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 화양계곡의 파노라마

김병모 2026. 10. 8. 09:37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지난 6일, 수려한 자연경관과 문화유산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속리산 화양계곡(화양구곡)을 찾았다.

어느덧 그는 화양동 계곡의 주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사실 화양동구곡 제8곡 학소대에 이르러 그만 돌아설까 망설였다.

평일이라 그런지 화양계곡을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화양구곡의 풍광은 말할 것도 없고, 잘 정돈된 계곡과 도로도 기억에 남는다.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병모 기자]

▲  지난 6일, 속리산 화양계곡(화양구곡)을 찾았다.
ⓒ 김병모
지난 6일, 수려한 자연경관과 문화유산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속리산 화양계곡(화양구곡)을 찾았다. 그동안 얼마나 벼르고 벼르던 여행이던가. 가을 날씨답게 화창한 햇살로 계곡이 눈부시다. 귓불로 스치는 계곡의 바람마저 시원하다. 조선 중기 대학자이자 정치가 우암 송시열이 중국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흠모하여 화양구곡이라 지었다고 한다. 아홉 곳의 절경이 화양계곡을 따라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경천벽, 운영담, 읍궁암, 금사담, 첨성대, 능운대, 와룡암, 학소대, 그리고 파천.

화양구곡에 도착하자마자 필자의 눈을 바로 사로잡는 곳은 화양구곡 중 제2곡, 운영담(雲影潭)이다. 구름의 그림자가 맑은 물속에 드리워진다는 의미이다. 운영담을 눈이 시리도록 바라본다. 맑은 날씨 탓일까. 깎아지른 절벽 바위에 새겨진 암각서 '운영담(雲影潭)' 글씨체가 못 속에서 아른거린다. 운영담의 경치를 담은 조선 화가의 그림도 전시되어 있다. 운영담을 바라본 조선 화가의 시선도 엿볼 수 있다.

일행이 유독 관심을 보였던 곳은 읍궁암(泣弓巖)과 암서제(巖棲齊), 그리고 만동묘가 있는 공간이다. 먼저, 화양구곡 중 제3곡으로 알려진 읍궁암이다. 우암 송시열이 화양구곡에 잠시 낙향 기거할 무렵, 1659년 조선 17대 왕 효종이 갑자기 돌아가시자 크게 슬퍼한다. 새벽마다 그는 만동묘 앞 읍궁암에 엎드려 통곡하였다고 한다.

송시열은 효종이 죽기 바로 직전(기해 독대) 효종의 부름을 받고 독대하여 북벌과 국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터다. 그런 효종이 죽었다고 하니, 송시열은 기가 차고 얼마나 황망했겠는가. 송시열이 화양구곡 읍궁암에서 통곡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아직도 원로 대신의 통곡 소리가 화양동 계곡을 휘감아 메아리친 듯하다.

1666년(60세) 우암 송시열이 충북 괴산 화양계곡으로 다시 낙향하여 맑고 깨끗한 물과 금싸라기 같은 모래가 반짝이는 곳을 금사담(金砂潭)이라 하고, 바위 위에 암서제(巖棲齊)를 짓고 학문과 세월을 낚는다. 그때 암서제로 몰려든 후학들을 마다하지 않은 우암 송시열은 학문을 전수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룬다.

무엇보다 암서제는 화양구곡 중 학문 도장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우암 송시열이 가장 애착을 보인다. 어느덧 그는 화양동 계곡의 주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런 연유랄까. 그가 즐겨 쓴 아호 역시 화양동주(華陽洞主)이다. 사람들은 암서제가 있는 금사담을 화양구곡 중 4곡이라 한다.

필자가 화양구곡에 찾아든 것은 만동묘 때문일 수도 있다. 역사 속에서나 나올법한 용어이다. 만동묘는 숙종 29년(1703년)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제자 권상하가 세운 사당으로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만동묘는 외교적 명분과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앞세운 우암 송시열의 작품이다.

알다시피 국가 간 외교란 어디 명분만으로 해결될 일인가. 우리가 챙겨야 할 실리도 있다. 우리나라 같은 크지 않은 나라들은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외교적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다. 그러함에도 송시열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와 은혜를 갚는다는 명분을 너무 앞세우지 않았을까. 이미 망해버린 나라의 황제를 추앙해야 한다니. 이후, 우리나라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는가. 숭명반청의 외교로 중원의 강자로 부상한 청나라를 지나치게 폄훼한 나머지, 혹독한 병자호란을 겪어야 했고, 삼전도의 굴욕을 당해야 했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라고 <거대한 뿌리> 시에서 일갈한 김수영 시인의 말이 생각난다. 만동묘의 역사도 우리 역사의 일부라는 말이다. 필자는 만동묘 앞에 서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을 새기며,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화양삼교를 건너자 확 트인 계곡이 펼쳐지고 산허리에 큰 바위가 첩첩이 층을 이루고 있다. 그 바위에 올라 천체를 관측할 수 있다고 하여 첨성대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첨성대를 화양구곡 중 제5곡이라 한다. 누구의 생각이든 재미있고 기발할 뿐이다. 그때 어느 노신사부부가 흰머리 휘날리며 지나친다. 계곡을 따라 걷는 그들의 모습이 다정스럽다.

바위가 구름을 찌를 듯하다는 제6곡 능운대와 용이 누워 꿈틀거리는 모습을 닮았다는 제7곡 와룡암을 지나, 제8곡 학소대(鶴巢臺)에 이른다. 청학이 바위 위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은 형국이다. 학소대의 절경에 취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화양구곡 중 제9곡 파천으로 향한다.

넓고 평탄한 흰 반석 위로 옥빛 계곡물이 용의 비늘처럼 꿰어져 흐른다. 화양동구곡 중 마지막 절경 파천(巴串)의 모습을 두고 한 말이다. 화양구곡 중 유일하게 계곡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하얀 너럭바위 위로 맑은 물이 흐른다. 아름다움을 넘어 이국적이다.

사실 화양동구곡 제8곡 학소대에 이르러 그만 돌아설까 망설였다. 파천의 광경을 보지 않았으면 어찌했을까. 파천까지 봐야 화양동구곡이 완성된 느낌이다. 우암 송시열 역시 파천을 보고 중국 무이구곡을 잊었으리.

평일이라 그런지 화양계곡을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화양구곡의 풍광은 말할 것도 없고, 잘 정돈된 계곡과 도로도 기억에 남는다. 다만, 점심으로 자연산 버섯찌개를 먹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