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은 ‘수학 숙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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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승전-운동.' 우리집에선 가훈 같은 말이다.
집 근처에 있는 많은 헬스클럽이며, 잘 갖추어진 산책로, 거기에 운동의 정도를 숫자로 항상 보여주는 스마트폰과 스마트워치까지.
스마트워치를 두고 나온 날, 몸은 분명 움직였는데 기록이 남지 않으면 운동을 헛한 것처럼 느끼진 않을까.
아내는 운동을 하라고 했지, 수학 숙제를 해오라고 한 것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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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는 말이다. 절대적인 운동 부족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 운동은 거의 만병통치약처럼 많은 부분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주는 것이 사실. 슬슬 입던 옷들의 단추 채우기가 버거워지고 있으니, 운동이 필요한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집 근처에 있는 많은 헬스클럽이며, 잘 갖추어진 산책로, 거기에 운동의 정도를 숫자로 항상 보여주는 스마트폰과 스마트워치까지. 사실 운동을 하지 않기에는 너무 좋은 환경이지 않은가.
그런데 운동을 하다보면,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든다. 저녁에 산책을 하는데, 주변 거리에는 별 관심이 없다. 조금 걷다가 보행수를 확인한다. 또 잠시 걷다가 다시 보행수를 확인한다. 그리고는 결국 채워지는 오늘의 목표 걸음 수. 그 순간 ‘오늘의 운동 완료’를 외치며 걸음을 멈춘다. 그런데 기분 좋은 시간을 보냈다는 만족보다 오늘 할 일을 끝냈다는 안도감이 앞선다.
처음에는 바람을 쐬고 몸을 움직이는 것이 좋았다. 기록을 확인하기 시작하면서 더 자주, 더 많이 걷게 되기도 했다. 체계적인 운동이 되는 느낌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주변보다 숫자를 자주 보게 됐다. ‘조금 더 걷고 싶다’는 마음은 ‘아직 이만큼 더 걸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운동을 시작하게 해준 숫자가 운동을 숙제로 만든 것은 아닐까.
그런데 운동을 꾸준히 하려면 목표를 구체적으로 정하라고 하지 않던가. 틀린 조언이 아니다. ‘앞으로 열심히 운동하자’는 마음뿐인 다짐에 구체적으로 숫자인 횟수나 거리를 붙이면 오늘 무엇을 해야 할지 선명해진다. 기록은 목표에 얼마나 가까워졌는지도 알려준다. 실제로 2024년 발표된 연구에서는 신체활동이 충분하지 않은 성인을 대상으로 한 13개 연구를 종합한 결과, 구체적인 목표를 활용하는 것이 운동량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더 많이 하게 만드는 것’과 ‘더 좋아하게 만드는 것’은 다른 문제다. 한 연구에서는 대학생들에게 만보기를 착용하게 하고 걷기 운동을 시켰다. 참가자 중 일부는 걸음 수를 확인할 수 있도록 했지만, 다른 일부는 만보기의 화면을 가려 확인할 수 없게 했다. 결과를 비교해 보니 만보기로 걸음 수를 확인한 사람들이 확실히 더 많이 걸었다. 그런데 걷기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오히려 더 낮게 보고했다. 숫자는 사람을 더 걷게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걷기를 더 좋아하게 만들지는 못했던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활동 자체가 좋아서 하려는 마음을 ‘내재적 동기’라고 한다. 그런데 이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것이 뜻밖에도 ‘보상’일 수 있다. 한 연구에서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한 집단의 아이들에게는 그림을 그리면 상장을 주겠다고 약속했고, 다른 집단의 아이들에게는 상장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물론 두 집단 모두에게 그림을 그린 후에 똑같이 상장을 줬다. 흥미로웠던 점은 상장을 받은 후에 가진 자유놀이 시간에 상장을 약속받았던 아이들의 그림 그리는 시간이 짧아진 반면, 상장을 약속받지 못했던 아이들은 여전히 자유시간에도 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상장 자체가 아니었던 셈이다. 연구자들은 좋아서 하던 활동이 상장을 약속받으면서 보상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다르게 받아들이게 된 결과라고 해석했다. ‘재미있어서 그린다’가 ‘상을 받으려고 그린다’로 활동의 이유가 바뀌면서, 활동 자체의 매력이 약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과잉정당화 효과’다. 보상이 언제나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놀이를 더 열심히 하게 만들려다 놀이를 일로 바꿀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앞서 소개한 만보기 연구에는 걸음 수에 따른 보상도, 반드시 채워야 할 목표도 없었다. 더 걸었다고 돈을 더 주거나 상장을 건네지도 않았다. 그저 숫자를 보여줬을 뿐이다. 그런데도 걷기가 덜 즐거워졌다. 연구자가 제시한 설명은 숫자가 관심을 ‘걷는 경험’에서 ‘걸은 양’으로 옮겨, 산책을 일처럼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보상으로 유혹하지 않아도 실적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놀이가 일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쯤 되면 우리 일상의 모습도 돌아보게 된다. 책을 읽고 마음에 남은 문장보다 올해 읽은 권수를 먼저 센다면 어떨까. 개운하게 잠에서 깨고도 수면 점수를 확인해야 잘 잤다고 인정한다면? 운동도 다르지 않다. 스마트워치를 두고 나온 날, 몸은 분명 움직였는데 기록이 남지 않으면 운동을 헛한 것처럼 느끼진 않을까. 숫자로 남기지 못한 경험은 없는 경험이 된 것만 같다.
숫자가 편리한 이유는 분명하다. 얼마나 했는지 한눈에 보이고, 어제의 자신이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도 쉽다. 하지만 그 편리함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이상한 일이 생긴다. 남이 숙제를 내주지 않아도 스스로 할당량을 정하고, 감독하지 않아도 수시로 실적을 확인한다. 목표를 못 채워 괴로운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목표를 모두 채우고도 즐거움 대신 ‘오늘 것도 처리했다’는 안도감만 남는다. 자신을 돌보려고 보기 시작한 숫자가 ‘자신을 감독하는 숫자’로 바뀐 셈이다.
물론 숫자를 채우는 재미도 재미다. 누군가는 풍경을 보며 걷는 것이 좋고, 누군가는 스스로 정한 거리를 걸었다는 사실에 뿌듯해 한다. 오늘의 목표를 이루고 편안해지는 마음을 가짜 만족이라고 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숫자가 즐거움을 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다른 즐거움을 인정하지 못하게 할 때다. 좋은 사람과 천천히 걸은 시간을 기록 때문에 실패로 여긴다면 그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숫자를 버릴 필요는 없다. 다만 숫자에 담기지 않은 경험까지 버리지는 말자.
가벼운 산책에서 돌아와서는 화면보다 자신의 몸과 마음에 먼저 물어보자. 걷는 동안 무엇이 좋았는지, 다음에도 다시 나오고 싶은지. 그렇다고 즐거움까지 10점 만점으로 채점할 필요는 없다. 오늘 산책에서 좋았던 장면 하나가 떠오른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날도 있어야 한다. 스마트워치에 기록되지 않았다고 몸까지 그 걸음을 없던 일로 하지는 않는다.
다음 산책에서는 ‘얼마나 걸었는지’보다 ‘무엇을 보고 왔는지’를 먼저 떠올려보려 한다. 아내는 운동을 하라고 했지, 수학 숙제를 해오라고 한 것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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