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통보다 끔찍한 현실… 홀로 탯줄 잘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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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통은 예고 없이 집 화장실에서 시작됐다. 지영(가명)씨는 부랴부랴 가위를 찾아 끓는 물에 담갔다.
혼란스러운 지영씨 머릿속과 다르게 출산 시점은 다가왔다.
예정일이 언제인지도 정확히 모른 채 집 화장실에서 아이를 낳았고, 갈 곳은 베이비박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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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끊이지 않는 병원 밖 출산

진통은 예고 없이 집 화장실에서 시작됐다. 지영(가명)씨는 부랴부랴 가위를 찾아 끓는 물에 담갔다. 진통이 컸지만 119를 부르지 않았다. 병원에서 출산할 경우 자동으로 출생 사실이 기록되는 출생통보제가 시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출산의 고통보다 출산 사실이 알려지는 게 더 끔찍했다. 소독한 가위로 혼자 탯줄을 잘랐다.
한 달 전 뱃속에서 작은 움직임을 느꼈다. 뒤늦게 임신 사실을 알았지만 출산 준비는 하지 못했다. 어쩌면 외면하고 싶은 현실이었을지도 모른다. 상황은 막막했다. 아이 아빠인 남편과는 이혼 조정 중이었고, 경제적인 상황도 좋지 않아 신용회복 절차가 진행되고 있었다.
고민 끝에 휴대전화를 들었지만 남편의 반응은 예상대로 차가웠다. 지영씨도 이혼 이후 아이를 혼자 키울 자신이 없었다. 생계를 위해서는 출산 이후에도 일을 쉴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임신중절도 알아봤지만 이미 시간이 많이 흘러 불가능했다. 혼란스러운 지영씨 머릿속과 다르게 출산 시점은 다가왔다.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한 달이 흘러버린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머릿속에 언젠가 들어본 베이비박스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지영씨는 출산 직후 거동이 불편한 몸으로 아이를 품에 안고 베이비박스로 향했다.
2024년 7월 보호출산제와 출생통보제가 시행된 지 2년이 넘었다. 정부는 영아 유기를 막고 아동을 보호하기 위해 임산부들이 가명으로 출산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했다. 대신 의료기관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지방자치단체에 통보하게 했다. 정책은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고 있다. 2년여 동안 상담을 거쳐 217명의 위기 임산부가 보호출산제를 택했다. 유기 아동 수는 2023년 88명에서 지난해 19명으로 크게 줄었다.
그럼에도 베이비박스를 찾아오는 발걸음은 끊이지 않고 있다. 2024년 7월 이후 서울 관악구에 있는 주사랑공동체 베이비박스에서 66건, 경기도 군포에 있는 새가나안교회 베이비박스에서 4건의 상담이 진행됐다. 국민일보 이슈탐사팀은 2024년 7월 이후 지난 8월까지 2년간 베이비박스에서 진행된 상담 70건을 심층분석했다.
확충된 안전망은 역설적으로 마지막까지 존재하는 사각지대의 존재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 출산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극히 꺼리는 미혼모들에게 새로운 제도는 아직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밥벌이를 위해서는 어린아이를 잠시 맡겨야 하는데, 맡길 곳을 찾지 못해 베이비박스까지 떠밀려오는 경우도 많았다. 아이를 낳았지만 힘들고 무섭고 어려운 이들은 여전히 제도 밖을 떠돌고 있었다.

가명으로 의료기관에서 출산이 가능하도록 한 보호출산제가 도입됐지만 ‘병원 밖 출산’은 계속되고 있다. 2024년 7월 도입 이후 2년여간 베이비박스를 찾아온 산모 70명 가운데 14명(20%)은 병원이 아닌 곳에서 자가 분만 등의 방법으로 아이를 출산한 것으로 파악됐다. 가명조차 남기기 싫은 산모들의 흔적이다.
신분 노출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다. 미성년자거나 미혼인 상황이어서 가족들에게 임신 사실을 숨겨야 하는 이들이 많았다. 보호출산제와 함께 도입된 출생통보제로 인해 의료기관에서 출산 사실이 기록되는 것을 우려하는 사례도 있었다. 임신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주변에 이를 알리지 않기 위해 임신 기간 내내 일부러 병원 진료를 피하기도 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고립된 상황에서 출산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위험한 출산’을 감내했다.

