차관이 4.2억 원이다. 한국도로공사 같은 공기업이 없던 시절이다. 이제 투자비를 회수해야 했다. 특히 민간 투자비에 대한 원리금이 문제다. 지금의 홍익병원 별관 앞에 요금소를 두었다. 통행료 부과로 투자비를 회수하려는 구조다.
▲  경인고속도로 종점인 신월IC 부근의 2015년 모습. 국회대로~경인고속도로로 길게 이어진 모습이 보인다. iC 옆으로 야구장과 서서울호수공원이 보인다.
ⓒ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
고속국도 2호선이었다. 세월이 흘러 1985년과 2001년, 대대적인 노선조정과 번호 변경이 이뤄진다. 이때 '고속국도 120호 경인선'으로 재탄생한다. 기점을 서울이 아닌 인천으로, 종점을 서울로 변경한다. 도로 길이도 인천나들목∼신월나들목 23.89km로 짧아진다. 2017년 노선을 재조정, 서인천나들목∼신월나들목 13.44km로 더 짧아진다. 밀집된 도시화의 영향이다.

경인고속도로 주변은 이제 빽빽한 도시가 되었다. 교통량은 증가하는 인구에 따라 기하급수로 늘었다. 용량을 키우려는 지하도로 계획이 여전히 거론 중이다. 도로는 과연 공급만이 능사일까. 지·정체가 생기면 생기는 대로 자연스럽게 흐르는 게 도로다. 교통도 물처럼 흐르는 '流(류)'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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