미혼모 B도 임신 사실을 깨달은 뒤로는 병원을 가지 않았다. 혹여라도 임신 사실이 주변에 알려질까 두려웠고 진료비도 부담이 됐다. 당연히 가족들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아이 아빠는 자신의 아이일 리가 없다며 현실을 부정했다. 예정일이 언제인지도 정확히 모른 채 집 화장실에서 아이를 낳았고, 갈 곳은 베이비박스뿐이었다.
보호출산제·출생통보제 도입과 함께 위기 임산부가 언제든 상담을 받을 수 있는 위기 임산부 상담 제도가 도입됐지만 극도로 불안에 떠는 이들은 이마저도 불신했다. 노미진 생명터미혼모자의집 원장은 11일 “기본적으로 위기 임산부들은 자신의 정보가 노출되는 것에 대해 불안을 느낀다”며 “위기 임산부 상담이라고 하더라도 국가에 자신의 정보가 남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병원 밖 출산은 산모와 아이 모두의 건강을 위협한다. 의료기관에서 출산하지 않고 베이비박스를 찾아온 산모 14명 가운데 7명(50%)은 즉각적인 의료 조치가 필요한 경우였다. 출산 직후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한 B의 아이는 저체온 상태였다. 베이비박스에 온 뒤 곧바로 응급실로 이송됐고 결국 신생아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자가분만 후 베이비박스를 찾아온 미혼모 C는 심한 출혈이 있었다. 제대로 수유하지 못해 아이도 위험한 상황이었다. 상담에 앞서 산모와 아이 모두 병원으로 이송됐다.
제도가 시행된 지 2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보호출산제의 정확한 의미 등을 잘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실제로 베이비박스를 찾아온 병원 밖 출산 산모 14명 중 10명은 상담을 거쳐 보호출산제를 택한 것으로 나타났다. 보호출산제에 따르면 출산 이후 1개월 이내에도 보호출산제를 선택할 수 있다. 이 경우 ‘출산 후 아동보호’로 분류된다. 출산 전에 제대로 안내를 받았더라면 굳이 위험한 병원 밖 출산을 시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는 경우들이다.
산모 D는 베이비박스에 오기 전 먼저 지역 기관에서 상담을 받았다. 하지만 출생신고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설명을 해도 기관에서는 출생신고를 해야 입양을 보낼 수 있다는 안내만 반복했다고 한다. D는 상담을 통해서는 보호출산제의 취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제도의 존재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출산 전후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제대로 이용하기는 힘들었다. 주변에 임신 사실을 숨겨왔던 미혼모 E는 보호출산제를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이용 절차는 충분히 알지 못했다. 결국 E도 자가분만 직후 베이비박스를 찾아왔고, 출산 이후에야 보호출산 절차를 진행키로 했다. 베이비박스를 통해 충분히 제도를 인지한 뒤 다시 공적 체계로 연결이 된 것이다.
베이비박스 관계자는 “보호출산제나 위기 임산부 지원 제도에 대해 대부분의 산모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위기 임산부들은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기 때문에 상담을 한 번만 받아서는 잘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며 “내용을 알더라도 출산을 앞두고 겁에 질린 산모들이 제대로 이용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고 설명했다.
2024년 7월 이후 베이비박스를 찾은 상담자 70명 가운데 최소 24명은 양육 의사가 비교적 분명하게 있었지만 이 가운데 16명(66.7%)은 경제적 이유 등으로 베이비박스에 일시 보호를 요청한 것으로 파악됐다.
미혼모 F는 아이를 출산하고 한 달 뒤 베이비박스를 찾아왔다. 스스로 출생신고까지 하는 등 아이를 직접 키우고자 하는 의사는 확고했다. 하지만 문제는 냉혹한 현실이었다.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았다. 본인 명의 계좌까지 이용이 정지될 정도였다. 이 때문에 정부 지원금을 받더라도 꺼내 쓸 수가 없었다. 다시 일을 시작하려면 아이를 어딘가에 맡겨야 했다. 상담을 통해 아이만 보호할 수 있는 곳을 문의했지만 마땅한 곳을 찾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미혼모 G의 사정도 비슷했다. 임신 사실을 알고는 1308위기상담지원센터에 문의했지만, 일을 계속 해야 하는 상황에서 미혼모 시설 입소는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대부분의 미혼모 시설에서는 아이와 엄마가 함께 지낼 것을 권고한다. 아이만 보호할 수 있는 시설을 찾기는 어렵다. 정부의 안내에 따라 상담을 받았지만 답을 찾지 못하고 결국 베이비박스로 찾아온 경우다. 베이비박스로 찾아온 이들의 사례를 보면 여전히 사각지대가 남아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위기 임산부들은 사회적으로 고립돼 있었다. 산모 H는 경구피임약을 복용하고 있었지만 예상치 못한 임신이 이뤄졌다. 임신중절을 고려했으나 아이 아빠는 출산을 원했다. 그러나 출산 무렵 아빠는 집을 나갔다. 시댁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양육 의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홀로 감당해야 하는 출산과 육아가 너무 막막했다. 친부모와도 수년 전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기초생활수급을 신청했지만 자산 등 요건이 맞지 않아 거절당했다. 그가 기댈 곳은 베이비박스뿐이었다. 베이비박스 상담 이후 분유나 기저귀 등 필수품을 택배로 지원받기로 하고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산모 I도 출산 후 아이를 보호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베이비박스를 찾았다. 아이 아빠와 교제 중 임신했지만 연락이 두절됐고 출산 사실을 알리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아이 엄마는 아이를 직접 키울 의사가 있지만 직장과 주거 문제로 양육할 자신이 없는 상태였다. 미혼모 시설 입소 지원을 고려했으나 여건이 허락되지 않았다. I는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맡기고 회사와 재택근무를 조율하는 등 직접 양육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당초 입양 의사를 갖고 있던 I는 다행히 입양을 철회하고 아이를 직접 키우기로 결정했다.
심선희 경기도여성가족재단 연구위원은 “위기 임산부의 상황은 굉장히 복잡하다”며 “어느 정도 경제적 여건이 갖춰진 다음에 직접 키우고 싶은 이들을 위해 아이를 일시적으로 보호해주는 제도적 장치 도입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경기도 군포 새가나안교회 베이비박스 관계자는 “베이비박스는 당장 하루도 아이를 키울 여건이 허용되지 않는 사람들이 찾는 마지막 공간”이라고 했다.
미혼모 J는 미혼모 시설에서 생활하며 입양 절차를 알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 아빠와 연락이 끊어졌다. 이 때문에 입양 절차가 길어질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길어지는 시간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결국 미혼모 시설에서 나와 베이비박스 문을 두드렸다.
친부의 동의를 받기 위해 ‘폭력 남편’을 다시 찾아가야 하는 어려움도 있다. 미혼모 K는 출산 후 한 달 가까이 홀로 아이를 키웠으나 도저히 아이를 키울 여건이 안 된다는 생각에 베이비박스에 일시 보호를 요청했다. 아이의 아빠는 폭력 성향 등으로 이미 헤어진 상태였다. 임신 사실을 알리려 전화했지만 이번에도 욕설이 날아왔다. 여러 상황에 지친 K는 결국 입양 절차를 알아봤는데, 입양을 보내려면 친부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안내를 받았다.
입양체계 개편 과정에서의 혼란 역시 베이비박스행을 부추겼을 가능성이 있다. 정부는 입양 절차의 투명성을 강화하고 아동의 권리를 보장하겠다는 취지로 지난해 7월 공적 입양체계를 시행했다. 그동안 민간 입양기관 중심으로 운영되던 입양 시스템을 공적 시스템으로 개편한 것이다. 이전에는 민간 입양기관이 아동 보호, 예비 양부모 조사, 결연 등을 담당했으나 이제는 지자체가 입양 대상 아동을 결정하고 보건복지부 입양정책위원회가 결연을 심의한다.
하지만 행정 절차가 복잡해지면서 입양이 전반적으로 지연되는 병목 현상이 발생했다.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실이 복지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입양이 공적 체계로 편입된 지난해 7월 이후 1년 동안 최종적으로 입양이 완료된 건 단 6건에 불과했다. 입양추진연대에 따르면 8월 말 기준 입양을 기다리는 예비 입양 부모가 825가정, 아이는 397명이다. 복지부도 입양 신청이 단일 창구로 일시적으로 집중되면서 지연 현상이 발생했다고 시인했다. 정부는 지난 3월부터 가정 조사 인원을 확대하고 한 달에 한 번이었던 결연 심사 회의를 두세 번으로 늘리는 등 입양 절차 개선에 착수했다.
이런 상황에서 신속한 입양을 원했던 이들 중 일부가 베이비박스와 보호출산제로 흘러들어왔을 수 있다. 베이비박스 관계자는 “입양 절차의 어려움으로 베이비박스에 도움을 요청하는 산모가 적지 않다”며 “일부 산모들은 입양 절차를 우회하기 위해 보호출산제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이슈탐사팀=이강민 김지훈 김판 기자 rive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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